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에르젠은 율리나 사제님이 좋아?”
율리나를 배웅한 헤레이스가 에르젠을 식탁에 앉히며 물었다. 적당히 식은 스프에 율리나가 가져다준 빵으로 점심은 더할 나위 없이 풍족했다. 에르젠이 낑낑거리며 나무 숟가락으로 스프를 떠먹으려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마랑 안나 다음으로 좋아.”
“그래?”
에르젠의 답에 헤레이스가 조금 씁쓸한 낯으로 아이의 목에 천을 둘러 줬다. 율리나는 또래보다 한참 낯가리는 성정의 에르젠이 좋아하게 된, 몇 안 되는 어른이었다. 하지만 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에르젠은 더 이상 율리나를 볼 수 없으리라.
헤레이스가 미숙한 손짓으로 스프를 먹는 에르젠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럼 에르젠은 율리나 사제님하고 헤어지면 슬퍼할 거야?”
에르젠이 숟가락질을 멈추고 헤레이스를 빤히 쳐다봤다. 작은 머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내려가길 반복했다.
“응. 그렇지만 에르젠은 엄마만 있으면 다 괜찮아. 그러면 안 슬퍼.”
핑, 눈물이 돌았다. 헤레이스는 참지 못하고 에르젠을 꼭 안았다. 아이는 언제나처럼 어미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헤레이스가 에르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도. 엄마도 에르젠만 있으면 안 슬퍼.”
* * *
신전 내 응접실에서 고성이 오갔다. 디안나의 옆에 선 율리나는 경악 어린 눈으로 눈앞의 포드 백작을 바라봤다.
“신성한 장소에서 여인을 희롱하다 못해 몹쓸 짓을 하려 했습니다. 내쫓는 것이 당연하지요.”
“뭐요? 그럼 고작 평민 계집 때문에 내 아들의 기도를 막았다는 거요? 사제께서 제정신인가!”
백작의 말에 율리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세상에 이따위 말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율리나 사제님이라 했던가. 여신을 향한 사제님의 봉사에 항상 감사드리오.’
이전까지 율리나가 본 포드 백작은 보기 드문 신실한 신자였다.
그는 매년 자신의 성에 사제들을 초대해 밤을 새워 가며 여신께 용서를 빌었다. 백발이 성성한 그가 지난 1년간 자신이 저지른 죄를 조목조목 반성하며 눈 한번 뜨지 않은 채 기도를 올리는 모습은 사제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기부금이오. 나를 대신해 마을 고아들에게 신경 써 주시오.’
게다가 귀족임에도 그는 얼마나 초연한 인간이던가. 영지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이 적잖을 텐데도 그는 항상 검소하게 지냈으며, 영지민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그가 구빈원이나 영지 내 신전에 보내는 기부금은 무시하지 못할 만큼 컸으므로 신앙 깊은 영지민들은 자신들의 영주를 마음 깊숙이 아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몇 년 동안 본 율리나는 그가 진정으로 바른 사람이라 믿었다.
“윌리엄 그 아이가 기도할 때를 놓쳐 여신께 용서받지 못하면! 그렇게 되면 사제께서 책임지실 거요!”
하지만 그것도 옛말이었다. 핏대를 세우며 핏줄 일에 노기를 표하는 그에게 바른 모습이란 없었다. 백작은 윌리엄이 여신께 용서받지 못할까 그것만을 걱정할 뿐, 아들에게 큰일을 당할 뻔했던 헤레이스 모자에 대해서는 일말의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백작님, 계속 말씀드리지만 이 일의 모든 책임은 윌리엄 님께…….”
“계속 윌리엄을 탓하지 마시오! 평민 계집이 몸을 가벼이 여긴 거겠지. 말을 들어 보니 남편도 없이 떠돌던 여인이 아니오. 그런 여자들은 뻔하지 않나. 그것이 윌리엄 그 아이를 몸으로 유혹했겠지.”
