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이즈카엘.”
“마흔여덟.”
“이즈카엘.”
“마흔아홉.”
“이즈카엘.”
“쉰……. 수고했어.”
“흐으…… 그, 그럼 흡…… 안나는…….”
50대의 매를 깎는 데는 장장 세 시간이 걸렸다. 헤레이스는 제가 실제로 이즈카엘의 이름을 수백 번은 불렀으리라 확신했다. 따끔한 목을 쥔 채 그녀가 밭은기침을 내뱉자 이즈카엘이 그녀에게 물잔을 주며 말했다.
“좋아. 약속은 약속이니까. 당신 시녀에게 내려진 벌을 거두고 치료도 해 주지. 하지만 추방 명령은 거둘 수 없어. 잘못된 충심이 당신을 또다시 어긋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으니까. 그 여자는 일주일 내로 성을 떠야 할 거야.”
헤레이스가 물을 단번에 비웠다. 적당한 온도의 물에 목의 쓰라림이 조금이나마 가셨지만 까슬까슬한 감각은 계속해서 헤레이스를 괴롭혔다.
“이즈카엘, 고,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이즈카엘.”
수백 번 말한 탓일까. 헤레이스는 짧은 감사 인사에도 습관적으로 이즈카엘의 이름을 말했다. 이즈카엘이 그런 헤레이스를 보며 기분이 좋은 듯 낮게 웃다가 그녀의 곁에 앉았다. 곧 단단한 사내의 팔이 헤레이스의 어깨와 등에 감겼다.
“의원의 말에 의하면, 당신 몸이 약해졌다더군. 밖에서 고생을 많이 한 탓이겠지.”
“…….”
“앞으로 지켜야 할 규칙만 듣고 함께 식사하러 가. 헤레이스 당신을 위해 푸른 꿩과 은어 요리를 준비하라 일렀어.”
아이를 어르듯 부드러운 목소리와 식사 메뉴는 아주 오래전 에르젠을 임신하기 전에 먹었던 것과 같았지만 헤레이스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지켜야 할 규칙이라니……. 헤레이스는 그제야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폈다. 고급 가구와 좋은 물건들로만 꾸며진 방은 아름다웠지만 답답했다. 제대로 밖을 볼 수조차 없는 구조. 게다가 이곳은……. 자신이 위치한 곳이 어딘지를 깨달은 헤레이스의 얼굴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간단해. 나와 함께가 아니라면 헤레이스 당신은 여기서 나갈 수 없어. 그게 당신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규칙이야.”
“뭐, 뭐라고요? 날 가두겠다 그 말이에요?”
“아니, 난 당신을 가두지 않아. 원한다면 자유롭게 나다녀도 좋아. 하지만 당신이 규칙을 어긴다면 내가 무슨 일을 벌일지 장담하지는 못하겠군.”
다정한 말씨 너머 말이 주는 의미가 소름이 끼쳤다. 무슨 일을 벌어질지 모른다니. 주변인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헤레이스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리라.
꽁꽁 묶인 기분에 제 발을 내려다본 그녀가 문뜩 아들을 떠올렸다.
“그, 그럼 에르젠은요? 에르젠은 여기서 나랑 함께하는 거죠? 그렇죠?”
이즈카엘의 옷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 에르젠과 떨어진다니. 헤레이스로서는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일이었지만 사내에게 잡히고 난 뒤 그녀 모자에게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충분히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왜 답을 주지 않아요. 내 아들…… 에르젠을 데려다주세요. 아직 어린 데다 오래 떨어져 있어서 나를 찾을 거예요.”
이즈카엘이 하얗게 질려 가는 작은 손을 바라보다 그 위에 제 손을 올렸다. 긴장과 공포에 질린 헤레이스의 손은 서늘한 그의 체온보다도 낮았다. 그러나 조금의 동정심도 느끼지 못한 이즈카엘은 단호히 말했다.
“헤레이스, 당신 아들은 당신과 함께하지 못해. 이곳에 머무는 건 당신뿐이야.”
“말도 안 돼요! 에르젠을 데려다줘요, 이즈카엘. 아, 아들과 함께 있고 싶어요. 에르젠을 보고 싶어요.”
