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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44화 (44/108)

44화.

“하지만 에르젠을…… 아이를 빨리 꺼내야 해요.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는데…….”

헤레이스가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아들과 자물쇠를 번갈아 보며 울음 섞인 목소리를 내자, 이즈카엘이 미간을 구기며 그녀를 노려봤다.

“그렇게 애타는 얼굴 마. 당신이 그러면 당장에라도 이 열쇠를 밖으로 집어 던지고 싶어지니까.”

“그, 그게 무슨…….”

“말 그대로야. 이대로 내가 열쇠 버리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거기 서서 지켜보기나 해.”

헤레이스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그러나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시체의 꼴을 보면 이즈카엘은 그러고도 남을 사내였다. 지난 세월 그가 얼마나 에르젠에게 무심하고 또 잔인했는지 상기한 헤레이스는 입술을 꾹 내리 물었다.

철컥.

자물쇠는 여섯 번째 시도 끝에 열렸다. 우리가 열리자마자 헤레이스가 에르젠을 꺼내 품에 꼭 안아 들었다. 축 처진 아이는 숨을 쉬고 있었지만 어딘가 창백했다.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헤레이스가 몸을 돌렸다.

“……어딜 가려고.”

하지만 우악스레 그녀를 잡아끄는 손길에 헤레이스는 단 한 발도 움직이지 못했다. 아이 걱정에 미칠 것 같아진 헤레이스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비켜!”

“헤레이스 당신은 어디도 못 가.”

“에르젠이 보이지 않아요? 의원한테 보여야 해요! 가야 한다고!”

이즈카엘은 제게 잡혀 버둥거리는 헤레이스를 보다 무심한 눈으로 에르젠을 살폈다. 그러더니 한순간에 헤레이스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안았다.

“무슨 짓이에요!”

“이런 산골짜기 시골에 있는 의원보다야 나를 따라온 자가 낫겠지.”

이즈카엘이 에르젠을 안아 들고는 부서진 문 쪽으로 향했다. 이 방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헤레이스에게도 익숙한 몇몇 기사들이 있었다. 이즈카엘은 에드가에게 에르젠을 넘겨주며 의원에게 보이라 일렀다.

“에르젠! 놔요! 놔 달라고! 나도 갈 거야! 놔!”

“……걱정 마십시오, 부인.”

에르젠을 안아 든 에드가가 급히 걸음을 옮기려다 이즈카엘에게 잡힌 채 울부짖고 있는 헤레이스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이즈카엘은 멋대로 헤레이스에게 말을 거는 에드가가 못마땅한 듯 눈썹을 치켜세웠으나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헤레이스는 에르젠이 사라질 때까지 몸부림치다 아들이 시야에 보이지 않자 그대로 주저앉았다.

“흐윽…… 에르젠…….”

“……몇 년 만의 만남인데 당신은 변함없이 아이만 찾는군.”

이즈카엘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은 헤레이스를 내려다보며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헤레이스가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위를 노려봤다.

“그럼 아이 대신 당신 따위를 찾을까 봐?”

“…….”

“나를 어떻게 찾았어! 또 나한테! 에르젠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고함치며 씨근덕거리는 헤레이스는 미친 여자 같았다. 조금 전 아이를 걱정하며 창백히 질려 있던 여자는 없었다.

눌러 왔던 무언가 터져 나온 듯 그녀는 주저앉은 채 발을 앞으로 뻗고 얼굴을 양손에 묻었다. 거친 몸짓에 마른 몸을 감싸고 있던 허름한 드레스 어깨 부근이 찢어지며 하얀 살결을 그대로 내보였다.

“나가.”

묵묵히 헤레이스를 보고 있던 이즈카엘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그가 제 뒤에 있는 기사들에게 흉흉히 말하자 기사들이 재빨리 물러났다.

