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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45화 (45/108)

45화.

윌리엄이 그녀를 가둬 놨던 저택에서 나온 뒤, 이즈카엘은 헤레이스를 제법 편안한 마차에 태웠다. 아들이 걱정된 헤레이스는 달리는 마차 안에서 에르젠이 괜찮으냐 수백 번 물었지만 이즈카엘은 고개만 까딱일 뿐, 아들을 보게 해 달라는 애원에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헤레이스가 에르젠과 함께 있겠다며 달리는 마차 문을 열고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그러나 목숨을 건 헤레이스의 난동에 이즈카엘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족쇄를 던지더니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스스로 그걸 차면 하루에 세 시간 아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지.’

‘난 짐승이 아니에요. 이런 건…….’

‘선택은 당신이 해. 아이를 볼 텐가, 아니면 지금 이대로 갈 텐가. 또 한차례 난리 칠 생각은 마. 한 번만 더 그리하면 당신 아들에게 붙인 의원을 물리겠어.’

그는 에르젠을 오롯이 쥐고 있는 사내였다. 헤레이스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없었다. 헤레이스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끼며 아이와 함께하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저 자신을 원망했다.

“치! 엄마 미워! 맨날 바쁘잖아. 이번 겨울에 일 끝나면 에르젠하고 실컷 놀아 준다고 해 놓고. 맨날 거짓말이야. 흐아아앙.”

어미의 심경을 모르는 에르젠이 울음을 터뜨리며 심하게 몸부림쳤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의 과격한 몸짓에 헤레이스가 당황한 채 허둥지둥 아이를 꼭 껴안았다.

“에르젠? 에르젠, 울지 마. 엄마가 잘못했어. 울지 마. 응?”

“엄마 싫어! 미워!”

에르젠의 입장에서 이 정도야 당연했다. 아이의 약한 인내심은 여러 요인으로 바닥이 난 지 오래였다. 어리고 여린 신체는 여러 일과 익숙지 않는 마차 생활로 내내 긴장된 상태였으며, 심리는 익숙한 곳을 갑자기 떠난 것과 어미와 떨어져 있게 된 일로 불안이 가득 찬 상태였다.

어미의 필사적인 달램에도 아이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큰 소리로 울어 재꼈다.

“에르젠, 울지 마. 뚝. 엄마가 미안해. 그러니까 울지 마. 제발…….”

헤레이스의 말끝이 흐릿하게 이어졌다. 그녀는 에르젠을 구슬리며 몰래 제 눈가를 쓸었다.

“엄마…… 흐윽.”

에르젠은 한참 만에 울음을 멈췄다. 힘을 잔뜩 뺀 모양인지 금세 잠이 든 모습에 헤레이스가 참았던 눈물을 두어 방울 떨궜다. 아이는 그 와중에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헤레이스의 옷깃을 꾹 쥔 채 놓지 않았다. 잠결에 어미를 부르는 목소리가 어찌나 가슴 아픈지. 헤레이스는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고통에 제 가슴을 몇 번이고 쳤다.

잠든 에르젠을 안고 얼마를 얼렀을까. 마차 창밖으로 해가 저물어 가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떨어지려면 조금 남은 시간이었지만, 헤레이스는 아들을 꼭 껴안고 부드러운 뺨에 몇 번이고 입맞춤했다. 그림자 방향만 봐도 알았다. 이제 곧 에르젠과 헤어질 시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워워 소리와 함께 말들이 걸음을 느리게 했다.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는가 싶더니 곧이어 멈췄다.

“여기서 잠깐 쉬고 간다!”

휴식을 외치는 기사의 고함 뒤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 문 앞에서 끊겼다. 헤레이스는 마차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고개를 수그린 채 빼앗기기 싫다는 듯 에르젠을 품에 꼭 안았다.

달칵.

마차 문이 열리자 이즈카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헤레이스에게 안겨 잠든 아이를 차가운 눈으로 훑어보다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헤레이스는 주저하며 에르젠을 더욱 세게 안았다가 곧 힘을 빼고 이즈카엘에게 아들을 넘겼다.

이즈카엘은 헤레이스보다 훨씬 손쉽게 아이를 안아 들었다. 하지만 덜렁거리는 아이의 다리를 보건대 그의 행동에는 핏줄에게 줄 법한 배려 따위는 없는 듯했다. 감자 포대 옮기듯 아이를 다룬 그가 몸을 돌려 안나에게 에르젠을 넘겼다. 안나가 에르젠을 안아 들며 입 모양으로 헤레이스를 불렀다.

아-가-씨.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에게 이끌려 마차에 탄 다음 날이 돼서야 안나가 붙잡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즈카엘에게 안나만은 놓아 달라 부탁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위협뿐이었다.

‘당신과 함께 도망친 계집에 대해 말하는 거라면 입 닫아. 그러잖아도 당장 목을 베고 싶은 걸 당신 아이 때문에 살려 두는 거니까.’

마차에 갇혀 있는 헤레이스가 안나를 볼 수 있는 건 에르젠이 오고 가는 시간뿐이었다. 헤레이스가 안나를 향해 미미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하지만 커다란 사내의 몸에 가려진 안나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싶더니 이즈카엘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탁.

헤레이스는 굳게 닫히는 마차 문소리에 마른침을 삼켰다. 하루 중 가장 힘든 시간이 막 시작될 참이었다.

이즈카엘은 헤레이스가 에르젠과 헤어지는 시간부터 아침까지 그녀와 함께했다. 잠잘 때조차 그는 헤레이스의 곁을 떠나지 않았기에 그녀는 내내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어라 하겠는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는 것뿐이었다.

“…….”

“…….”

