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각 여신상이자 네 번째로 확인받은 성물이지요.”
사제는 자긍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며 여신상을 이즈카엘의 앞에 내보였다. 그의 눈이 나무 조각에 닿았다. 한 손에도 들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의 여신상은 사람만 한 크기의 대리석 조각 여신상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그래서 더 경건해 보였다.
나무 사이 스며든 여신의 미소는 자애로웠으며, 뒤에 달린 날개와 흐르듯 주름진 옷, 그리고 얼굴 가까이에 올린 손끝은 섬세하기 그지없었다. 이즈카엘과 에드가가 여신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사제의 어깨가 더욱 올라갔다.
그러나 사제가 으쓱거리며 다시 무언가 설명하려던 차 큰 손이 사제에게서 여신상을 낚아채 갔다.
“어? 각하?”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만…… 혹 모르는 일이니까, 에드가.”
“이, 이게 무슨 짓…… 억!”
에드가가 사제의 팔을 잡고 단번에 제압한다 싶더니 그의 목 뒤를 가볍게 쳤다.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숙련된 기사의 기술에 사제의 몸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에드가는 사제를 기도실 벽에 기대어 앉혀 놓고 다시 이즈카엘의 곁으로 돌아갔다.
이즈카엘은 사제가 쓰러지든 말든 여신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여신상의 자애로운 미소에서 누군가를 떠올리며 미간을 구기다가 작은 단검을 빼 들고 제 손가락을 찔렀다. 곧 사내의 손끝에서 붉은 핏방울이 솟더니 주륵 흘렀다.
이즈카엘이 손가락을 여신상의 이마에 가져다 대자 에드가의 표정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가 마른침을 삼키고는 여신상에 묻은 핏자국을 바라봤다. 적은 양의 피가 나무 재질의 여신상에 일부 스며들고 길게 선을 그리며 내려왔다.
“…….”
“…….”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제법 오래 기다렸건만 여신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즈카엘이 굳은 얼굴로 여신상을 뚫어져라 보다 짜증스레 손을 떨궜다.
“……그 검과 비슷한 건 도통 찾을 수가 없군.”
이즈카엘은 에드가에게 여신상을 넘기며 말했다.
그가 찾고 있는 물건은 성물의 일종이었지만 보통의 성물과 어딘가 달랐다. 쥐기만 해도 얼음을 만진 듯 시린 느낌이 들었으며, 그의 피를 뿌렸을 때 연기를 내며 반응하는 물건. 이즈카엘은 그런 종류의 성물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오늘 방문도 허탕인 듯싶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에드가가 깨끗한 천으로 여신상의 핏자국을 닦으며 물었다. 이즈카엘이 무언가 생각하는 듯 인상을 찌푸리다 말했다.
“동부로 넘어간다.”
“지금처럼 기사단을 움직였다가는 말이 나올 겁니다. 르페즈 공작도 가만있지 않겠지요. 아시겠지만 그는 각하를 제법 경계하는 편입니다.”
귀족들은 이즈카엘의 행보에 지나치게 민감히 반응했다. 그러나 그런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황제의 명을 받은 그가 반역을 소탕하며 흘린 피가 얼마였던가. 사람들은 도살자라 불렀던 그를 잊지 못했다.
게다가 동부는 지난 반역에 세력을 가장 많이 잃은 지역이기도 했다. 반역의 주모자였던 페가토 후작의 외가가 동부에 있었으며, 그의 세력 또한 동부가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 반역으로 얼마나 많은 동부의 지역 가문이 사라졌는지. 반역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 또한 주변 지인이나 친인척 몇 정도는 형장의 이슬로 잃었기에 그들은 언제고 자신들이 그 일에 연관될 수 있다며 벌벌 떨고는 했다.
“상관없다. 르페즈 공작에게는 내가 직접 서신을 보내지.”
서신을 보낸다 한들 동부에서 이즈카엘과 그의 기사들을 기쁘게 맞이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즈카엘에게 있어 그런 동부의 민감한 감정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직 한 가지만이 중요했다. 그의 아내. 도망친 자신의 반려. 헤레이스가 동부에 있다면, 아니 그녀가 어디에 있든 그는 아내를 쫓아 제 곁으로 잡아 올 생각이었다.