아내의 드러난 어깨를 따라 시선을 내린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의 손을 보고는 헛웃음을 뱉었다. 하얗고 곱기만 하던 헤레이스의 손은 어느새 조금 변해 있었다. 매끄러운 피부는 조금 까슬까슬해졌고, 길고 잘 관리돼 있던 손톱은 짧게 잘려 있었으며, 손가락 마디 끝은 무언가에 찔린 듯 발갛게 상처가 나 있었다.

‘저렇게 살면서도…….’

아내도 분명 알았을 것이다. 귀족가 영애로, 또 부인으로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온 자신이 그의 곁을 떠나는 순간 고생할 것을.

그러나 아내는 거적때기를 두르고 평민처럼 살며, 전이었다면 그녀의 발끝도 보지 못했을 사내놈에게 강제로 취해질 뻔하면서도 그를 찾지 않았다. 만일 그가 적절한 때 이곳에 들이닥치지 못했다면 저 방 안 시체가 된 놈에게 몸을 내줬겠지.

이즈카엘은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왜?’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세르펜스 성에서 제 행위에는 그리 치를 떨었으면서 왜…….

‘당신한테 난 뭐지?’

지난 세월 아내를 찾으며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말이 또 떠올랐다. 하지만 그 물음을 아내에게 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즈카엘은 헤레이스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 뒤 밀쳐 벽에 기대게끔 했다.

강한 힘은 아니었으나 단단한 벽은 헤레이스에게 충분히 고통을 줬다. 헤레이스가 등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신음을 뱉었다.

“아흑!”

“헤레이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당신은 지금 이리 울며불며 불평할 때가 아니야. 오히려 나한테 감사해야 하지.”

“놔! 이거 놓으라고!”

“난 쥐새끼처럼 달아난 당신을 벌하지 않고 있어. 게다가 보기 싫은 당신 아들 목숨까지 살려 주려 하고 있잖나.”

이즈카엘의 입에서 에르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헤레이스가 눈을 크게 떴다. 덕분에 맺혀 있던 눈물이 주르륵 뺨을 가로질렀다. 이즈카엘은 아이 이야기만 나오면 애끓는 표정을 하는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삐뚜름한 미소를 문 채 지독한 말을 지껄였다.

“지난 세월 당신을 찾느라 허비한 시간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당신 아이를 길바닥에 내버리고 싶어. 그래야 당신도 나만큼 괴로울 테니까.”

에르젠을 내버린다는 말에 헤레이스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누구 멋대로 저런 말을 내뱉는단 말인가. 에르젠에게 아비란 존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헤레이스가 다시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난 찾으라 한 적 없어! 왜 멋대로 굴고는 내 탓을 해! 왜 에르젠을 끌어들여!”

“…….”

“당신은 내 아이를 입에 담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 우리 앞에서 사라져! 내게 에르젠을 돌려주고 꺼지라고!”

이즈카엘에게 지금 헤레이스의 모습은 참으로 생소했다. 이 여자가 이리 험한 말도 할 줄 알았던가. 자신에게서 벗어나 너무도 달라진 아내가 그는 낯설면서도 못마땅했다.

‘모두 다…….’

의원에게 보이라 내보냈던 아이에 대한 살기가 끓었다. 다 그 아이 때문이었다. 작고 여린 아내가 품은 그 부정의 산물. 다른 사내의 씨.

하지만 그는 그토록 증오하고 미워하는 아이를 당장 죽일 수도, 해를 끼칠 수도 없었다. 그리한다면 눈앞의 아내는……. 입술을 말아 문 그가 사라질 것 같은 이성을 가까스로 움켜쥔 채 헤레이스의 귀에 속삭였다.

“……그건 안 되지, 헤레이스. 당신은 내 것이잖아. 난 절대 당신을 빼앗기지 않아. 누구라도 내게서 당신을 앗아 간다면 저 방 안 시체처럼…… 아니, 저것보다 더 잔인하게 도륙을 낼 거야. 죽어서도 찾지 못하게. 몸뿐 아니라 영혼까지 검으로 갈기갈기 찢어 버릴 거라고. 물론…….”

