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그, 그럼 올겨울만 신세를 지겠습니다, 사제님.’
‘신세라 생각할 것도 없소. 그대는 신전의 일을 맡은 신도님이 아니오? 다행히 신전에 남는 별채가 있으니 올겨울 그곳에서 지내도록 하세요.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집 없는 여신도들께서 지내던 곳이니 못 지낼 정도는 아닐 거요.’
헤레이스가 신전에서 지내겠다고 말하자 디안나는 율리나를 시켜 안나를 데려오도록 했다. 덕분에 헤레이스와 에르젠을 기다리던 안나는 놀랄 겨를도 없이 짐을 챙겨야 했다.
율리나는 안나와 함께 신전으로 향하며 헤레이스와 에르젠이 당한 일을 전해 줬다. 언제까지 저리 고생하셔야 하는지. 평안했던 헤레이스의 처녀 적 삶을 기억하는 안나에게는 현재 상전의 삶이 너무도 기구하게 다가왔다.
초췌한 얼굴로 방 안에 있을 헤레이스를 생각하며 안나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율리나 또한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디안나 사제님께서 계시겠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설마 신전에 있는데요. 그리고 이곳 영주님께서는 제법 신실하다 들었는데…….”
“신실하신 백작님을 생각한다면야 그자가 감히 신전에 쳐들어와 난동을 부리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혹시라는 게 있으니까요. 알아보니 윌리엄 님은, 아니 그치는 제법 유명하더군요. 수도에서 사고를 치고도 멀쩡히 영지로 돌아왔다기에 그리 큰 사고는 아닌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런 무도한 짓을…… 여신이시여.”
율리나는 조금 전 들은 윌리엄의 죄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여신께서 살피시는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하다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할 죄였다.
“헤레이스 신도님의 작고하신 부군께서 이 상황을 알면 어찌 생각할지. 살아 계셨다면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텐데요.”
작고한 부군이라는 말에 안나가 아주 잠깐 얼굴을 굳혔다. 이곳 사람들은 헤레이스가 기사였던 남편을 전쟁 통에 잃고 홀로 아들을 키운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안나는 시린 은발에 서늘한 금안을 가진 수려한 사내를 떠올렸다.
‘만일 공작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어떻게 하실까.’
혀가 잘린 채 쫓겨날 뻔했던 그날 후로 안나에게 이즈카엘은 이겨 낼 수 없는 공포와도 같았다. 그랬기에 그녀는 성을 떠나온 뒤 전 주인에 대해 생각도, 말도 하지 않았다.
헤레이스 또한 자신이 도망쳐 온 남편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에 3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그들은 간혹 북부만을 입에 담았을 뿐, 그곳의 주인인 이즈카엘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그렇죠. 주인님께서는 용맹한 기사였으니까. 아마 가만두지 않았을 거예요.”
떨떠름한 안나의 말투를 눈치채지 못한 율리나가 안타까운 얼굴을 하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리고는 안나의 손을 꼭 잡았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안나가 멀뚱멀뚱하게 율리나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면 안나 신도님도 대단하세요. 사실 충정만으로 헤레이스 신도님을 따르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당연한 일이에요. 전 어릴 적부터 부인을 모셨는걸요. 게다가 부인께서는 제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기도 하시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헤레이스 신도님께서는 고귀한 출신이라 하셨죠. 그럼 가문으로 돌아가는 건 어떤가요? 부군을 잃으셨다면 친정으로 돌아가셔도 좋을 텐데요. 그편이 안전하기도 하고…….”
힘든 지금 왜 이리 날카로운 질문이 많이 들어오는지. 안나는 혹여나 실수라도 할까 봐 정신을 바짝 차린 채 억지로 태연한 표정을 지어 내며 답했다.