깨어나려는 사제의 신음과 함께 이즈카엘이 마지막으로 여신상에 눈길을 줬다. 에드가가 몸을 돌려 나가려는 이즈카엘을 눈치채고는 여신상을 본래의 자리에 놓으려 손을 뻗었다.
“……잠깐.”
그러나 뒤돌아 바로 신전에서 벗어날 줄 알았던 이즈카엘이 무언가 발견한 듯 급히 입을 열었다. 여신상을 막 상자에 넣은 에드가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십……!”
에드가가 말을 끝맺기도 전, 이즈카엘이 단번에 제단 앞으로 왔다. 그가 제단에 두 손을 짚더니 떨리는 눈을 했다.
심상찮은 주군의 반응에 에드가도 제단 위를 보는 이즈카엘의 시선을 좇았다. 제단 위에는 신전의 상징인 흰 백합 다발과, 에드가가 나무 상자에 넣은 여신상뿐이었다.
이즈카엘의 손이 여신상을 향했다. 커진 눈과 파들파들 떨리는 손. 에드가가 불안한 눈으로 아까 못다 한 말을 했다.
“각하, 왜 그러십니까!”
이즈카엘은 답하지 않았다. 그가 여신상에 손을 댄다 싶더니 그 아래로 손가락을 넣었다. 곧 누이어져 있던 여신상이 나무 상자 안에서 덜그럭거리며 아무렇게나 구름과 동시에, 이즈카엘의 손에 흰 천이 딸려 올라왔다.
“아…….”
사내의 광기 어린 눈이 고정된 곳은 천 중앙에 자리한 자수였다. 사내가 백합 무늬와 함께 새겨진 신전 문양을 천천히 쓰다듬다 천을 꽉 틀어쥐고는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헤레이스.”
* * *
“아…… 이런.”
미겔은 카우치에 앉아 쿠키를 먹다 한숨을 푹 쉬었다. 그 소리에 화장대 앞에 앉아 새로 들어온 목걸이를 살피던 샬럿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니, 미겔.”
“공작 부인께서 돌아오실 수도 있겠어요.”
“……뭐?”
샬럿이 목걸이를 팽개치고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카우치로 달려가 아들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 떨리는 동공이 그녀가 얼마나 기겁했는지를 잘 보여 줬다.
“당분간은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제가 지켜 드릴게요.”
미겔이 제 어깨에 올라온 어미의 손을 툭 쳐 내며 경쾌하게 말했다. 하지만 샬럿은 충격받은 듯 이마를 짚으며 신음을 흘렸다.
“아아…….”
“어머니가 없으면 제가 배고픈걸요. 그러니 당분간은 여기 계실 수 있을 거예요.”
샬럿은 쿠키 부스러기를 털며 태연히 말하는 아들을 보다 눈초릴 세웠다. 발작을 일으키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갑작스레 튀어나왔다.
“닥쳐, 이 괴물아!”
“이런. 아들한테 닥치라니요.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돼요. 그건 어머니 같은 밑바닥 출신들이나 쓰는 천박한 말이잖아요.”
“나를 언제까지 가지고 놀 생각이야! 이즈카엘도 그렇고 너…… 너도!”
어미의 절규에 미겔이 픽 웃더니 자신의 작은 손으로 제게 손가락질하고 있는 어미의 손가락을 붙잡고 세게 당겼다. 그러자 서 있던 샬럿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그녀의 무릎이 한순간에 홱 꺾였다. 미겔이 제 아래 꿇어앉은 어미를 내려다보다 그녀의 귀에 속살거렸다.
“그럼 지금이라도 떠나시든가요.”
“뭐, 뭐야?”
“말리지 않아요. 가실 거면 가세요. 약속대로 아버지께서 황금 정도야 잔뜩 챙겨 주실 거예요.”
