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신도님!”
갑작스러운 안나의 행동에 율리나가 그녀를 말렸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신전 안에서 저런 말과 폭력이라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안나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율리나를 뿌리친 채 다시 리즈벨에게 달려들었다.
“우리 아가씨를 어찌했어! 도련님을 어찌했냐고!”
“안나 신도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사제님들이 말린다고 네가 무사할 거라 생각하지 마. 아가씨나 도련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너부터 죽여 없애 버릴 거야!”
안나의 악다구니에는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붉어진 뺨을 붙잡은 채 쓰러진 리즈벨이 안나의 독기 서린 눈에 하얗게 질려 갔다. 결국 그녀는 소매로 제 눈물을 닦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숨에는 문제없을 거라 했어요. 그리고 전, 전 그냥…… 그냥 두 사람이 혼자 있을 때만 알려 주면 된다고 했어요. 그것뿐이에요.”
리즈벨에게 헤레이스 일행은 민폐 덩어리이자 제 몫을 빼앗아 가는 도둑이었다. 그들이 온 뒤 자신에게 자주 떨어지던 간식도, 사제들의 관심도 줄었다. 고아로 이곳에서 아주 어릴 적부터 자랐던 그녀는 지금껏 제가 독점했던 것들을 떠돌이 일행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어, 어차피 그 여자 때문에 힘들어졌잖아요. 저도 알아요. 영주님께서 기부금도 끊겠다 하시고…… 그러니 그런 여자는 사라지는 게 신전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녀는 그런 제 마음을 숨기고 다른 이유를 가져다 댔다. 자신은 신전을 위해 그리한 것이다. 어차피 도움도 되지 않은 여자가 아닌가. 사라지면 오히려 좋지.
“이게!”
리즈벨의 말이 이어질수록 안나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율리나에게 붙잡힌 그녀가 리즈벨을 향해 발길질하자 디안나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안나에게도 엄격한 눈으로 경고를 한 뒤 리즈벨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정말 그것뿐이냐, 리즈벨. 나를 속일 수는 없단다.”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해 보이는 디안나의 시선에 리즈벨이 파들파들 떨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사실은…….
“사실 여, 여기 있는 거 너무 힘들고 흑…… 그런데 존이 함께할 수 있다고 하니까…… 그래서 그랬어요. 흐아앙.”
그녀는 윌리엄의 수하 중 하나인 존과 몰래 사귀고 있었다. 견습 사제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이었지만 존이 주는 관심을 이기기 어려웠다.
‘이번 일만 도와주면 도련님께서 돈을 잔뜩 주실 거야. 그러면 그걸로 함께 살자. 너 이따위 구질구질한 사제 생활 지겹다며.’
‘하, 하지만…….’
‘빨리 정해. 도와주고 나랑 결혼할 거야, 아니면 이대로 나랑 끝낼래. 결정은 네 몫이야.’
리즈벨은 검소한 신전 생활을 계속하고 싶지도 않았고, 존과 헤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아주 짧은 시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간다고 했느냐.”
차분함을 잃지 않은 채 디안나가 물었다. 호통을 들을 것을 각오한 리즈벨이 덤덤한 디안나의 물음에 손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마주친 디안나의 눈은 너무도 매서워 야단만큼이나 그녀에게 겁을 줬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리즈벨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몰, 몰라요. 아까도 말했지만 전 그저 존이 알려 달라는 것만 알려 줬어요. 그 이후는 알아서들 한다 해서…… 문제없을 거라고 그랬는데. 흐윽.”
그 말을 끝으로 방 안에는 리즈벨의 울음소리와 안나의 씩씩거림만이 남았다. 잠시 리즈벨을 바라보던 디안나가 다시 의자로 돌아가 앉더니 리즈벨을 향해 실망감을 숨기지 않았다.
“……리즈벨, 실망이구나.”
어딘가 힘 빠진 목소리에 리즈벨이 더 크게 울었다. 하지만 디안나는 리즈벨 쪽으로 더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율리나에게 손짓했다.
“율리나, 사제들과 함께 마을로 내려가. 가서 빨리 윌리엄 그자의 흔적을 찾아라.”
율리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려 하다 자신이 붙잡고 있는 안나 때문에 주춤거렸다. 안나는 여전히 리즈벨을 쥐어뜯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디안나가 한 번 더 한숨을 쉰 채 이번에는 안나를 바라봤다.
“안나 신도님께서도 함께 내려가시오. 가서 사제들과…….”
“사제님! 사제님!”
디안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문이 열리며 소년이 들이닥쳤다. 디안나가 헉헉거리며 가쁜 숨을 내쉬는 소년을 보다가 입을 열려 했지만 소년이 더 빨랐다.
“큰, 큰일 났어요. 기, 기사들이 마을로 쳐들어와서는…… 게, 게다가 이리로도 오고 있어요!”
“기사?”
한 사람을 제외한 방 안 모두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크게 숨을 들이쉰 소년이 답답한 듯 제 가슴을 치며 빠르게 설명했다.
“영주님의 기사는 아니에요. 처음 보는 기사들인데 막 번쩍거리는 갑옷도 입고 이만한 말도 타고 있고. 여튼 기사들이……. 빌리 할아범이 사제님께 빨리 알리라 해서 샛길로 뛰어왔어요.”
소년의 말에 홀로 창백해져 있던 안나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율리나가 달달 떨리기 시작한 안나의 몸을 느끼고는 그녀를 걱정스레 불렀다.
“……신도님?”
안나는 제 몸을 감싸고 올라오는 불길함의 정체를 부정하고 싶었지만 직감은 소리치고 있었다. 그가 왔다고.
‘아냐. 기사가 한둘도 아니고…….’
