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목이 답답해지는 기분에 숨을 헐떡이자 어느새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가만히 있으려던 헤레이스는 머뭇거리다가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다시 마차 밖을 봤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익숙했던 건물의 외곽과 함께 계단 아래 정렬해 있는 사용인들이 보였다.
‘……아직 있었구나.’
헤레이스가 사용인들 앞에 선 금발 여인을 보다가 시선을 뗐다. 몇 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을 보자 마음 한편이 따끔거렸다. 그러나 여인을 처음 봤을 때처럼 힘들거나 아프지는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싶을 뿐.
멍하니 있던 헤레이스가 피식 웃음을 흘리다 말았다. 몇 년 전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때 마차에 있었던 것은 저 여인이요, 저기 서 있던 것은 자신이었건만 이제는 상황이 반대였다.
‘서 있는 모습이 자연스러웠어. 하긴 나보다 오래 이 성에 살았으니 당연한가.’
사용인들 앞에 자리한 샬럿은 당당한 성의 여주인이었다. 허한 웃음을 내려놓은 헤레이스가 발을 까딱거렸다. 자신이 싫다 거부한 것이긴 했으나 허망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족쇄를 맨 채 발을 움직이자 곧 그것의 무게에 발목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헤레이스가 툭 아무렇게나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때마침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 문이 열리며 폭군과도 같은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
이즈카엘이 가만히 앉아 있는 헤레이스를 보다 차갑게 명령했다.
“내려.”
“아…….”
알겠다 고개를 끄덕일 새도 없었다.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의 단단한 손아귀에 잡혀 끌려 나오듯 마차에서 내렸다.
족쇄의 사슬이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헤레이스는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얼굴을 붉히며 자유롭지 못한 제 다리를 내려다봤다.
이즈카엘 또한 사슬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헤레이스를 바라보다 입가를 비틀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 조금만 천천히 가요.”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수치심이 묻어났다. 헤레이스가 주위 도열에 있는 이들을 보며 이즈카엘에게 애원했지만, 그는 걸음을 재촉하는 것으로 헤레이스의 부탁을 묵살했다. 헤레이스는 눈물이 핑 도는 걸 간신히 참은 채 이즈카엘에게 끌려가다시피 해 걸었다.
이즈카엘이 걸음을 멈춘 건 샬럿의 얼굴이 뚜렷해진 후였다. 샬럿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이즈카엘과 헤레이스를 번갈아 노려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힘이 잔뜩 들어간 턱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었다. 헤레이스는 미움으로 일그러진 샬럿의 녹안을 차마 마주하지 못한 채 시선을 피했다.
“아버지!”
그때, 아이의 밝은 목소리가 끔찍하리만치 냉랭한 분위기를 깼다. 모두의 시선이 샬럿의 옆에 있던 아이에게 닿는 순간, 작은 몸이 폴짝 뛰어올라 이즈카엘의 품을 파고들었다.
“귀환을 축하드려요. 많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미겔은 아이 특유의 천진함을 간직하면서도 또래보다 어른스러웠다. 헤레이스는 에르젠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아이를 보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내리 물었다.
이즈카엘을 꼭 닮은 아이는 에르젠과 동갑이며 형제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키는 물론, 혈색 좋은 뺨, 결 좋은 머리카락, 또랑또랑한 눈 등 아이는 모든 것이 제 동생을 앞섰다.
게다가 아이의 옷은 어떤가. 깨끗하긴 했으나 여기저기 닳은 티가 역력했던 에르젠의 옷과 달리, 미겔은 잘 다림질된 근사한 옷을 입고 있었다. 산골 마을에서는 티 나지 않았건만 이리 보니 새삼 에르젠이 얼마나 못 먹고 못 입었는지가 다가와 헤레이스는 가슴이 미어졌다.
“날씨가 아직 추운데 마중을 다 나오고. 대견하구나, 미겔.”
곁눈질로 헤레이스를 살핀 이즈카엘이 그답지 않게 웃으며 품 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말씨에는 아이를 향한 배려가 가득했다. 아이가 기쁜 듯 웃으며 아비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헤이레스는 시선을 아래에 두었다.
