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대신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 때는 좋아. 사냥의 묘미는 거기에 있지. 여기 오기 전에는 다이어 후작이 여는 사냥에 참가했는데…… 그 재수 없는 돼지 놈, 살이 뒤룩뒤룩 쪄 말에도 제대로 못 오르는 주제에 제법 괜찮은 사냥터를 가지고 있더군.”
“흐읍! 읍! 으읍!”
그가 날이 번뜩이는 단검을 쥐고 창살을 한 번 더 긁자 헤레이스가 몸을 꿈틀대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추억에 잠긴 윌리엄은 헤레이스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 이야기에 도취한 그가 단검을 그 자신의 쪽으로 거둬들였다는 것이었다.
“짐승들이 많아서 사냥은 성공적이었어. 덕분에 마음껏 자비를 베풀 수 있었지.”
그날을 상기하며 윌리엄이 낄낄거렸지만 헤레이스는 그가 어떤 얼굴을 하든 어떤 목소리를 내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오로지 단검과 에르젠을 번갈아 담을 뿐이었다.
몸을 움직여 앞으로 기는 방법을 터득한 그녀가 조금씩 아들 쪽으로 나아갔다.
“제일 흥분될 때는 그때였어. 사슴 두 마리를 잡았는데 어미와 새끼였거든. 새끼는 사냥 중에 죽었는데 그 모습을 본 어미 사슴이…….”
헤레이스가 제 이야기에 관심을 두지 않자 윌리엄이 단검을 다시 우리 쪽으로 가져갔다. 이번에는 단검이 창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헤레이스가 거의 발작하듯 몸을 버둥댔다. 그녀는 나무 바닥 아귀에 살갗이 쓸리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흐으…… 읍! 읍!”
“……지금 너처럼 굴더라고.”
헤레이스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는 걸 본 윌리엄이 탁자 위에 단검을 박아 넣고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뚜벅거리며 걷는 모양새가 바닥을 기는 헤레이스와는 정반대로 경쾌했다. 몇 발짝 만에 헤레이스에게 닿은 윌리엄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뒤 헤레이스의 입을 막고 있는 천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눈과 소리는 영영 못 잊을 거야. 사실 묻고 싶기도 했어. 새끼가 먼저 죽는 걸 목격한 심정이 얼마나 참담한지 말이야. 하지만 짐승은 말을 못 하니까. 이걸로 단숨에 자비를 베풀었지.”
가까이서 윌리엄을 본 헤레이스는 그의 눈 흰자가 불그스름한 데다 손이 잘게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천을 제대로 끌러 내지 못해 욕을 몇 번씩 뱉은 그에게서는 진한 술 냄새가 풍겼다. 헤레이스는 사내가 술에 잔뜩 취했음을 깨닫고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이 사람 술에 취했어.’
윌리엄은 한참 만에 매듭을 풀었다. 헤레이스는 입이 자유로워지자 그를 마주 보며 침착한 어조로 천천히 말했다.
“원하는 대로 해 드릴게요.”
“뭐?”
말끝이 조금 떨리기는 했으나 윌리엄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담담해 보이는 헤레이스를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때처럼 울면서 싹싹 빌 줄 알았는데 저 눈은 뭐란 말인가. 여인의 푸른 눈은 그의 짐작과 반대로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나리께서 원하시는 대로 뭐든 하겠다 말씀드리는 거예요. 전 짐승이 아닌 사람이에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요. 그러니 아이를 잃고 짐승처럼 미쳐 버린 여자를 안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그만 자비를 베푸세요.”
그러나 실상 헤레이스는 침착해지기 위해 온 정신을 다 쏟고 있었다. 여기서 울어 봤자 에르젠을 구할 방도는 없었다. 그리고 짧게나마 겪은 일을 비추건대 사내는 나름대로 준비를 했으리라. 그때처럼 사제들의 도움을 기대하기 힘든 이상 에르젠을 구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임을 헤레이스는 인지했다.
“하! 생각보다 발랑 까진 계집이로군. 하기야 애까지 낳은 계집인데 사내 맛을 모를 리 없지.”