함께 있다 해서 이즈카엘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헤레이스를 지그시 보거나 눈을 감고 있는 게 다였다. 물론 헤레이스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같은 침묵 속이었지만 두 사람의 태도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이즈카엘이 편히 있는 것과 다르게 헤레이스는 숨 막히는 분위기에 심한 압박감을 느끼며 잔뜩 긴장해 있었다.

특히 이즈카엘이 그녀를 또렷이 노려볼 때면 헤레이스는 폐가 막히고 숨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즈카엘과 함께일 때면 항상 고개를 수그리거나 모로 틀었다. 덕분에 나중에는 꺾인 목이 아파 헤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는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헤레이스의 맞은편에 앉은 이즈카엘은 겉에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어 옆에 내려놓더니 팔짱을 낀 채 아무 말 없이 헤레이스를 봤다. 무감한 듯싶으면서도 집요하고, 또 화가 난 것처럼 일렁이는 금안. 헤레이스가 차마 그 눈을 마주 보지 못한 채 시선을 떨구며 배에 손을 올렸다. 먹은 것도 별로 없건만 속이 매슥거렸다.

“출발한다!”

그렇게 몇 시간 같은 수 분이 흘렀다. 짧은 휴식이 끝나고 기사의 고함에 따라 마차가 움직일 때였다.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고 있던 이즈카엘이 푹신한 마차 벽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에 올리고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누가 보면 내가 당신을 겁박하는 줄 알겠군.”

“…….”

“일주일 동안 한마디 먼저 말 거는 법도 없고.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 줘야 하지? 당신, 내게 용서를 빌 마음이 있긴 하나?”

생각지도 못한 말에 헤레이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용서? 내가 무얼 그리 잘못했는데. 두려움과 이성이 팽배해 머릿속을 차지했음에도 억울함과 분기가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의 말을 차갑게 받아쳤다.

“……난 잘못한 게 없어요.”

그 말에 심기가 불편해진 듯 이즈카엘의 미간이 구겨지며 은발과 같은 색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즈카엘이 기대 있던 등을 펴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잘못한 게 없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감히 제멋대로 성을 떠나 몇 년을 돌아다닌 주제에?”

“…….”

“헤레이스,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자원이 낭비됐는지는 아나? 게다가 그따위 반성도 없는 자세라…… 당신은 당장에라도 치죄받아 마땅해.”

“그렇게 생각하면서 왜 지금 당장 날 벌하지 않아요? 그때처럼 멋대로 뺨이라도 때려요. 잔말 없이 맞아 줄 테니.”

찌를 듯 저를 쏘아보는 푸른 눈에 이즈카엘은 노여움이 차오르는 것 대신 희열감을 느꼈다. 아내의 눈이 오롯이 저를 향할 때면 손끝이 절로 찌릿찌릿하며 살아 있음을 확인받는 듯했다.

그가 나른한 숨을 내쉬며 잔잔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격앙된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의 웃음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일주일 넘게 눌러 왔던 감정을 터뜨렸다.

“말이 나와서 하는 거지만…… 난 이해가 가지 않아요. 날 싫어하잖아요. 에르젠을 당신 핏줄로 여기지 않잖아요. 그럼 우리를 그냥 두면 되는데…… 왜 찾아와 이러는 거예요. 당신 말대로 왜 인력과 돈을 낭비하며 날 찾는 거예요!”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나? 당신은 내 거야. 내 옆에 있어야 하는 내 것이라고.”

몇 번이고 들었지만 이해되지도 않을뿐더러 불쾌하기만 한 답이었다.

헤레이스는 속이 갑갑해져 목소리를 높이려다 꾹 참고 숨을 골랐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아들의 이름을 외다 의자에서 내려와 이즈카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바닥이 그대로 느껴져 어지러웠지만 지금이 아니면 용기 낼 기회가 없으리라.

“……그럼 나랑 에르젠을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다시 돌아가 뭘 하려는 거예요?”

“…….”

“지금이라도 우리를 놓아줘요. 이렇게 부탁할게요.”

이즈카엘은 어쩐지 손이 허전하다 생각했다. 예전의 아내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을 때마다 그의 손 혹은 옷깃을 붙잡고 매달렸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어떤가. 아내는 손을 모아 쥘지언정 그를 붙잡지 않았다. 게다가 그뿐인가. 아내는 그와 재회한 뒤 단 한 순간도 그의 이름을 외치지 않았다.

아이의 이름은 그렇게 부르면서. 나는 당신을 그렇게 부르고 또 불렀는데. 분명 되찾았는데 왜 더 멀어지는 기분일까?

이즈카엘의 인내심이 급속도로 얇아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기이한 광기가 그에게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건 당신이 결정할 일이 아니야. 당신이나 당신 아들이나 처우가 어찌 될지는 내 손에 달렸어. 그러니 주제넘게 굴지 마.”

“당신 아들…….”

냉랭한 답에 헤레이스가 얼굴을 구기다 참기 힘들다는 것처럼 특정 단어를 늘어뜨렸다. 곧 그녀가 결심한 듯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이즈카엘을 마주 봤다.

“에르젠은 분명 내 아이예요. 하지만 당신의 피도 이어받은 아이예요. 왜 계속 그걸 부정해요?”

“…….”

“떠나기 전에도 몇 번이고 묻고 싶었어요. 왜 나를 의심했어요? 부정을 저지른 건 당신인데 왜 계속 나를 부정한 아내로 만들었어요?”

푸른 눈이 공포를 이겨 낸 채 결판을 내겠다는 듯 빛났다. 오히려 눈동자가 요동치는 것은 이즈카엘이었다. 무언가 떠올린 그가 멈칫거리다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그날의 기억과 함께 손이 절로 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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