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미겔이 손가락을 들어 머리 옆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침대로 다가왔다. 조막만 한 아이가 침대에 누워 있는 헤레이스를 보더니 이불 밖으로 나온 손을 쓸며 늙은이처럼 혀를 찼다.
“그러면 제대로 된 공작 부인 대우를 해 줘야지. 네 말에 충격받아 쓰러진 꼴이 안 보여? 가여워라……. 하기야 그 시절 디본의 요정은 미래의 자신이 이런 일을 겪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어쩌다 저런 놈한테 인생을 저당 잡혀서는. 쯧!”
작은 손이 헤레이스의 살결에 닿자 가만있던 이즈카엘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그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미겔의 손을 쳐 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벌을 받아야 해. 스스로 박차고 나간 게 어떤 건지 깨달아야 한다고.”
이즈카엘은 이참에 헤레이스에게 똑똑히 알려 줄 참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냉혹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영리한 아내이니 분명 빠른 시일 내에 깨닫게 되겠지. 그의 곁을 벗어나면, 그의 자비가 사라지면 안 된다는 것을.
미겔이 저와 똑같은 금안이 잔혹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헤레이스를 측은한 눈으로 보다 이즈카엘을 쳐다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즈카엘, 네게 진심으로 하는 충고인데 사랑하는 여자를 이기려 들지 마.”
“…….”
“네 아내는 전장에 있는 무시무시한 적장도, 집요하게 널 괴롭히는 정치적 경쟁자도 아니야. 억지로 꺾어 봤자 결국 땅을 치고 후회하는 건 너일 텐데 왜 고생을 자초하지?”
“…….”
“영리한 사내들은 경험으로 알지. 지금 네가 하는 짓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짓이야.”
“충고라…… 인간도 아닌 것이 꼭 인간처럼 말하는군. 누가 보면 네놈이 그런 일을 겪은 줄 알겠어.”
묵묵히 듣던 이즈카엘이 우습다는 듯 대꾸했다. 그러자 웃음을 잃지 않았던 미겔의 얼굴에 아주 잠깐이지만 미소가 사라졌다.
“……그러게 말이야. 인간들 속에 너무 오래 있었나. 아니면 네 피를 먹고 인간 여자의 배를 가르고 태어나 그런가. 내게도 그새 사람 냄새가 배긴 했어. 하기야 이 몸뚱이가 인간 형상을 하고 있으니 당연한가?”
미겔이 눈썹을 내리깔고 손톱으로 제 손등을 죽 그었다. 둥글게 다듬어 별로 날카롭지도 않은 손톱이었건만 지나간 자리가 칼로 깊게 베어 낸 듯 쩍 갈라지고 피가 맺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퐁퐁 솟다 못해 바닥으로 떨어지던 붉은 액체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다시 살 속을 파고들었으며 피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맞붙어 매끄러운 도자기처럼 말끔해졌다.
“아가씨! 헤레이스 아가…… 이거 놔! 아악!”
도저히 사람처럼 보일 수 없는 광경에 이즈카엘이 눈살을 찌푸릴 때였다. 밖에서 들리는 여자의 높은 비명이 집중을 앗아 갔다.
폐쇄된 방인 데다 거리가 멀어 일반 청력을 지닌 이들은 비명의 존재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내와 아이는 당장에라도 무언가를 찢어발길 듯 날카로운 비명 가운데 간간이 아가씨라는 단어가 섞여 있는 것도 알아챘다.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본 미겔이 눈을 가늘게 뜨며 빈정거렸다.
“오, 세상에. 기껏 해 준 충고가 소용없네. 너 지금보다 더한 일을 벌일 생각이지?”
울부짖으며 헤레이스를 찾는 목소리는 안나의 것이었다. 이즈카엘이 입매를 일자로 굳히며 무언으로 긍정을 표했다.
이즈카엘이 보기에 안나라는 여자는 헤레이스와 저 사이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였다. 진즉 치워 버렸어야 했는데.
