소설리스트

내 목을 꺾는 악마여-50화 (50/108)

50화.

이즈카엘은 숨을 들이켜며 이를 악물었다. 아내의 답이 주는 의미는 명확했다.

헤레이스는 그의 아이를 가지는 것은 싫다며 거부하고 있었다. 제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아이를 보여 주겠다고 거부 못 할 보상을 내밀었음에도 그걸 단숨에 내쳤다.

멍한 얼굴로 서럽게 울고 있는 건 헤레이스였건만 이즈카엘은 제 처지가 더 불쌍하게 느껴졌다. 이토록 단칼에 거절당할 줄이야. 지난 몇 년 왜라고 수없이 물어 왔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아내는 간부와의 아이는 그토록 아끼면서 그의 자식을 보는 것은 거부하고 있었다.

전처럼 돌아가고자 했던 계획이 어그러졌음을 인지한 이즈카엘은 아내에 대한 미움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가 아내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더 있다간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이즈카엘은 당장에라도 발악하며 샤를은 되고 나는 안 되냐 아내를 흔들고 싶은 것을 간신히 누른 채 등을 돌렸다.

“……마음대로 해.”

짓씹듯 나온 목소리에는 눌린 감정이 한가득이었다. 이즈카엘은 무거운 발걸음을 떼며 끓는 속을 다스렸다.

“이즈카엘!”

그가 거친 걸음으로 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헤레이스가 뒤에서 비명을 지르듯 그를 불렀다. 이즈카엘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멈춰 섰다.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아내의 숨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아내의 맨발과 인영이 조금이나마 보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믿지 않겠지만 한 번만 더 말할게요.”

소금기 가득한 목소리였다. 헤레이스는 울먹이며 이즈카엘의 등에 손을 살짝 올렸다. 굳건했던 사내가 갑작스러운 접촉에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는 끝내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헤레이스는 영원토록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남편의 등을 보다 눈을 깜빡였다. 바닥에 점점 찍히는 눈물 자국이 서러웠다. 그녀는 울음기로 막힌 숨을 어떻게든 내쉬려 애쓰며 매정한 등에 대고 간절하게 애원했다.

“에르젠, 그 아이는 당신과 나 사이의 아이예요.”

“…….”

“그러니까 제발 잘해 줘요. 내가 없어도 울지 않게…….”

“…….”

“……부탁해요.”

* * *

미겔의 유모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이 모시는 상전을 바라봤다. 아이는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제법 큰 책의 크기에 아이의 호박색 눈이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도련님, 아까는 어디 가셨어요? 갑자기 그리 사라지시면…… 제가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

집중하는 듯하여 방해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중년의 여인은 아이에게 걱정을 늘어놓고 말았다. 원래도 나이에 맞게 종종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상전이긴 했으나 지금은 성안이 어수선하지 않는가.

도망쳤던 공작 부인이 다시 돌아온 일로 성 전체가 난리였다.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공작 부인과 함께 달아난 시녀가 채찍질을 당하는 소리는 건물 안까지 들렸으므로 그녀는 혹여나 미겔이 그런 광경을 보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버지랑 있었어. 아버지랑 난 한 몸이니까.”

“예? 하지만 주인님은…….”

미겔의 답에 여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돌아온 주인은 별채에서 나오지 않았다 들었는데 언제 함께하셨지? 하나 유모의 의문은 아이의 손뼉 소리와 함께 안개처럼 흩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주인님과 함께 산책하셨지요. 제가 잠깐 잊고 있었나 봅니다.”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힘들면 기억력에 좋지 않대.”

“도련님도 참. 그런 말은 어디서…….”

중년의 여인은 나이에 맞지 않는 아이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미겔이 여인과 눈을 마주하고 따라 웃다가 눈을 반짝 빛냈다.

“유모.”

“예, 도련님.”

“……나 가지고 싶은 게 생겼어.”

아이가 꼭 좋아하는 음식을 눈앞에 둔 것처럼 입맛을 다셨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아이의 욕심에 여인이 놀란 눈을 했다.