헤레이스가 거친 숨을 내쉬며 헐떡이기 시작했다. 움츠린 몸을 편 그녀는 이즈카엘에게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이즈카엘이 포개고만 있던 손에 힘을 줬다. 강한 사내의 악력에 그의 옷깃을 쥐고 있던 손이 강제로 떨어졌다.
“쓰러지기 전에 못 들었나? 헤레이스 당신은 이제 내 정부에 불과해. 천한 정부한테 세르펜스 공작가의 귀한 핏줄을 맡길 수는 없잖아. 아니면 혹 아직도 당신이 공작 부인이라 착각이라도 하고 있나? 그래?”
정부. 그녀를 혼절로 밀어 넣었던 단어가 다시금 이즈카엘의 입에서 나왔지만 헤레이스는 그 말에 신경을 쓸 새가 없었다. 에르젠. 아들을 볼 수 없다는 공포감이 시시각각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다.
“싫어! 정부건 뭐건 마음대로 해! 그저…… 그저 에르젠만 내게 돌려줘요. 어차피 당신 핏줄로 여기지도 않잖아요! 에르젠은 세르펜스의 아이가 아니야. 그 애는 내, 내 아들일 뿐이야! 그러니 당신은 내 아들에게 아무런 권리도 없어!”
“……그거에 대해서도 난 분명히 말했는데. 그 아이를 내 아들로 인정할 생각은 없지만 세르펜스의 핏줄로는 인정한다고. 당신 아들은 샤를의 아이니 어찌 보면 내 조카이기도 해. 충분히 귀하게 키울 테니 걱정 마. 당신 아들한테는 여러 명의 유모와 최고의 가정 교사들이 붙을 거야.”
풀지 못한 오해가 끊임없이 헤레이스의 숨통을 조였다. 헤레이스는 아니라고 소리치려다 그만뒀다. 지난 두 달간 오해라 수십 번 말했다. 애원도 해 보고 화도 내 봤다. 하나 결과는 항상 최악으로만 달렸다.
억울함을 간신히 삼킨 채 헤레이스가 다른 방안을 찾았다.
“그 여자에게는 그러지 않았잖아요! 정부라고 해도 그 여자는 제 아이를 제 손으로 키웠잖아요!”
“그 경우는 지금과 다르지. 당시 미겔은 갓난아이였지. 아무것도 구분 못 할 나이이니 정부인 어미 손에서 크더라도 상관없었어. 억울해 마. 교육이 필요한 지금 미겔도 제 어미와 다른 방에서 지내고 있으니까.”
“거짓말! 그 여자는 아까도 자기 아들과 있었어! 나도 에르젠과 같이 있을 거야! 에르젠을 불러줘! 내 아들을 보게 해 달라고!”
헤레이스는 이성을 잃어 악을 쓰면서도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이즈카엘의 말을 빌리면 비슷한 처지의 정부라지만 샬럿은 헤레이스처럼 갇혀 있지도, 아들과의 만남이 불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일말의 관심도 없이 곁에 두고 있는 여자가 인간 껍데기를 쓰고 있는 그것과 지낸다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즈카엘에게 정부여서 아이를 볼 수 없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는 그저 헤레이스와 에르젠이 애틋하게 붙어 있는 꼴을 보기 싫었고, 동시에 헤레이스를 벌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찾는 헤레이스를 보다가 제 욕망이 얽힌 엉터리 논리를 강제로 밀어붙였다.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 당신이 여전히 공작 부인이었다면…… 아니, 정부였다 한들 감히 도망쳐 여기에 갇히는 벌을 받지 않았으면 아들의 얼굴 정도야 봤을 거야. 하지만 아까 말했지. 당신은 여기서 나갈 수 없어. 당신 아들은 여기 올 수 없고. 당신은 나랑만 있을 거야. 여기에.”
이즈카엘을 노려보던 헤레이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잠시 멎었던 울음기가 다시금 목소리에 섞여 들었다. 그녀가 이즈카엘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된다고. 에르젠을 돌려줘요. 난 내 아들만 있으면 돼요. 이즈카엘, 부탁이에요. 제발요. 제발…….”