저 여자가 없었다면 아내는 과연 도망칠 수 있었을까? 아니, 도망쳤다 한들 이리 오래 잡히지 않을 수 있었을까? 헤레이스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여자였다. 조력자가 없었다면 도망칠 용기조차 훨씬 늦게 냈으리라.
끝까지 아가씨라는 혼전 호칭으로 아내를 지칭하는 것도 거슬렸다. 누구더러 아가씨란 말인가. 헤레이스는 부인이었다. 세르펜스 공작 부인. 이즈카엘의 아내. 그의 여자. 그녀는 누구에게든 마땅히 그렇게 불려야 했다.
이제야 헤레이스와 자신의 사이에 있던 큰 장애물 하나를 치워 냈다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곧 떠오른 훨씬 큰 장애물에 이즈카엘의 눈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저 여자처럼 바로 치워 버릴 수 없는 존재. 헤레이스를 닮아 상냥한 눈을 한 아이가 떠올랐다.
어린아이에게 품기에는 잔인한 마음이 불쑥 솟았다. 아내의 아들을 볼 때마다 이즈카엘은 억제하기 힘든 광기에 휩싸였다. 특히 그 아이 몸에 난…….
‘……없애 버리고 싶어.’
“쯧!”
이즈카엘을 상념에서 꺼내 준 것은 미겔이었다.
그는 혀를 차다 안나의 목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자 다시 한번 헤레이스에게 손을 가져다 댔다. 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이번에는 헤레이스의 눈가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헤레이스는 그새 무슨 꿈을 꾸는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저 여자까지 곁을 떠나면 더 힘들어할 텐데. 아, 불쌍한 공작 부인……. 가여운 어머니. 어쩜 좋아.”
미겔의 말에 이즈카엘의 낯이 살기로 가득 찼다. 어머니라니. 당장에라도 미겔의 목을 물어뜯어 죽일 듯이 응시하는 이즈카엘의 금안은 사냥감을 앞둔 이리의 것과 같았다. 그러나 미겔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웃으며 이즈카엘을 마주 봤다.
“왜 그렇게 봐? 내가 네 아들인 이상 네 아내가 내 어미인 것은 당연하잖아?”
“닥쳐. 한 번 더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면…….”
“지껄이면? 날 없애 버리기라도 하려고? 지금껏 찾았던 그 잡동사니로? 효과 있는 게 있긴 하고?”
이즈카엘의 눈동자가 순간이지만 커졌다. 그가 미겔을 경계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저것은 자신이 그를 없애 버릴 성물을 찾아 돌아다닌 것을 알고 있었다. 딱히 숨기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발각되었다 생각하니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런 얼굴 마. 어차피 너 숨길 생각도 안 했잖아. 아들을 죽이려는 아비라니. 너무 잔혹한 일이야. 인간들은 보통 이런 걸 비극적인 삶이라 한다지?”
이즈카엘이 무언가를 가늠하듯 어린 아들의 얼굴을 훑었다. 비극이라 말하면서도 히죽거리는 꼴이 미겔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처단해야 할 적을 확인한 눈이 서늘하게 식어 갔다. 머리를 식힌 이즈카엘이 느릿하게 말했다.
“그래. 난 네놈을 다시 지옥 바닥에 처넣을 생각이야.”
“그거 정말 무섭네.”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곧 네놈을 본래 있었던 구덩이로 밀어 넣어 줄 테니. 목마저 따 버리면 그따위 낯짝으로 기어오르지 못하겠지.”
제 피를 이은 핏줄에게는 절대 못 할 말이요, 일평생의 원수에게도 하기 힘든 지독한 말이었지만 말을 뱉은 이나 듣는 이나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어린 세 살배기 아들은 오히려 함박웃음을 지으며 진심으로 고대한다는 듯 아비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뜻대로 하세요, 아버지. 이 불손한 아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 *
헤레이스는 바닥에 꿇어앉아 저를 내려다보는 사내의 바지를 붙들었다. 일어나자마자 움직인 터라 온몸이 고통에 부르짖었지만 부서진다 해도 매달려야 했다. 그리하여 사내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더는 안나를 곁에 두겠다며 고집부리지 않을게요. 그러니 벌을 멈추고 안나를 치료해 줘요. 저대로 매질을 당하고 쫓겨났다간 목, 목숨을…… 흐윽…… 목숨을 장담할 수 없어요.”