“젤리처럼 말캉말캉해서 한 번에 짓뭉개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단단하더라고. 오래 동안 빨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에 들어.”

“예? 그게 대체 무슨……. 사탕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제가…….”

“사탕은 아니야. 비교할 수도 없지.”

“그럼…….”

“유모가 줄 수 없는 거니 신경 쓰지 마. 어차피 곧 손에 들어올 텐데, 뭐.”

아리송한 말이었다. 유모는 그게 도대체 무어냐 물으려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아이 때문에 시기를 놓쳤다. 미겔은 동화책을 카우치 끝에 아무렇게나 놓고 발랄한 걸음걸이로 문을 향해 뛰었다.

“도련님, 또 어디를 가시려고요!”

“동생이 생겼잖아. 보러 갈래.”

“아이고, 도련님! 안 됩니다!”

여인이 문을 열고 달아나는 아이를 재빨리 쫒아감과 동시에 문이 쾅 닫혔다. 그 반동에 카우치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던 동화책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더니 바람을 타고 팔랑팔랑 책장이 넘어갔다.

아이가 보는 동화책답게 책은 글보다 그림이 많았다. 커다란 짐승이 입을 벌리는 그림이 보인다 싶더니 약해진 바람 탓에 그 부분에서 책장이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나쁜 괴물이 불쌍한 모자를 한입에 삼키려 들었어요. 하지만 모자를 구해 줄 용사님은 어디에도 없었답니다. 〉활짝 벌어진 책은 그림 전체를 보여 주고 있었다. 왼편에 자리한 검은 짐승은 오른편에 위치한 모자를 한입에 삼키려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커다란 입과 무시무시한 이빨이 어찌나 무서운지 아이가 보는 동화책치고는 소름이 끼치는 장면이었다.

* * *

에르젠은 잠들어 있었다. 어미를 찾으며 온종일 울었다더니 아이의 얼굴은 눈물로 짓물러 있어 보기만 해도 가여웠다.

이즈카엘은 아이의 검은 머리카락을 뚫어져라 보다가 붉은 눈가를 지그시 바라봤다. 저 감긴 눈꺼풀 뒤에는 아내와 똑같은 색의 푸른 눈이 자리해 있겠지.

“엄마…….”

아이가 잠결에 손가락을 빨며 어미를 찾았다. 너른 침대와 이불은 아이가 추위를 느낄 새도 없이 푹신하고 두툼했으나 아이는 무에 그리 추운지 몸을 꼭 말고 있었다. 이즈카엘은 아내를 찾는 아이의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다 그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부탁해요.’

아내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부족함 없이 키울 참이었다. 비록 제 자식은 아니라지만 아내에게 말한 것과 다르게 저를 아비로 부르게 하며 세르펜스의 일원으로 키워 낼 생각이었다. 미웠으나 아내의 아이였고, 이 아이가 그를 아비로 생각하고 따른다면 아내를 영영 묶어 둘 족쇄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리하겠다 마음먹었어도 막상 아이를 보니 아내가 간통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심장은 콱 옥죄여 왔으며 산 채로 몸을 벌레에게 갉아먹히는 것처럼 이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아이에 대한 끝없는 살심이 솟구치며 아내의 소중한 존재가 그리 미울 수 없었다.

‘에르젠, 그 아이는 당신과 나 사이의 아이예요.’

아내는 끝내 그에게 거짓을 말했다. 이 아이가 그의 아이라고.

이즈카엘은 아내의 물기 어린 목소리를 기억해 내고는 눈을 감았다. 몸을 돌려 얼굴을 봤으면, 그랬다면 아내를 믿었을지도 몰랐다. 거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아내의 푸른 눈을 보면 그는 뭐에 홀린 양 아무런 생각도, 행동도 할 수 없었으니.

차라리 아내와 쫓겨난 동생의 밀회. 그 장면이 끝이라면. 그랬다면 정부를 데려와 아내를 모욕 주는 일에서 끝날 수도 있었으리라. 아내에게 같은 아픔을 주다 종국에는 자신이 틀렸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멈췄을 수도 있었다. 하나 이즈카엘은 아내의 부정에 대한 증거를 똑똑히 보고 말았다.

