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참 뻔뻔하군.”
이즈카엘의 얼굴이 스산해졌다. 그가 손을 뻗어 제 앞에 꿇어앉고 있는 아내의 턱을 세게 쥔 채 한 음절 한 음절 힘을 줘 말했다.
“아까 왜 당신을 벌주지 않냐 물었지? 당신이 당신 아들의 아비와 함께 있지 않아서야. 여사제들만 있는 신전에 머문 것이 내 자비를 한껏 키웠지. 하지만 내가 이대로 당신을 용서했다 착각하면 곤란해. 난 그저 성에 도착할 때까지 참고 있을 뿐이야. 알아들어?”
“아윽…… 아, 아파요!”
“헤레이스, 내 어여쁜 아내. 당신은 내가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는 머저리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 알고 있어. 당신 아들의 아비가 누구인지.”
고통에 허우적거리면서도 헤레이스가 눈을 치켜떴다.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게 무슨 말이냐 따지기라도 하겠건만 턱을 세게 그러쥔 이즈카엘 때문에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그녀가 이즈카엘의 손을 떼려 손톱을 세웠다.
“그, 그게 무…… 으!”
이즈카엘은 꼭 상처 입은 맹수 같았다. 그가 헤레이스를 거칠게 일으켜 세우더니 마차 시트에 그대로 밀어 눕혔다. 헤레이스가 반사적으로 일어나려 했지만 이즈카엘이 조금 더 빨랐다. 족쇄의 사슬이 쩔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배신감에 치를 떨며 아내와 간통했다 믿어 의심치 않는 간부의 이름을 담았다.
“……샤를. 꿈속에서도 그리운 듯 불렀던 당신 전 약혼자, 내 동생 말이야. 여러 번 성에 들락거렸더군.”
여기서 튀어나올 거라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헤레이스가 눈을 크게 떴다. 샤를이라니 그게 무슨……. 그러나 어느 찰나의 순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이즈카엘 모르게 샤를과 만난 적이 있긴 했다. 마지막이라며 그녀를 찾아온 전 약혼자. 좋지 못한 일로 끊어진 연이니 본래라면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샤를과 그녀는 정략으로만 이어진 사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어릴 적 소꿉친구요, 10년 이상 인연을 이어 온 사이였다. 헤레이스는 어미의 죄로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난 뒤 아예 다른 나라로 건너갈 거라 말하는 소꿉친구와의 만남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하나 그렇다 해서 부정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헤레이스는 하늘에 맹세할 수 있었다.
‘……미안. 헤레이스 너한테 너무 미안한데…… 말 안 하고는 못 배기겠어.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샤를…….’
‘헤레이스, 내가 널 많이 사랑해. 항상 좋아하고 있었어.’
‘샤를, 나는…… 미안해. 너한테 정말 미안한데 난 네 마음을 받을 수 없어. 나는…….’
그 만남은 작별 인사나 마찬가지였다. 헤레이스도, 샤를도 그걸 인지하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서럽게 울지언정 단호히 샤를을 거절했고 샤를 또한 그녀의 거절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으리라. 헤레이스가 제 고백을 거부할 것을.
‘……이즈카엘, 내 남편을 사랑해.’
‘…….’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샤를 너도 알고 있을 거야. 나 사실 오래 전부터…….’
‘그만.’
‘…….’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러니 그만해, 헤레이스.’
‘미, 미안해. 샤를, 미안해…….’
어차피 떠나겠다 말한 사람이니 거절만 하고 말았어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샤를에게 또다시 상처 주는 길을 택하면서도 헤레이스는 불편한 과거를 끄집어냈다. 그녀는 그만큼 제 사랑에 자신이 있었다. 눈앞의 사내를 사랑했었다.