“귀족이라 해도 이름만 이어지던 가문인걸요. 게다가 부인의 양친께서는 모두 일찍 돌아가셔서……. 또 부인께는 형제도 없고요.”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율리나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 창밖을 보고는 허둥거리며 일어섰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이리 지난 줄도 몰랐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 일어서려는 안나를 손짓으로 저지한 채 의자에 걸쳐 놓았던 겉옷을 집어 들었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늘 밤 기도 당번이 저라서.”
“얼른 가 보세요. 여기는 걱정 마시고.”
“밤이 깊었으니 푹 쉬도록 하세요. 헤레이스 신도님도 잘 보살펴 드리고요. 내일 일찍 찾아와 짐 푸는 걸 도와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사제님.”
안나는 웃는 얼굴로 율리나를 배웅하다가 그녀가 밖으로 사라지기 무섭게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그리고 굳건히 닫혀 있는 방문을 똑똑 두드리고는 조용히 들어갔다.
좁고 어두운 방 안 침대에는 에르젠이 누워 있었다. 쌕쌕 숨을 내쉬며 자는 모습에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이 옆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는 상전의 얼굴은 매우 파리하여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안나가 촛불 아래 창백한 헤레이스의 손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가씨.”
“…….”
“율리나 사제님께서 막 가셨어요.”
헤레이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는 헤레이스에게 다가가 괜찮으냐고 물으려다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는 그만뒀다.
“아가씨도 이만 주무세요. 내일은 청소도 하고 짐도 정리해야 하니까 늦게 일어나시면 안 돼요.”
대신 안나는 일부러 활기차게 내일 일정을 말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여전히 고개만 끄덕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안나는 촛불에 비친 상전의 음울한 표정을 바라보다 조용히 그 곁에 앉았다.
“……안나, 내가 한 선택이 과연 옳았을까?”
초가 빠르게 녹아내리며 규칙적으로 일렁이는 그림자를 그렸다. 헤레이스는 초가 반쯤 사라지고서야 입을 열었다. 에르젠에게서 손을 뗀 그녀는 아들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얼굴만큼이나 창백한 그녀의 손은 떨리다 못해 거의 경련하고 있었다.
“내가 견디기 힘들다고 에르젠에게 이런 일을 겪게 한 건 아닐까.”
오늘 일을 겪으며 헤레이스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지 새삼 깨달았다. 지난 몇 년 여러 고비를 넘기며 나름대로 강해졌다 생각했건만 그건 자신만의 착각이었다. 아이가 그렇게 함부로 대해지는데 어미라는 자신은 아무것도 못 했다. 그저 울부짖으며 빌기만 할 뿐. 사내의 흙 묻은 신발이 아이를 툭툭 칠 때도 그녀는 무력했다.
‘난 여전히…….’
잘 헤쳐 나왔다 생각했던 것이 실은 모두 운이었다. 오늘만 해도 어떠했나. 사제들이 구해 주지 않았으면 혼절한 아이를 품어 주기는커녕 사내에게 끌려가 어떤 짓을 당했을지 몰랐다.
“내가 견뎠으면…… 조금 더 좋은 방법을 찾았으면 에르젠은 지금쯤 공작저에서 풍족하고 안전하게 잘 지냈을지도 몰라. 이렇게 함부로 다루어질 일도 없었겠지.”
한 줌이나마 모였던 자신감이 허상처럼 사라지자 막막했다. 앞으로 아이를 어떻게 지켜 나갈 것이며 스스로는 어떻게 보호해야 하나. 헤레이스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헤매는 기분에 절망감을 느꼈다.
“이, 이즈카엘…….”
지난 세월 애써 입에 담지 않았던 이름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왈칵 울음이 터졌다. 말하고 나니 사내의 얼굴이 선명히 눈앞에 그려졌다.
‘사랑해, 헤레이스.’
그동안 충분히 지웠다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사실은 그의 품이 그리울 때가 있었다. 오늘처럼 견디기 힘들 때면 과거에 든든하고 따스했던 그가 떠올랐다. 고작 3년 남짓한 세월이었는데도 그날들이 뚜렷하게 떠올라 잠을 설친 날도 제법 됐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기억하면 무엇 할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나날인데.
