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을 꺾는 악마여-39화 (39/108)

39화.

산 중턱에 있는 신전은 기사단이 타고 온 말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에드가는 이즈카엘의 바로 뒤에 서 익숙지 않은 건물 양식을 구경했다. 직선으로 뻗어 높고 뾰족한 데다 폐쇄적이기까지 한 북부의 여느 신전들과 달리, 이곳 신전은 곡선으로 이루어져 부드러운 데다 여러 기둥으로 공간이 시원스레 트여 있었다.

‘……확실히 동부에 가깝군.’

신전은 엄연히 북부의 관할이었다. 하지만 건물뿐 아니라 사람들의 말씨를 포함한 이곳의 문화는 북부보다 동부의 것에 훨씬 가까웠다. 심지어 날씨조차 확연히 달라 호수가 완전히 얼어 버린 북부의 세르펜스 성에 비해 이곳은 아직 눈도 내리지 않았다.

‘제법 멀리 나오긴 했어.’

본래라면 세르펜스 성에서 멀리 떨어진 이 지역까지 올 일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였다. 북쪽이 야만인들과 경계를 맞대고 사는 것과 달리 이 지역은 평화롭고 풍족한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들은 영지 사찰이 아닌 다른 이유로 동부와의 경계에 가까운 이곳까지 먼 길을 달려왔다.

‘동부와 가까운 마을에서 2년 전 소란이 있었답니다. 워낙 외진 곳인데다 마차도 가지 않는 곳이라 신경 쓰지 않았는데 혹여나 싶어 그 내용을 들어 보니…….’

‘…….’

‘여인네 둘이 아기 하나를 데려왔다는데 개중 하나가 무척 아름다워 이 지역 유지 둘이 서로 차지하려 싸운 모양입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여인의 모습이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지녔고…… 무엇보다 부인의 초상화를 보여 줬더니 같은 이라 고개를 끄덕이더랍니다.’

은밀히 풀어놓은 이가 알려 온 내용은 꽤 신빙성이 있었다. 하여 이즈카엘은 단번에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여인을 두고 싸웠다는 이들을 한데 모아 결박해 놓고 목에 검을 들이댔다. 자다가 봉변을 당한 이들은 이 무도한 자가 누구냐며 소리를 치다가 이즈카엘의 정체를 알고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공, 공작님께서 왜…….’

그들은 이즈카엘의 살기 어린 추궁에 거의 잊어 가고 있던 기억을 털어놨다. 하지만 이즈카엘이 알아낼 수 있는 거라고는 헤레이스가 이들을 피해 한밤중에 도망을 쳤으며 동쪽으로 향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녀에게 손을 댔나?’

‘예에? 어? 가, 각하! 어…… 으아아악!’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와 관련된 것을 모조리 조사한 뒤 헤레이스에게 손대려 한 이들의 목을 서슴없이 베어 버렸다. 단번에 목이 잘리고 피가 튀는 모습이 끔찍할 법도 했지만 기사들은 익숙한 듯 뒷정리를 할 뿐이었다.

‘언제쯤이면 그만두실지. 게다가 더 나아갔다가는…….’

에드가는 이즈카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물었다. 달아나 버린 공작 부인을 찾는 것이 벌써 3년 이상 지났다.

은밀했던 추적은 더는 비밀이 아니었다. 아직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고위 귀족들을 비롯해 정보에 빠른 이들은 이즈카엘이 헤레이스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과연 동부에서 사전 협의 없이 찾아온 북부 기사단의 출입을 허가할까.’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헤레이스를 찾는 여정이 북부 땅에 한정된다면 별문제 없었다. 하지만 찾아낸 실마리는 이제 북부의 영역을 넘어 동부를 가리키고 있었다. 동부로 은밀히 사람을 풀어놓은 지는 이미 오래. 주군은 그곳이 어디든 공작 부인의 드레스 끝자락이라도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갈 게 분명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공작 각하.”