한층 낮아진 아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밝고 그 나이 특유의 천진함으로 반짝였다. 하지만 샬럿은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듯 새파란 얼굴을 하다 발발 떨며 아들의 손을 뿌리쳤다.
“싫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싼 그녀가 거칠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그건 싫어. 그것만으로 부족해. 왜 내가 내 것을 빼앗겨야 해?
“그럼 어쩌라는 건지 원. 어머니는 변덕이 너무 지나치세요. 이것도 그 천한 출신 때문인가?”
“아니야! 나는 고귀한 공작 부인이야! 네 어미라고!”
“…….”
“난 후계인 너를 낳았어. 그러니 황금뿐 아니라 이 성의 모든 걸 가져야 해!”
억울함은 몰려오는데 이상하리만치 정신은 편안했다. 그래. 내 것은 내가 챙겨야지.
덜덜 떨리는 몸이 잦아들며 샬럿이 아들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미겔이 조금 전과 같은 종류의 쿠키를 집어 들었다가 놓으며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하…… 똑같은 것만 먹으려니 영 지겨운데. 슬슬 바꿀 때가 됐나?”
* * *
겨울이 닥쳤다. 낙엽이 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눈 내리는 날들이 잦아졌다.
“이것 좀 드셔 보세요. 마을 신도님께서 가져오셨는데 속에 든 잼이 달콤한 것이 제법 괜찮아요.”
“항상 챙겨 주셔서 감사드려요.”
“뭘요. 많이 남아 그런 것을요. 에르젠, 너도 많이 먹으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헤레이스와 에르젠, 안나의 신전 생활은 평탄했다. 율리나는 대놓고 이들을 챙겨 줬으며, 신전을 대표하는 디안나도 종종 찾아와 장작이나 먹을 것 등을 내주며 여신의 가호를 빌어 줬다. 다른 사제들 또한 어린 에르젠을 귀여워하며 이것저것 군것질거리를 쥐여 주었기에 일행은 어느 때보다 따뜻한 겨울을 나고 있었다.
물론 신전의 모든 이들이 헤레이스 일행에게 친절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를 가나 이유 모를 시기는 있었다. 견습 사제 리즈벨이 대표적인 예였다. 그녀는 헤레이스 일행을 항상 탐탁찮은 눈으로 봤다.
“우리 먹을 것도 부족한데 군식구한테 이 무슨…… 염치도 없지.”
“리즈벨!”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리즈벨은 율리나의 곁에 서 빵 바구니를 보다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율리나가 그녀에게 재빨리 핀잔을 줬지만 이미 흘러나온 말에 방긋거리며 웃고 있던 에르젠이 헤레이스의 뒤로 숨었다.
“죄송해요. 저희가 괜히…….”
“아닙니다, 헤레이스 신도님. 리즈벨 따라오렴.”
“싫어요! 흥! 재수 없어.”
“저, 저! 죄송합니다. 어릴 적부터 이곳에서 오냐오냐 키웠더니 예의가 없어요.”
율리나가 성큼성큼 사라지는 리즈벨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 급히 사죄했다. 먼저 챙겨 주고 살펴 주는 이는 율리나인데 그녀에게 사죄를 받다니. 괜스레 미안해진 헤레이스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사제님. 저희는 괜찮아요.”
“한창 예민할 시기라 그런 모양입니다. 나중에 따끔하게 혼낼 테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물론이죠.”
“그럼 가 보겠습니다. 날씨가 추우니 장작 너무 아끼지 마시고……. 에르젠도 밖에서 적당히 놀렴. 바람이 거세게 불어 네가 날아갈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겁먹은 채 있던 에르젠이 율리나의 다정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헤레이스에게 안아 달라는 듯 두 팔을 뻗었다. 그리고 어미의 품에 안기자마자 율리나의 뺨에 작은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감사합니다, 율리나 사제님.”
쪽 하는 소리와 함께 감사 인사를 전한 에르젠은 부끄러운 듯 어미의 품으로 얼굴을 숨겼다. 아이의 귀여운 애교에 율리나와 헤레이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기분 좋게 작별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