푸른 눈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언뜻 스치자 그를 목격한 이즈카엘이 만족스러운 듯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가 아내의 팔을 아무렇게나 잡고 샬럿과 미겔의 앞으로 끌었다.
“인사하지.”
담백한 그 말에 샬럿의 눈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양 주먹을 꾹 쥔 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어찌나 확연한지, 대신 민망해진 사용인들이 허리를 더 깊게 수그렸다. 하지만 어찌 됐건 성의 주인인 이즈카엘의 명이었다. 샬럿이 이즈카엘의 서늘한 낯에 몸을 움찔거리다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
“누가 너더러 인사하라 했나.”
샬럿의 고개가 완전히 내려가기 전이었다. 이즈카엘이 손을 뻗어 샬럿을 막았다. 그가 헤레이스의 등을 쿡 찌르며 조금 전보다 더 진한 비소를 물었다.
“……비슷한 처지라 한들 순서라는 게 있지.”
도통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다. 헤레이스와 샬럿은 물론이고, 근처에 있던 사용인들도 순간 어리둥절한 눈을 했다. 하지만 샬럿을 비롯해 눈치 빠른 이들은 곧 이즈카엘의 의중을 헤아렸다.
사용인 몇이 경악에 가까운 얼굴을 함과 동시에 샬럿이 입꼬리를 올리면서도 설마 하는 얼굴로 이즈카엘을 봤다. 그와 눈을 마주친 그녀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이즈카엘?”
질문이었으되 이미 답을 확신한 목소리였다. 악의로 번들거리는 샬럿의 눈웃음은 헤레이스에게 향했고, 헤레이스는 등을 찌르는 사내의 손가락이 저를 찌르는 화살이 되어 박히는 것을 느꼈다.
푸른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한 것을 확인한 이즈카엘이 긴 손가락으로 헤레이스의 척추뼈를 따라 올라가며 선을 그렸다. 소름 끼치는 감각과 함께 손가락 끝이 곧 목에 닿았다.
“순서를 따져야 한다는 말이야. 위아래를 정해 놓지 않으면 집안이 어그러지기 마련이거든.”
그가 훤히 드러난 헤레이스의 목덜미를 아무렇게나 지분거렸다. 고귀한 공작 부인에게는 절대 하지 않을 천박한 희롱이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당한 모욕에 헤레이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즈카엘을 바라봤다. 그녀의 푸른 눈이 간절함을 담은 채 소리 없이 말했다.
‘이러지 말아요.’
보이지 않는 상처가 방금 당한 화상처럼 뚜렷했지만 이즈카엘은 그 상처를 지워 주기는커녕 더 선명히, 그리하여 각인처럼 새기길 원했다. 이즈카엘이 그녀를 희롱하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 샬럿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샬럿, 먼저 정부가 된 것도 너고 내게 첫아이를 안겨 준 것도 너다. 그러니 네가 우선인 게 당연하지. 물론 이쪽이 전에 공작 부인 노릇을 했다고는 하지만…….”
이즈카엘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눈이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잔인한 빛을 띠었다. 그가 헤레이스를 위아래로 훑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제 발로 박차고 갔으니 앗아 간다 한들 할 말이 없지.”
이토록 노골적인 말을 못 알아들을 이는 이제 없었다. 이즈카엘은 말하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더는 공작 부인이 아니라고. 그녀는 샬럿과 똑같이, 아니 그녀보다 아래인 정부일 뿐이라고.
누구도 예상 못 한 징벌이었다. 이즈카엘은 제 곁에서 도망간 아내를 3년 만에 잡아 와 상상도 못할 모욕과 수치를 주고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참함에 헤레이스의 입술이 그녀의 눈처럼 파랗게 변해 갔다.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쓰러질 듯 위태롭게 휘청이는 모습이 차마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아내를 정부로 끌어내린 사내는 스스럼없이 명할 뿐이었다.
“뭐 하나, 헤레이스. 먼저 인사하지 않고.”