“그 무슨 망발입니까!”
결국 디안나의 입에서도 고함이 터져 나왔다. 백작은 노사제가 노기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입술을 꽉 물고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다시 헤레이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아들을 감싸 안았다. 귀족 여인도 아닌 평민 계집 때문에 아들이 여신의 자비를 잃도록 둘 수는 없었다.
“흥! 그 여인이 괜히 과부인 것은 아니오. 그리 일찍 남편을 잃은 데는 여신의 분노가 있었던 거지. 그러니 억울한 내 아이를 쫒아낼 생각 말고 부정한 그 여인이나 쫒으시오. 아니면 내가 영주의 자격으로 영지 밖으로 내쫒겠소.”
협박도 불사 않는 백작의 모습에 참지 못한 율리나가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디안나는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아섰다. 노사제가 꼿꼿이 허리를 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신전은 세속의 권력이 닿지 않는 곳입니다. 그리하시겠다면 저는 주교께 영주님께서 핏줄의 죄를 감싸 안으려 여신의 종들을 내쫓았다 말씀을 올릴 수밖에요.”
“이……!”
주교라는 말에 백작이 대꾸 없이 인상을 구겼다. 스스로 신실한 신자라 믿는 그에게 그런 일은 크나큰 모욕이었다. 결국 백작은 한발 물러섰다.
“좋아. 그 여인에 대해서는 다시 말하지 않겠소. 하지만 이른 시일 내 윌리엄이 이곳에서 기도할 수 있게 준비하시오. 아니면 신전에 내는 기부금을 당장 끊어 버릴 것이오!”
쾅, 거세게 닫히는 문소리가 백작의 심기를 대변했다. 율리나는 백작이 사라지기 무섭게 휘청이는 디안나를 부축한 뒤 가까운 의자에 앉혔다.
“디안나 사제님…….”
“걱정 마라. 윌리엄 그자가 이 신전에 들어오게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다. 기도는 무슨.”
율리나 또한 디안나의 결정이 옳다 여겼다. 하지만 백작이 내는 기부금은 무시하기 힘든 액수였다.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러면 기부금이…….”
“기부금이 없을 때도 이 신전은 견뎌 왔다. 그보다 헤레이스 신도 일행이 걱정이구나. 영주께서 저리 나오는 이상 그 무도한 자는 더 날뛸 텐데.”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은 디안나가 긴 한숨을 내쉬며 밖을 봤다. 또 한바탕 눈이 내릴 모양인지 어두워진 구름이 온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 * *
간밤에는 눈이 잔뜩 내린다 싶더니 오늘은 오전부터 날이 화창했다. 밝은 태양에 안나도 볼일이 있다며 밖으로 나갔다. 헤레이스는 전부터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에르젠을 데리고 오랜만에 모자의 시간을 가질 참이었다.
“눈사람 이만하게 만들 거야!”
“그래, 에르젠. 나가서 눈사람 만들자.”
기뻐하는 에르젠을 보니 눈 오는 날 내내 잠을 줄여 일을 끝마친 보람이 있었다. 헤레이스는 날이 좋은 오늘만큼은 에르젠과 실컷 놀아 주마 생각하며 아들의 옷을 두껍게 입혔다.
“불편해, 엄마.”
“밖이 추워. 이렇게 입지 않으면 나갈 수가 없어요.”
두 겹 이상의 옷에 목도리까지 두른 에르젠이 불편하다 칭얼거리면서도 눈사람을 만들 생각에 방 안에서 폴짝폴짝 잘도 뛰었다. 헤레이스는 에르젠의 옷을 한 번 더 정돈해 준 뒤 그녀 자신도 추위를 막을 숄 하나를 걸치기 위해 서랍을 뒤졌다.
“엄마! 나 먼저 나가 있을래.”
“안 돼, 에르젠. 엄마랑 같이 가야지. 에르젠!”