에르젠. 이 아이가 태어남과 동시에.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를 닮은 구석을 하나라도 타고났다면, 아니 밀회 장면을 보지 않았다면 이 아이를 제 아이라 눈감고 억지로 믿었을까.

이즈카엘이 에르젠의 위에 있던 이불을 젖혔다. 아이가 갑작스러운 추위에 몸을 더 둥글게 말았다. 그가 떨리는 손을 주체 못 한 채 아이가 입고 있는 상의를 천천히 들추었다.

“하…….”

이즈카엘이 인상을 구겼다. 절로 숨이 턱 막혔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이 떠올랐다.

‘네 첫 아들로 태어나 영광이라 해야 할까?’

그것은 태어나자마자 역겨운 숨을 쉬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와 똑같은 머리색과 눈. 이즈카엘이 징그러운 벌레를 보듯 갓 태어난 그것을 보다 등을 돌렸더랬다. 그러자 등 뒤에서 그것이 말했다.

‘그보다 빨리 네 아내를 보러 가 봐. 나 말고 다른 세르펜스의 아이가 태어나고 있잖아. 이 모습처럼 널 꼭 닮은 아이일지 몰라. 그럼 의심이 사라지고 네 마음이 한결 편하지 않겠어?’

그것에게 놀아나는 기분이라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의 방 앞에 서지도 못하고 바로 옆방에서 아내의 비명만 듣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새벽, 그는 아무도 모르게 작은 핏덩이를 싼 강보를 붉은 눈을 한 채 헤쳤다.

아이는 어느 한 구석도 저를 닮지 않았다. 모든 색과 모양이 아내만을 꼭 빼닮았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차라리 다행이라 기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만일 아내나 제가 아닌 조금이라도 다른 이의 흔적이 보였다면 의심은 가라앉지 않았을 터이니.

하지만 그날 다행이라 생각하며 아이를 다시 강보에 싸던 이즈카엘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왜…….”

다시 봐도 참담했다. 그날의 자신을 겹쳐 보던 이즈카엘이 두려운 눈으로 아이의 가장 아래 늑골 부근 등을 봤다.

아이의 보드라운 피부 위에는 딱 하나의 결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별 모양의 붉은 점. 아이의 새끼손톱만 한 그것은 흰 피부와 대조되어 숨길 수 없는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이즈카엘이 숨을 내쉬며 얼어붙은 손끝을 거뒀다. 저 특이한, 어디 가서 쉽게 보지 못할 점은 이 아이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형님!’

빛나는 샤를. 저와 다르게 모든 것을 가진, 그리하여 그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도 쉽게 차지한 이복동생. 동생도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모양의 점을 가지고 있었다. 아비도, 자신도 가지지 못한 샤를만의 특징이기도 했다.

이즈카엘이 에르젠의 상의를 내렸다. 아이가 샤를의 핏줄인 이상 그는 평생을 열패감에 시달리리라. 아내는 그의 옆에 섰지만 원래의 순리대로 동생을 사랑했다. 동생의 아이는 가지되 그의 아이는 가지지 않겠다 말했다. 동생의 아이를 데리고 그에게서 도망쳤다. 그가 그들의 관계를 망치지 않았다면 이 아이와 동생, 그리고 헤레이스 세 사람은 행복했겠지.

이즈카엘은 제가 헤레이스 인생을 망쳤노라 확인받을 때마다 괴로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아내만을 놓아줄 수 없었다. 헤레이스는 이제 제 것이었다. 제 옆자리에서 평생을 함께하고 죽어서도 함께 관에서 썩어 갈 제 반려. 이즈카엘은 죽는다 해도 아내만은 제 곁에서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내에게 하는 행동거지도, 별채의 그 방에 가둔 것도 자신은 아비와 같았다. 그렇다면 제 최후도 아비와 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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