뺨을 툭툭 아무렇게나 치는 손에도 헤레이스는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눈을 내리깐 채 최대한 순종적인 자세를 취했다. 꺾어서라도 가지고픈 계집이 먼저 나서 꺾여 주자 윌리엄이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혹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닌가? 사실 평민 계집이 나 같은 귀족 꼬드기기가 어디 쉽나. 응?”
“…….”
“자, 그럼…… 네 아이를 구하고 싶으면 예쁘게 굴어 봐. 너 같은 계집은 울며 비명을 지르는 것도 나름 재미라. 재미없게 굴면 알지? 어미 사슴의 심정을 네 입으로 말하게 될 거야.”
헤레이스가 고개를 주억이자 윌리엄이 그녀의 손을 묶은 밧줄을 풀기 위해 고개를 더 깊숙이 숙였다. 사내의 거친 숨이 얼굴 가까이 닿자 역겨움에 토기가 밀려왔다.
‘에르젠.’
올라오는 신물을 간신히 삼킨 채 헤레이스가 속으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제발 일이 끝날 때까지만 잠들어 주기를……. 꾹 감은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구슬프게 흘렀다.
“……기다린 보람이 있는데.”
밧줄을 풀어 낸 윌리엄이 휘파람을 불며 헤레이스를 똑바로 누였다. 번들거리는 그의 눈에는 주체 못 할 더러운 욕구가 있었다. 그가 헤레이스의 턱을 쥔 채 이리저리 비틀며 구경하다 혀로 제 입술을 핥았다.
우지직.
하지만 그가 몸을 막 움직이려던 차, 나무 문이 부서지며 먼지가 일었다. 놀란 윌리엄이 고개 돌려 문가를 봤다.
“뭐…… 뭐야!”
희뿌연 먼지 사이로 웬 사람 인영이 보인다 싶더니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윌리엄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눈 한번 깜빡할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으…… 으아아아악!”
벽에 부딪쳤는지 신음을 흘리던 윌리엄은 제 어깨를 보며 눈을 뒤집어 깠다. 작살난 듯 으그러진 채 피를 쏟는 그의 어깨에는 큼지막한 검이 장창처럼 꽂혀 있었다.
“어으…… 아, 아버지. 아흑…… 살, 살려…….”
본래라면 충격으로 즉사해도 이상할 것 없는 부상이었지만 술에 취해 있는 윌리엄은 기절조차 못 한 채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나마 멀쩡한 팔로 바닥을 짚고 꿈틀거리는 그의 모습은 흡사 흙을 파먹고 사는 벌레 같았다.
“아…….”
뒤늦게 윌리엄의 모습을 본 헤레이스가 창백한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그녀를 강제로 취하려던 자였지만 사람이 저런 모습이라니…….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그녀의 충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온몸을 달달 떨며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는 그녀의 앞에 긴 다리가 나타난다 싶더니, 커다란 등 뒤에 늘어진 검은 망토가 벽으로 변해 윌리엄을 가렸다.
“……사지를 절단해야 다시 살아나지 않을 벌레로군.”
잊을 수 없는 목소리에 헤레이스의 고개가 서서히 올라갔다.
그리고 그녀는 보고 말았다. 커튼 사이 가늘게 들어오는 빛에 반사된 은발을,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고 있는 형형한 금안을, 3년 넘게 잊으려 했건만 결코 잊지 못했던 수려한 얼굴을.
헤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울먹이며 뒤로 물러났다. 사내의 유려한 턱선이 그런 헤레이스를 쫒았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사라졌다. 꾸르륵, 피가 역류하는 소리가 방 안에 소름 끼치게 울렸다. 곧 붉은 피가 벽면에 사선으로 흩어졌다.
“남편 아닌 다른 사내 아래에 있는 아내라…….”
나지막이 읊조리는 말과 함께 사내가 걸음을 떼자 핏자국이 바닥을 선명히 장식했다. 헤레이스는 빠르게 식어 끈적거리는 검은 피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하나 시야를 차단하기 무섭게 커다란 두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는 오른손 엄지로 헤레이스의 눈 밑 눈물을 훔쳤다.