“샤를의 피를 이었으니 당신 아들도 세르펜스의 성을 쓸 자격이 있지. 하지만 난 내 피를 잇지 않은 아이의 아비 노릇을 할 생각은 없어. 그러니 더는 날 머저리 취급 하려 하지 마. 속았다는 사실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취급이 더 불쾌하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이러는가. 어떤 오해를 하고 내게 이런 말을 내뱉는 거지? 눌린 몸의 고통을 잊을 만큼 따가운 통증이 심장을 찔렀다. 헤레이스가 젖은 눈을 한 채 사내를 올려다봤다.
‘이 사람은 왜 나를 믿어 주지…… 않아?’
헤레이스는 제가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이 배신감인 것을 깨닫고 놀랐다. 3년이 넘는 시간, 이즈카엘을 모조리 지워 냈다 생각했건만 그가 한 오해의 실체를 안 순간 저를 믿어 주지 않았다는 슬픔이 몸을 지배했다.
그러나 동시에 헤레이스는 바위틈에서 샘물이 솟아나듯 제 심장 부근에서 무언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설명하면 괜찮아. 그때 상황만 말해 주면…….’
오해임이 확실해졌으니 풀면 그만이었다. 잘 설명하면 그도 분명……. 헤레이스가 울컥하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산들바람을 타고 살포시 내려앉은 희망의 씨앗을 꼭 쥐었다.
“아니야. 내 말 좀 들어 봐요, 이즈카엘. 당신이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샤를과 난…… 아악!”
재회 후 헤레이스가 처음으로 이즈카엘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샤를이 나오는 순간 이즈카엘은 유령처럼 기기하고 섬뜩한 표정을 짓더니 헤레이스의 입을 커다란 손으로 틀어막았다.
“닥쳐.”
“읍!”
“제발 닥쳐, 헤레이스. 그 이름을 내 앞에서 부르지 마. 당신 입으로, 당신 목소리로 그 이름을 외지 마.”
발작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그가 헤레이스의 입을 막은 채 헤레이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이가 하얀 목덜미에 닿는가 싶더니 죄악이 헤레이스의 귀에 닿았다.
“……당신이 말할 이름은 내 이름뿐이야.”
* * *
“이게 다 뭐야!”
탁자를 들고 나르던 하인이 여인의 날카로운 고함에 깜짝 놀라 멈춰 섰다. 그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자 금발의 여인이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씩씩거리는 것이 보였다. 상대를 알아본 하인이 허둥지둥 탁자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뭐 하는 거냐 묻잖아!”
“저 그게…….”
샬럿의 재촉에 하인이 우물거렸다. 그러자 샬럿의 뒤에 있던 하녀가 툭 튀어나오더니 일갈했다.
“부인께서 물어보시잖아요. 빨리 답 못 해요?”
‘부인은 무슨…… 릴리 저것은 무에 좋다 저 여자 앞잡이 노릇이야.’ 고개를 푹 수그린 하인이 속으로 샬럿과 하녀를 욕하며 비굴하게 손바닥을 비볐다. 기분이 나쁜 것과 별개로 샬럿은 두려운 존재였다.
“저쪽 별채에 갈 물건을 옮기고 있습니다, 부인.”
하인의 입에서 부인이라는 말이 나오자 샬럿의 눈썹이 일순 내려앉았다. 그녀가 자신의 목을 감싼 흰여우 목도리를 쓸며 재차 물었다.
“그 구석에 있는 별채? 거기에 이걸 왜 가져가?”
“저도 이유는 잘 모릅니다. 다만 주인님의 명이라는 말밖에…….”
“뭐?”
이즈카엘의 명이라는 말이 나오자 샬럿의 음성이 다시금 높아졌다. 그녀가 목도리를 쓸던 손을 입으로 가져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고 보니 그 계집을 찾았다는 말이 돌던데……. 정말인가? 그 계집이 돌아와 날 본채 뒤 별채도 아닌 저 구석 별채로 내치려는 거야?’
그동안 가까스로 눌러 왔던 불안감이 한순간에 차올랐다.
부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성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샬럿이었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권한은 얼마간의 황금과 아랫것들의 거짓된 예의뿐. 헤레이스가 떠나고 몇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샬럿은 세르펜스 성의 실질적인 권한은 물론, 그 어떤 것도 쥐지 못했다.