입술을 문 채 간신히 정신을 차린 안나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리 없었다. 어떻게 떠나왔는데. 그들은 북부를 넘어 동부까지 왔다. 게다가 이곳은 마차 하나도 잘 다니지 않는 시골 중 시골이었다. 그러나 안나의 바람은 바로 깨져 버렸으니…….
“누구십니까! 이곳은 여신을 모시는 곳입니다. 이리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디안나의 고함과 함께 북부의 얼음을 그대로 옮긴 듯한 시린 은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시에 공포로 각인된 금안이 안나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거대한 짐승 앞에 선 듯 안나가 휘청거리며 떨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아…….”
사내가 걸음을 옮기자 뒤이어 들어온 기사들이 안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몸으로 막아섰다. 곧이어 가엾게 떠는 안나의 앞에 선 사내가 살기를 감추지 않은 채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헤레이스, 내 아내는 어디 있나?”
6장. 새장
헤레이스는 무거운 눈꺼풀을 가까스로 들어 올렸다. 쪼개질 것 같은 머리, 흐리멍덩한 시야. 정신이 육체에서 분리된 채 붕 뜬 기분이었다.
‘여기는…….’
한정된 시야에 어떤 장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제가 누워 있는 곳이 어느 방 나무 바닥임을 인지했다. 제법 괜찮은 재질의 나무는 잘 관리됐는지 파인 곳이나 긁힌 자국 없이 반질반질했다. 그러나 바닥 특유의 냉기만은 지독하게 선연해 헤레이스는 몸을 떨었다.
“일어났어? 머리가 좀 아프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시끄러워지면 그 건방진 신전 계집들이 알아챌 수도 있었으니까.”
헤레이스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제 머리카락을 보며 눈을 두어 번 끔뻑일 때였다. 웬 구두 하나가 보이기가 무섭게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헤레이스가 급히 몸을 일으키며 아들을 불렀다.
“읍…….”
힘껏 소리쳤다고 생각했건만 입을 막고 있는 천 뒤로 나온 것은 억눌린 신음뿐이었다. 게다가 몸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어질한 가운데서도 헤레이스는 제 팔이 뒤로 묶여 있고, 양 발목 또한 한데 모여 결박돼 있음을 눈치챘다.
“흐읍!”
헤레이스가 저를 구속한 끈에서 벗어나려 손과 발을 거칠게 움직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결국 포기한 그녀가 그나마 자유로운 고개만을 들어 아들을 찾기 시작했다.
‘에르젠!’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에르젠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아들을 발견한 헤레이스의 눈은 안도에 잠기기는커녕 거의 한계까지 벌어졌다.
정신을 잃은 듯해 보이는 에르젠은 탁자 위 작은 짐승을 가두는 철제 우리에 갇혀 있었다. 얌전히 누워 있는 아들의 모습에 헤레이스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네 아이는 얌전히 자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그보다 나랑 대화 좀 하지?”
사라졌던 구둣발이 다시금 헤레이스의 시야를 막았다. 고개를 높게 빼 든 헤레이스가 구두의 주인을 보고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했다. 하지만 구두의 주인, 윌리엄은 그런 헤레이스의 눈빛이 기분 나쁜 듯 키득거리다가 에르젠을 가두고 있는 우리 가까이에 다가갔다.
“네 아들이 내 손에 있는데 그런 얼굴은 건방지지 않나?”
윌리엄이 화려한 단검을 뽑아 우리 창살을 아무렇게나 긁었다. 그러자 끼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힘없이 단검을 들고 있는 윌리엄의 불안한 모습에 헤레이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보기만 해도 좋아 보이지? 당연해. 너 같은 평민은 평생 구경도 못 할 돈으로 산 거니까.”
헤레이스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단검을 보자 윌리엄이 신난 목소리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비열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는 에르젠을 향한 헤레이스의 걱정 어린 시선에 저열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사냥을 갈 때면 이걸로 짐승 여럿의 숨통을 끊었지. 손잡이 보석에 피가 튀는 건 짜증 났지만, 뭐 그거야 아랫것들한테 닦으라 시키면 되니까.”
윌리엄은 몇 년 전부터 사냥을 즐겨했다. 귀족 청년이 사냥을 즐기는 것이 무에 문제겠느냐만은, 그가 취미로 사냥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다른 이들과 조금 달랐다. 그는 노예에게 목숨을 건 검투를 시키거나 노예를 짐승의 먹이로 던져 주는 것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자, 그나마 합법적인 사냥으로 자신의 가학 욕구를 채웠다.
“보통 가죽 벗기는 건 아랫것들에게 맡기는데 가끔은 직접 했어. 그걸로 장갑도 만들라 지시하기도 하고…… 이 구두도 내가 사냥한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거야.”
가학 욕구로 시작된 그의 사냥은 다른 귀족들의 사냥과 목적부터 달랐다. 윌리엄은 다른 이들을 이기겠다는 호승지심이나 큰 짐승을 잡아 제 실력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냥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사냥하는 게 재미있다는데 나는 사냥 자체에는 그다지 재미를 못 느끼겠더라고. 빠른 발을 가진 것들은 쫓느라 땀이 나고, 커다란 것들은 자칫 위험할 수 있잖아. 멍청하게 힘을 왜 빼는지 원…….”
윌리엄은 잡기 힘든 큰 짐승이나 맹수는 애초 노리지도 않았다. 그가 사냥한 짐승들은 토끼나 다람쥐, 암사슴 등 작고 약한 짐승들이었다. 당연했다. 그는 처음부터 이기기 위해 사냥을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추악한 그는 오롯이 짐승의 목숨을 거두는 순간이 좋아 사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