축축한 혀가 귀에 닿을 듯 말 듯 하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즈카엘은 제게 독기 어린 시선을 보내면서도 두려움에 부들부들 떠는 아내의 양쪽 어깨를 꾹 쥐었다. 그리고 금빛 눈을 휘어 보이며 부드러이 말했다.

“……당신 애새끼도 예외는 아니지.”

진심이었다. 말을 한 이즈카엘도, 이걸 들은 헤레이스도 말속에 담긴 진심을 알아챘다.

헤레이스는 방 안에 있는 윌리엄의 시체를 기억했다. 에르젠이 그 꼴이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저는 분명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아이를 향한 검 끝에 헤레이스가 피식자로서 이즈카엘에게 목을 내밀었다.

“그, 그러지 말아요. 제발…… 하지 말아요. 네?”

“…….”

“내, 내가 잘못했어요. 헛소리가 나온 거예요. 난 그냥…… 지, 지금 상황이 당황스러워서…….”

“…….”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러니 에르젠에게 그러지 말아요. 에, 에르젠은…… 흐윽.”

전처럼 돌아온 아내가 흡족했다. 이즈카엘은 제 손에 말랑하게 잡히는 아내의 몸을 안고 그리웠던 체취를 마음껏 맡았다. 침대 위에서 천 쪼가리를 끌어안은 채 구질구질하게 굴었던 날들을 모조리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다행이야. 당신이 여전히 영리해서.”

한껏 자비로워진 폭군이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더니 아내를 소중히 안아 들었다. 헤레이스는 얌전히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하지만 순종적인 자세와 달리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허망했고 눈은 멍하니 허공만을 향해 있었다. 또다시 눈물이 뺨을 가로질러 턱 끝에 맺혔다가 이즈카엘의 팔에 떨어졌다.

아내의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본 이즈카엘이 고개를 숙여 흰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래. 이대로면 괜찮다. 아내만 제 곁에 있어 준다면. 이 삶을 그녀와 함께하고 무덤에 같이 묻힐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가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만 가자. 돌아갈 시간이야, 헤레이스.”

* * *

“엄마…….”

“우리 에르젠, 왜? 아직도 머리가 아파?”

에르젠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으나 헤레이스는 혹여나 싶어 아이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이의 이마는 미적지근한 것이 정상이었으나 헤레이스는 에르젠의 얼굴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폈다. 짧은 시일 동안 험한 일을 여러 번 당한 아이였다. 이맘때쯤 아이에게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가 혼절이었으므로 헤레이스는 아들이 멀쩡하다가도 갑자기 잘못될까 내내 긴장하고 있었다.

“계속 엄마랑 있으면 안 돼? 왜 에르젠이랑 같이 못 있어?”

아이가 우물거리다 헤레이스의 품에 얼굴을 푹 묻으며 칭얼거렸다. 투정을 부리는 목소리에는 어미와 떨어지기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헤레이스는 눈가가 시큰거리는 것을 꾹 참고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는 일을 해야 해서 그래. 전에도 봤지? 일하고 있을 때는 바빠서 에르젠을 못 보는 거야.”

아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단 세 시간. 게다가 그것조차 두 다리의 자유를 대가로 간신히 얻어 낸 것이었다. 드레스 아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헤레이스의 양 발목에는 서로 연결된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녀는 혹여나 족쇄를 연결한 사슬이 부딪치며 소리를 내 에르젠이 이것을 알아챌까 조심했다.

족쇄를 건 이는 다름 아닌 헤레이스 자신이었다. 물론 그녀에게 그런 선택을 하게끔 만든 이는 따로 있었지만. 헤레이스가 일행의 가장 앞에서 말을 타고 있을 사내를 생각하다 서글픈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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