반사적으로 눈을 뜬 헤레이스를 향해 이즈카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 남편에게 보일 꼴은 아니군. 안 그래, 헤레이스?”
헤레이스는 아주 찰나, 그 짧은 시간 이즈카엘과 눈을 맞췄다.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에 상대의 색채가 담긴 순간, 시간은 기다란 실처럼 늘어져 의미를 잃었다.
그녀는 이즈카엘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즈카엘도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한쪽은 허망한 표정을 지은 채 당장에라도 울 듯이 축축한 눈을 했고, 다른 한쪽은 집요한 눈을 형형히 빛낼 뿐이었다.
그러나 찰나는 찰나였다. 멈춰 버린 시간이 다시 빠르게 돌았다. 헤레이스는 눈을 깜빡이는 동시에 정신을 차린 듯 사색이 되어 외쳤다.
“에르젠!”
그 이름이 마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는 이즈카엘을 잊었다. 이즈카엘은 저를 밀치고 일어서려다 묶인 발목에 휘청거리며 주저앉는 헤레이스를 서늘한 표정으로 붙잡았다.
“……여전하군, 당신은.”
“놔! 놓으라고!”
눈앞의 사내는 더 이상 헤레이스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헤레이스는 저를 붙잡은 사내를 다시금 쳐 내고 허겁지겁 제 발목을 묶은 밧줄을 풀어냈다. 어찌나 세게 묶었는지 발목은 그새 피가 통하지 않아 파랗게 질려 있었다.
“에, 에르젠.”
비틀거리면서도 헤레이스는 단걸음에 에르젠이 갇힌 우리로 갔다. 아이는 죽은 듯 미동이 없었다. 헤레이스가 우리 문을 쥐고 흔들었다. 가는 창살은 보기보다 튼튼한지 우리는 삐걱거리며 움직이기만 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문에 걸린 자물쇠를 확인한 헤레이스가 두리번거리다 윌리엄의 시체를 멍한 눈으로 봤다. 어깨가 으그러진 채 목 가운데를 관통당한 시체는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을 저리게 했으나,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죽은 자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비릿한 죽음의 향이 코끝에 지독하리만치 달라붙었다.
헤레이스는 드레스 자락에 피가 묻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윌리엄의 시체 앞에 양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녀가 열쇠를 찾으려 시체의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댈 때, 커다란 손이 그대로 헤레이스의 어깨를 잡아채더니 그녀를 뒤로 내동댕이쳤다.
“아악!”
“헤레이스, 당신은 내 아내야. 그러니 다른 사내에게 함부로 닿지 마.”
무덤덤한 어조와 다르게 사내의 몸에서는 뾰족한 살기가 넘쳤다. 그는 이미 죽어 버린 윌리엄을 다시 죽일 기세로 노려보다 헤레이스를 밀치고 시체의 허리춤과 주머니 등을 뒤지기 시작했다. 곧 피 묻은 열쇠 뭉치가 사내의 큰 손에 잡혀 쩔그럭 소리를 냈다.
“이, 이리 줘요. 당장…….”
“…….”
이즈카엘은 열쇠를 낚아채려 하는 헤레이스를 손쉽게 막은 뒤 아무 말 없이 큰 보폭으로 걸어갔다. 헤레이스가 급히 그를 뒤따르며 애타는 얼굴을 했다.
우리 앞에 도착한 이즈카엘이 자물쇠에 열쇠를 맞춰 넣었으나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즈카엘이 차분히 그다음 열쇠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두 번째도 실패였다. 헤레이스의 얼굴이 창백히 질려 갔다. 결국 세 번째 열쇠조차 자물쇠를 열지 못하자 애가 탄 헤레이스가 덜덜 떨며 이즈카엘에게 손을 뻗었다.
“내, 내가 할게요.”
그녀가 보기에 이즈카엘은 너무 느렸다. 한시가 급한데. 하지만 이즈카엘은 헤레이스를 단호히 물린 뒤 네 번째 열쇠를 자물쇠에 밀어 넣으며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꼴로 무슨. 잠자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