에드가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상하며 한숨을 쉴 때였다. 소식을 들은 모양인지 사제 여럿이 헉헉거리며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에드가는 사제들의 가장 앞에서 머리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굽히는 고위 사제을 바라보다 그가 입고 있는 의복에 눈을 두었다. 흰색 바탕에 금실과 은실이 어우러진 사제복은 보는 것만으로 위엄이 넘쳤다.

반면 주군인 이즈카엘의 복장은 단출했다. 말을 타기 편안한 복장 위에 가벼운 무장이 전부인 그는 허리춤에 검과 망토를 고정한 휘장이 아니라면 일개 기사라 해도 믿을 만한 차림새였다. 하지만 비굴한 표정으로 굽신거리는 사제와 달리 서늘한 얼굴로 서 있는 그는 눈빛만으로도 상대에게 위압감을 선사했다.

“서신은 받았겠지. 그건 어디 있나.”

무감한 눈으로 사제들을 훑어본 이즈카엘이 입을 열었다. 한 치의 거짓이라도 말했다간 당장 목을 베일 기세인지라 사제들이 왜가리에게 쪼이는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저를 따, 따라오십시오.”

한참 만에 고위 사제가 답했다. 미간을 구긴 채 사제를 내려다본 이즈카엘이 에드가에게 눈짓했다. 에드가가 각 조장에게 휴식을 취하라 이르고는 재빨리 이즈카엘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뒤에서 의문 가득한 시선이 박혀 들었다.

북부 각지 신전에 들른 횟수만 벌써 스물두 번. 에드가는 수하들의 의문을 이해했지만 말을 아꼈다. 주군인 이즈카엘이 침묵했을뿐더러, 그가 짐작하고 있는 바는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것이었기에.

에드가가 이즈카엘의 등을 보다 회랑의 벽에 섬세히 음각되어 있는 여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애로운 여신의 곁에는 날개를 활짝 편 천사들이 무장을 한 채 지옥의 악마를 향해 창을 들이밀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들어오시지요.”

긴 회랑을 지나 사제가 안내한 곳은 육중한 문 앞이었다. 오크 나무로 만들어진 문 또한 회랑의 벽처럼 여신과 천사, 그리고 악마가 새겨져 있었다.

철컥.

사제가 허리춤에 있던 커다란 열쇠로 자물쇠를 열더니 힘겹게 문을 밀었다. 곧 오래된 나무 냄새와 함께 고아한 기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하십시오.”

경고를 하며 문턱을 넘은 사제의 걸음이 한층 더 조심스러워졌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기도문을 읊으며 기도실을 걷다가 제단 앞에서 멈췄다. 제단 위에는 하얀 백합과 함께 목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곁눈질로 이즈카엘을 살핀 사제가 상자 문을 열자 나무에 현신한 여신이 나타났다. 사제가 성인 팔뚝만 한 여신상을 소중히 들어 올리며 경건히 말했다.

“이것이 생바라탐의 여신상입니다.”

* * *

헤레이스가 사라진 지 6개월이 지나가던 무렵이었다. 사라진 아내를 찾아 미친 듯이 말을 몰던 이즈카엘은 뭐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성으로 돌아갔다.

몇 개월 만의 방문이었지만 몇 달 전 정부가 공작 부인의 방을 어지럽혔던 일로 한바탕 소란이 일었기에 성의 위계는 잘 잡혀 있었다.

“……내가 올 것을 어찌 알고 이렇게 준비했지?”

“예? 그것이……어? 그러고 보니 어떻게…….”

하지만 이즈카엘은 예의 바르게 마중 나와 있는 노집사와 사용인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다 단번에 층계를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날 에드가는 열린 문틈 사이로 주군이 그 자신의 핏줄에게 미친 듯이 화내는 것을 목격했다.

“어디 있나! 헤레이스를 어디로 빼돌렸지?”

아이가 앉아 있는 침대를 내려다보며 핏대를 세우는 주군의 모습은 생경했다. 그러나 주군보다 더 이상한 것이 있었으니. 에드가는 아비의 고함에도 재미있다는 듯 꺄르르 웃으며 눈을 접어 보이는 미겔과, 인형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 샬럿을 보며 기괴한 기시감을 느꼈다.