‘내 아들이 누군지 알아? 미겔의 어미가 누군지 아냐고! 나야! 내가 다음 공작의 어미라고! 그런데 뭐? 나한테는 아무것도 알려 줄 게 없어? 너! 당장 죽고 싶어?’
‘돌아가십시오. 아가씨께서는 이곳에 출입할 수 없으십니다.’
샬럿이 아무리 난동을 부리고 패악질을 해도 이즈카엘이 성에 두고 간 수하들은 꼼짝하지 않았다. 몇 번은 넘치는 황금으로 그들을 회유해 보려 했지만 그들은 그 사실조차 이즈카엘에게 고하며 샬럿을 옥죌 뿐, 무표정한 얼굴을 바꾸지 않았다. 덕분에 샬럿은 아랫것들과 비슷한 시기가 돼서야 이즈카엘이 성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알 수 있었다.
“그,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부들부들 떠는 샬럿에게서 위험을 감지한 하인이 탁자를 들고 재빠르게 도망쳤다. 샬럿 옆에 있던 하녀도 상전의 상태가 심각해짐을 깨닫고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아니야. 아닐 거야. 3년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계집이 돌아올 리 없잖아? 별채는…… 이제 봄이니까. 손님을 맞이해야 하니까 꾸미는 거야.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어. 암…… 이제 와 날 별채로 내칠 리 없지. 난 후계자의 어미인걸.”
잘게 떨리는 혼잣말과 함께 잘 다듬어진 손톱 끝이 뭉개지고 일그러졌다. 어미의 손톱을 지그시 바라본 미겔이 픽 웃으며 샬럿에게 잡힌 손을 살랑 흔들었다. 샬럿이 그 경쾌한 박자에 시선을 아들에게 두었다.
“어머니, 그 말은 틀렸어요.”
“뭐?”
미겔의 말은 샬럿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았다. 아이가 비밀을 말해 주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리며 손가락으로 동쪽을 가리켰다.
“공작 부인께서 돌아오고 계세요. 아버지랑 함께.”
* * *
헤레이스가 머물던 신전에서 세르펜스 성까지는 말에 익숙한 기사들이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도 한 달쯤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혹독한 겨울 날씨 때문에 세르펜스 성으로의 귀환은 훨씬 지체됐다.
기사들은 몇 달 만의 귀환과 물씬 불어오는 봄 향기에 한껏 들떠 저들끼리 떠들었지만, 헤레이스는 마차 창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들어 밖을 보다가 힘없이 손을 내렸다.
‘……결국 돌아왔구나.’
성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헤레이스가 한숨을 쉬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이 정경이 반가운 모양이었지만 헤레이스 모자에게 저 거대한 성은 유배지나 진배없었다.
“아…….”
창밖으로 성벽을 바라보던 헤레이스가 일순 제 목 부근을 감싸 쥐며 신음을 뱉었다. 그녀의 목에는 울긋불긋한 열꽃이 옅게 남아 있었다. 헤레이스가 옷깃을 젖히고 목에 남은 자국을 보다 옷을 최대한 끄집어 올렸다. 수치스러운 지난밤이 기억났다.
‘이대로 있으면 안 돼.’
에르젠을 위해서라도 무엇이든 생각해야 했건만 날이 갈수록 힘들어지는 몸처럼 정신도 무기력해졌다.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이즈카엘을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했다.
헤레이스는 지난 두 달간 그에게 수없이 말했다. 당신이 오해하고 있노라고. 하지만 그녀가 그 주제를 입에 담을 때마다 이즈카엘은 비소를 흘리거나 조용히 서늘한 분기를 드러낼 뿐이었다.
‘매번 그리 거짓을 말하면 부끄럽지 않나?’
게다가 그는 헤레이스의 입에서 샤를의 이름이 거론될 때면 반미치광이처럼 굴었다. 헤레이스는 그가 큰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을 때마다 두려움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의 손에 이끌려 신음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헤레이스는 제 마음속 무언가 부서지는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