서글픈 낯을 한 채 헤레이스가 다시 에르젠의 뺨을 쓰다듬었다. 느릿한 손길에는 애정이 듬뿍 묻어나 있었지만 손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은 분명한 슬픔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안나의 눈은 젖어 갔다.
“그 사람을 떠나겠다 결심했을 때 한편으로는 에르젠을 위하는 일이라 생각했어. 내가 견디기 힘든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런 상황이 아이에게 좋지 않겠다, 그렇게 핑계를 댔어. 하지만 그건…….”
잘게 떨리는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죄책감이 심겨 있었다. 헤레이스의 손이 에르젠의 뺨에서 떨어져 둥근 이마로 향하다 힘없이 거둬졌다.
“……말 그대로 핑계일 뿐이야. 그저 내가 힘들어 도망친 주제에.”
“아가씨…….”
보다 못한 안나가 헤레이스를 불렀다. 하지만 자괴감에 빠진 헤레이스는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적어도 내 이기심에 에르젠의 이름을 올려서는 안 됐어.”
헤레이스는 유약한 자신이 싫었다. 아이 하나 건사하지 못해 이날까지 함께해 준 안나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녀가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 조용히 울음을 삼켰다. 아이를 깨울까 봐 억누른 소리가 목 너머로 넘어가며 온몸에 떨림을 가져왔다. 안나는 헤레이스의 등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마음껏 우세요, 아가씨.”
지금껏 얼마나 힘드셨을까. 세르펜스 성을 떠난 이후 헤레이스는 힘든 내색을 않으려 했지만 안나는 그녀가 힘겨워하고 있음을 진즉 알았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시간이 더 많은 아가씨였다. 디본의 멸문 당시 고초를 겪긴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성을 떠나기 전 지독한 일이 있었으나 공작 부인이라는 지위가 있었으므로 끼니나 잠자리를 걱정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성을 나온 뒤로 헤레이스는 모든 것을 걱정해야 했다. 불편한 잠자리를 감수해야 했고, 끼니를 위해 여린 손이 부르트도록 자수 일을 해야 했다. 게다가 그뿐인가. 약자로 떨어지자 칭송받았던 외모는 독이 돼 헤레이스를 괴롭히고 있었다.
분명 성을 나서기 전에는 어느 정도 살 만할 줄 알았는데……. 세상은 상상 이상으로 녹록지 않았다. 특히 여인과 아이에게는 더. 안나는 자신이 세상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지난 3년을 통해 알았다.
“그래야 내일을, 그리고 그다음 날을 견딜 수 있어요. 그러니 마음껏 우세요.”
안나의 다정한 배려에 헤레이스의 등이 크게 올라갔다 내려가길 반복했다. 아이에게 들릴까 여전히 소리를 죽이긴 했으나 조금 전과 달리 억눌린 울음은 아니었다.
“고마워, 안나.”
눈물은 한참 만에야 잦아들었다. 헤레이스가 붉게 짓무른 눈가를 한 채 안나를 돌아봤다.
“네게는 항상 미안할 행동만 하는 거 같아.”
“아니에요.”
그새 안나의 얼굴도 젖어 있었다. 헤레이스는 손을 들어 엄지로 안나의 눈물을 닦아 줬다. 울고 나니 마음이 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래. 내게는 에르젠도 있지만 안나도 있잖아. 걱정시키면 안 돼.’
헤레이스가 눈을 접으며 예쁘게 웃어 보이려 애썼다. 한층 단단해진 목소리가 안나에게 닿았다.
“오늘만 봐주렴. 내일부터는 이러지 않을 거야. 네 말대로 청소도 해야 하고 짐도 풀어야 하니까. 그리고 일도 마저 마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