“흔적을 쫒아도 어느 순간 끊겨 있다. 실마리를 찾아도 어느새 안개처럼 사라졌어. 그러니 똑바로 말해! 모든 게 네 짓이 아닌가?”

평소 같았으면 누군가가 훔쳐보고 있음을 못 알아챌 이즈카엘이 아니었다. 그러나 반쯤 이성을 잃은 그는 문이 열려 있든 누가 안을 보고 있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에드가 또한 여느 때라면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터였다. 감히 주군의 사생활을 몰래 보다니, 기사로서도 신하로서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용납되지 않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는 방 안 광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날부터 그를 괴롭혔던 불안감의 정체를 이제는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화살에 맞은 채 엉망진창이 되어 온 주군이 사경을 헤매다 하룻밤 새 멀쩡해졌던 그때.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이라는 시간이 가기도 전 급속도로 배가 부풀더니 만삭이 된 여인. 에드가의 눈이 절로 초점 없는 샬럿에게 향했다.

‘……아니야. 내 우스운 망상일 뿐이다.’

에드가는 계속해서 제 생각을 부정했지만 그의 머릿속을 차지했던 초조함은 점차 커졌다. 그리고 순간 침대에 앉아 있던 아이가 문틈 사이의 에드가와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이즈카엘과 꼭 똑같은 샛노란 눈이, 황금을 부어다 박은 것 같은 그 묘묘한 빛이 정확히 에드가를 향했다. 아이가 제 아비에게 그러했듯 에드가에게도 곱게 눈을 접어 보였다.

‘저것은…….’

순수해 보이는 아이의 환한 웃음이 천진했다. 하지만 그 표정에서 공포밖에 느낄 수 없었던 에드가는 감히 생각만 하고 있던 바를 입 밖으로 꺼냈다.

“……인간이 아니질 않나.”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작은 소리였건만 이즈카엘은 에드가를 발견하고는 치부를 들킨 듯 인상을 구기더니 방문을 소리 나게 닫아 버렸다. 그리고 그날 이후 이즈카엘은 달라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헤레이스를 찾아 미친 듯이 내내 밖으로 돌아다녔던 전과 달리 이즈카엘은 한층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전국 각지로 전의 세 배가 넘는 사람을 풀고, 그들이 가져온 정보를 바탕으로 추격을 보다 빠르고 정확히 했다. 또한 미뤄 뒀던 일을 하며 짧게나마 토벌을 가기도 했다. 그리고 그쯤 이즈카엘은 성물이 있는 신전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잠잠해졌기에 세르펜스 성 사람들은 이즈카엘이 돌아왔다고, 이제 곧 그가 아내 또한 잊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임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성 속에 감춰진 것은 전보다 더한 집요함이었다. 몇 달간 타올랐던 분노가 가라앉은 자리에 남은 것은 차갑게 버려진 울분이었다. 이즈카엘에게서 자비가 아예 사라졌다.

그리고 에드가는 토벌했던 한 야만인 마을에서 장님 주술사의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그의 주군께서 왜 신전 성물들을 찾는지.

‘더러운 제국의 개야, 우리한테 화풀이해도 소용없단다. 네가 찾는 건 잘 숨어 버렸거든.’

‘…….’

‘그따위 것과 함께하니 네 파랑새가 도망가지. 그때도 그것을 달고 있더니 이제 완전히 그것에 먹혀 버렸구나. 그것과 하나라 봐도 이상하지 않아.’

‘…….’

‘그것이 붙어 있는 한 네게 기쁨 따위 없을 것이다. 네 파랑새는 다시 네게…… 커헉!’

‘앞도 보지 못하는 것이 말이 많군.’

‘……속, 속삭여 주지 않아.’

죽은 생선처럼 탁해진 눈은 무엇도 볼 수 없었건만 주술사는 자신의 눈앞에 이즈카엘이 생생히 보이는 것처럼 죽어 가면서도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비웃는 주술사를 내려다보며 이즈카엘은 흉흉한 낯을 했다. 그리고 그는 숨통이 끊어져 식어 가는 시체에게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닥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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