사내의 단단한 가슴팍이 젖어 들어갔다. 울음을 쏟느라 들썩거리는 몸을 보던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의 등에 손을 올리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정 그렇게 아들을 보고 싶다면 당신한테 두 가지 방안을 알려 주지.”
실낱같은 희망에 헤레이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즈카엘은 안나의 일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그녀의 애원을 들어줄 속셈인 듯싶었다. 헤레이스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말해 보라는 듯 이즈카엘을 바라봤다.
“하나는 당신이 성을 떠난 기간만큼 여기서 얌전히 지내는 거야. 3년…… 그 기간이 지나면 규칙을 지킬 필요가 없어. 그럼 아들을 볼 수 있을 거야. 마음 같아서는 10년 동안 처박아 두고 싶지만 당신이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지는군.”
밝아졌던 얼굴에 다시 그늘이 졌다. 3년…… 그 기간을 어떻게 견디란 말인가. 단 하루라도, 아니 몇 시간만 보지 않아도 미칠 것 같은 아들이었다. 그런데 3년이라니. 헤레이스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그리고 그 순간 이즈카엘이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다른 하나는…… 잘만 하면 1년이 안 걸릴지 몰라.”
순진한 이 여자는 모를 터였다.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은 따로 있음을.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의 귀에 진정으로 그가 원하는 것을 속살거렸다.
“이번에는 적법한 아이를 가져.”
“무, 무슨…….”
예상치 못한 말에 헤레이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러나 헤레이스를 붙잡은 두 달 전부터 이를 생각했던 이즈카엘은 담담한 눈을 했다.
“다른 사내가 아닌 내 아이를 잉태하란 말이야. 여기. 이 배 속에.”
이즈카엘은 헤레이스를 용서하기 힘들었다. 감히 간통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제게서 도망을 치다니. 일련의 일들만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이성을 놓을 것 같았다.
하지만 헤레이스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면서도 그는 걱정했다. 이대로 계속 제 화를 받아 내다간 아내가 견디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성별은 상관없어. 우리 사이 첫아이가 태어나면 여기서 내보내 주지. 그뿐인가. 공작 부인 자리도 당신에게 돌려주겠어.”
이즈카엘은 섬세한 유리 인형 같은 아내가 깨지는 걸 원하지도, 그녀와 영영 이 상태로 지내기도 싫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내에게서 아이라는 대가를 받아 낸 뒤 모든 것을 묻을 참이었다.
지금 마음 상태를 생각하면 그게 가능할까 싶었지만 진짜 제 아이를 안고 웃어 주는 헤레이스를 상상하니 가능도 할 듯싶었다. 그가 헤레이스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보다가 그녀를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어떤 방법을 택할지는 당신 하기에 달렸지만 난 후자가 더 괜찮은 방법 같군. 혹 몰라. 당신이 내 아이를 가지면 내 마음이 약해질지도.”
“…….”
“……임신이 확인되면 당신 아들을 일주일에 한 번 이리 데려오지. 그럼 열 달을 기다릴 필요도 없잖아. 그러니 아이를 가져. 당신이 적법한 아이만 가지면 우리는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성을 떠난 만큼 여기 있겠어요.”
헤레이스가 사내의 품을 빠져나오며 예상 밖의 말을 했다. 아내가 후자를 택할 거라 조금의 의심도 않았던 이즈카엘의 눈이 커졌다. 그가 아내의 어깨를 쥐었다.
“뭐?”
“두 가지 방안 중에 선택을 해야 한다면 전자를 택하겠다는 말이에요.”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의 얼굴에서 조금의 갈등하는 기색도 찾지 못했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구기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당신 아들을 보고 싶지 않나? 미리 말해 두지만 난 이 이상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어. 전자를 택한다면 당신은 당신 아들을 보지 못한 채 3년에 가까운 시간을 견뎌야 할 거야.”
눈앞에 3년이라는 세월을 그린 듯 헤레이스의 푸른 눈동자에 막막함과 함께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그러나 젖은 얼굴을 할지언정 그녀는 단호했다.
“그렇다 해도 당신 같은 사람의 아이를 가질 수는 없어요. 그건 에르젠에게도, 태어날 아이에게도 못할 짓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