별채에서 깨어난 헤레이스는 낯선 환경을 눈에 담기도 전에 신음을 흘리는 안나와 마주해야 했다. 깨끗했던 안나의 등은 온통 피투성이로, 찢어진 옷 사이로 상처가 그대로 보였다.
헤레이스는 안나의 처참한 모습에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아끼는 시녀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었다. 이즈카엘이 그녀를 붙잡은 뒤 안나를 방에서 내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안나에게 가기 위해 버둥거리는 헤레이스를 붙잡고 속삭였다.
‘헤레이스, 당신 시녀가 어찌 될 지 알아?’
이즈카엘은 안나의 충정을 높게 사 죽이지는 않겠다 했으나, 헤레이스를 부추겨 도주한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며 채찍으로 100대 친 직후 치료 없이 쫒아낼 예정이라 했다. 헤레이스는 절대 안 된다며 눈물을 흘리고 용서해 달라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그러자 이즈카엘은 가련히 우는 헤레이스에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
‘……아직 반밖에 맞지 못했다 하더군. 50대가 더 남았다지.’
헤레이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알았다. 이즈카엘이 안나를 살려 둘 생각이 없음을. 그의 눈빛만 봐도, 숨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안나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을.
그녀는 안나가 이대로 죽게끔 두고 볼 수 없었기에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일을 했다.
“대단한 게 아니잖아요. 주인 잘못 만난 아이를 가엾게 여겨 줄 수도 있잖아요. 내 잘못인데 왜…… 왜 이렇게 잔인하게 구는 거예요.”
비굴하고 또 비천하게, 헤레이스는 노예가 주인에게 하듯 이즈카엘의 발치에 고개를 조아렸다. 그에게 굴종하며 자비를 구걸했다.
“다, 다시는 안나와 만나지 않겠어요. 그저 살려만 줘요. 제발…… 내가 이렇게 빌게요. 제발…….”
지난 3년 조금이나마 강인해졌던 정신은 단 몇 시간 만에 박살 났다. 헤레이스는 전보다 더한 약자로 자리했다.
한없이 약해진 아내를 보는 이즈카엘의 눈이 한껏 다정해졌다. 그가 울며 제게 매달리는 헤레이스를 일으켜 세우는가 싶더니 그녀를 안아 들고 푹신한 침대로 데려가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선 채 허리를 숙여 흰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입을 열었다.
“헤레이스, 당신 목소리는 제법 괜찮지.”
바라는 것과는 동떨어진 답에 헤레이스가 당혹스러운 낯을 했다. 이즈카엘이 방 너머 실내정원에 있는 새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름답게 곡선이 그려진 새장 안에는 파란 무언가가 앉아 있었다.
“저기 있는 새와 비견될 만해. 하지만 저것은 그저 날짐승에 불과해 사람 소리는 내지 못해. 그러니 당신이 저 파랑새 대신 내 이름을 천천히 읊어 봐. 한 번 부를 때마다 당신 시녀가 맞아야 하는 매를 한 대씩 줄여 주지.”
새장 속 새 취급이었지만 안나를 구할 방도에 헤레이스는 그저 감사했다. 그녀가 훌쩍이며 숨을 고르다 이즈카엘을 불렀다.
“……이즈카엘.”
“마음에 들지 않아. 울음이 섞여 듣기 거북해. 제대로 값을 쳐주지 못하겠는걸.”
안나의 목숨을 구할 대가치고는 어쩐지 지나치게 쉽다 싶었다. 헤레이스는 제 턱을 잡아 올리는 이즈카엘의 엄한 눈빛에 목적을 이루는 과정이 험난할 것을 직감했다.
“이, 이즈카엘.”
“다시. 더듬지 말고 제대로 해.”
예상대로 그는 지나치게 까다로웠다. 헤레이스는 울먹이지도, 더듬지도, 하다못해 그의 눈을 피하지도 말아야 했다. 결국 매 한 대를 감면하는 데 열일곱 번의 시도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