헤레이스가 에르젠을 잡으려 했지만 에르젠은 잽싸게 방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낑낑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외부와 이어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헤레이스가 급히 숄을 찾아 두르고 그를 따라 나갔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쌓인 눈이 빛에 반사돼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에르젠, 엄마가 같이 가야 한다…… 어?”
헤레이스는 짐짓 화난 목소리를 꾸미며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밖에 있어야 할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헤레이스가 창백히 질린 얼굴로 에르젠을 불렀다.
“에르젠!”
단 몇 분이었다. 아니, 몇 분이 채 되지도 않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에르젠은 작은 아이였다. 분명 멀리 가지 못했을 텐데. 헤레이스가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사방을 살폈다. 그리고 곧 그녀의 눈에 작은 아이의 발자국이 들어왔다.
‘아…….’
종종걸음 친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은 발자국은 건물 모서리를 돌아 이어졌다. 한시름 놓은 헤레이스가 아이의 흔적을 따라 빠르게 모퉁이를 돌았다.
“에르젠!”
그러자 에르젠이 보였다. 작은 걸음으로 언제 저기까지 갔는지. 아이는 벽 끝 관목 바로 앞에 주저앉아 눈을 뭉치고 있었다. 목도리 위 말간 얼굴이 발갛게 언 것을 보자 헤레이스는 불안과 초조함도 잊은 채 아들에게 웃으며 다가갔다. 당장에라도 내려앉을 듯 떨렸던 심장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그새 안정을 되찾아 있었다.
“에르젠, 엄마가 같이 가야 한다 했잖아.”
헤레이스를 발견한 에르젠의 표정도 밝아졌다. 그러나 찰나의 시간, 에르젠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아이가 입을 벌린 채 겁먹은 표정으로 들고 있던 눈뭉치를 떨궜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헤레이스를 불렀다.
“엄, 엄마…….”
“에르젠, 왜 그러…… 흐읍!”
헤레이스는 아이를 보느라 자신이 지나쳐 온 관목이 흔들리는 것도, 커다란 그림자가 제 그림자를 가리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녀가 아이를 안아 주려 손을 뻗으려는 때, 커다란 몸이 그녀를 덮치고 입을 막았다.
“읍! 으읍! 읍!”
헤레이스가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꼼짝달싹 못 하는 새 웬 사내가 겁에 질린 에르젠에게 다가가 흰 천으로 아이의 입을 막는 것이 보였다. 에르젠이 가는 팔다리를 버둥거리다 곧 축 늘어졌다. 헤레이스의 눈이 커지며 그녀의 반항이 거세졌다.
“으으읍! 읍!”
그러나 헤레이스의 시야도 점차 가물가물해졌다. 불쾌하고 기이한 향이 천에서 코로 들이치며 정신을 갉아먹었다. 결국 헤레이스는 감기는 눈을 이겨 내지 못한 채 속으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에르젠…….’
* * *
“흐아아앙. 전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모른다고요!”
리즈벨은 울음을 터뜨리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녀를 불러온 디안나와 율리나의 얼굴은 엄격하기만 했다. 디안나가 꿇어앉아 있는 리즈벨을 매섭게 살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리즈벨, 네가 며칠 동안 별채에 서성이는 걸 본 사제가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 바른대로 말하렴. 헤레이스 신도와 에르젠이 사라진 것에 대해 아는 바가 있니?”
“사제님, 어떻게 저를 의심하세요. 그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도망친 거겠죠. 애초에 떠돌이였잖아요. 그러니까…….”
리즈벨은 거짓말에 소질이 없었다. 디안나의 눈을 피해 흔들리는 동공과 말아 쥔 손. 누가 보더라도 불안정한 모습에 지금껏 가만히 입술만 물고 있던 안나가 튀어나왔다.
철썩!
“아악!”
“말해! 말하지 않으면 네 입부터 찢어 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