헤레이스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숨이 가쁘고 머리가 당장 쪼개질 듯 아팠다. 누군가 눈앞을 흩트려 놓은 듯 모든 사물이 휘어져 보이며 당장에라도 녹아내릴 듯 일렁였다. 헤레이스가 손을 올려 제 이마를 짚었다.
“뭐 하세…… 아니, 뭐 해? 공작님 말씀 안 들려? 우리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 인사는 나눠야지.”
샬럿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팔짱을 끼더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헤레이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귓가에 맴도는 소리는 높고 끔찍한 이명뿐이었다.
감각이 한 박자씩 느려졌다. 헤레이스는 제 몸이 균형을 잃고 허물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다른 이들의 표정을 본 뒤 알아챘다.
‘아…….’
단단한 손이 헤레이스를 붙잡더니 곧이어 안아 올렸다. 몸 전체를 세게 쥔 손아귀 힘이 흐릿한 가운데서도 집요하다고 느껴졌다.
헤레이스가 가물거리는 정신을 놓아 버리려 눈을 천천히 감았다. 하지만 시야가 완전히 닫히기 직전, 기이한 빛이 그녀를 향해 반짝였다.
축 늘어진 채 눈을 깜빡이니 빨려 들어갈 듯 아름다운 금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작고 도톰한 입술 사이 붉디붉은 혀가 스르르 기어 나왔다.
똬리를 튼 뱀이 그녀에게 유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도와줄까?」
* * *
헤레이스는 세르펜스 성 구석진 곳에 위치한 별채의 어느 방에 누워 있었다. 눈을 꼭 감은 그녀는 얼굴이 창백한 것이 꼭 시체 같았다.
단장이 끝난 별채는, 그중에서도 헤레이스가 현재 누워 있는 내실은 최소한의 사용인들만 출입이 허가된 별채에서도 가장 안쪽 깊은 곳에 자리했다. 그렇기에 지금 방 안에는 헤레이스를 포함한 세 사람의 인기척만이 적막을 갈랐다.
“여긴 여전하네. 예쁜 새장이야.”
미겔은 익숙한 듯 방 안을 돌아다니다 한쪽 벽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보통 투명한 창은 건물 밖이 보여야 정상이었건만 이곳의 유리창 너머에는 갖가지 식물이 자라고 있는 예쁜 실내 유리온실이, 또 그 너머에는 높다란 담장과 실외 정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푸릇한 넝쿨과 함께 여러 조각으로 꾸며진 담은 제법 아름다웠지만 성인 남성 두 명의 키보다 높은 것이 위압감을 먼저 선사했다.
미겔은 창 너머로 유리온실 한가운데 위치한 분수를 바라보다 분수 가장 꼭대기 여인상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발끝까지 내린 여인상은 물동이를 비스듬히 인 채 투명한 물을 아래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여인상이 쏟아 내는 물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던 미겔이 유리창에 비친 이즈카엘의 모습을 보고 비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그는 쓰러진 헤레이스의 이마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는 중이었다.
“가짜 정부라…… 너무 악취미 아냐? 실제로는 그 여자가 네 아내라는 지칭을 혹여나 버릴까 안절부절못하면서.”
이즈카엘은 성내 사람들에게 기이한 명을 내렸다. 헤레이스에게서 공작 부인의 권한을 앗아 가니 제가 명을 거둘 때까지 그녀에게 공작 부인의 호칭을 쓰지 말라고.
하나 동시에 그는 다른 명도 내렸다. 권한과 호칭을 빼앗겼을 뿐 그녀는 여전히 세르펜스 성의 하나뿐인 공작 부인이니 상전을 모시는 데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있으면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정신 나간 주인 하나 때문에 온 성에 있는 사람들이 팔자에도 없는 연기를 하게 생겼네. 공작 부인이되 공작 부인으로 부르지도, 대우하지도 말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럴 거면 차라리 진짜 정부로 만들어. 다른 사람 헷갈리지 않게.”
비꼼 가득한 말에도 이즈카엘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헤레이스의 이마에서 입을 뗀 후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헤레이스는 내 아내고, 우리는 신 앞에 맹세한 적법한 부부야. 내가 세르펜스 공작인 이상 그녀는 무덤에서도 세르펜스 공작 부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