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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37화 (37/108)

37화.

“내 아이에게 손대지 말아요!”

“엄마! 엄마!”

거칠고 배려 없는 사내들의 손길에 모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헤레이스는 어떻게든 에르젠을 빼앗기지 않으려 발버둥 쳤지만 성인 남성 여럿을 이길 순 없었다. 결국 헤레이스는 사내 둘에게, 에르젠은 사내 한 명에게 제압당했다.

윌리엄이 수하에게 붙들려 무릎을 꿇고 있는 헤레이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윌리엄이 다가오든 말든 아들을 부르며 거세게 바르작거렸다. 에르젠 또한 엉엉 울며 어미를 불렀다.

“이 시골구석에서 어찌 지내나 걱정했는데 무료하지는 않겠어.”

윌리엄은 재차 헤레이스의 턱을 쥐고서 자신을 보도록 했다. 강제로 꺾인 목이 아파 헤레이스가 벗어나려 애썼지만 윌리엄은 조금 전처럼 손에서 쉬이 힘을 빼지 않았다. 그가 엄지로 도톰한 헤레이스의 입술을 쓸며 물었다.

“얌전히 따르겠나?”

헤레이스가 이를 악물고 날카로운 눈을 했다. 여러 번 위험한 일이 있긴 했었으나 이리 갑작스럽게 막무가내로 구는 이는 보지 못했다. 어찌해야 하지. 그녀는 에르젠을 곁눈질하며 입술을 물었다.

“이 지경에 와서도 버르장머리가 없군.”

헤레이스가 대답하지 않자 윌리엄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에르젠에게 다가갔다. 어미와 떨어져 울던 아이는 성인 남성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시끄럽기는…… 어때? 버르장머리 없는 너 대신 네 애새끼에게 벌을 줄까 하는데.”

윌리엄이 에르젠의 멱살을 쉬이 틀어쥐었다. 그러자 경기하듯 울던 아이가 딸꾹질을 하더니 축 늘어졌다. 에르젠이 기절하자 놀란 헤레이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당장에라도 튀어 나갈 듯 몸을 뒤틀었다.

“에르젠! 이거 놔요! 놔! 에르젠!”

“뭐야? 이거 왜 이래?”

윌리엄의 얼굴에도 순간 당황이 스쳤다. 그가 에르젠의 멱살을 놓고 수하를 봤다. 긴장한 표정의 수하가 아이 가까이에 귀를 가져다 대더니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고는 윌리엄을 향해 말했다.

“다행히 기절한 것뿐입니다.”

윌리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순간이었지만 이따위 평민 아이 때문에 제가 당황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그가 수하에게 신경질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다행은 무슨! 이따위 애새끼가 어찌 되든 내가 알 바야?”

제 분에 못 이겨 씩씩대던 윌리엄이 다시 에르젠의 멱살을 그러쥐었다. 작은 아이의 몸이 아무렇게나 당겨지더니 수하의 품에서 벗어나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헤레이스가 높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아악! 에르젠! 하지 마! 하지 말란 말이야!”

창백하다 못해 파리해진 얼굴에는 그새 눈물이 가득했다. 헤레이스가 경련하듯 벌벌 떨며 아이를 향해 고함을 지르자 윌리엄을 제외한 사내들이 이제는 불편한 듯 얼굴을 굳혔다. 모시는 주인의 명에 따라 움직이기는 했으나 그들도 엄연히 어미를 비롯해 가족이 있는 몸. 죄책감을 지우기 어려웠다.

하지만 윌리엄은 그런 헤레이스를 보며 히죽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가 헤레이스와 마주 보며 쓰러진 에르젠을 신발 끝으로 살살 건드렸다. 그가 발로 아들을 툭툭 칠 때마다 헤레이스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도련님께 시키는 대로 하겠다 빌어. 그래야 끝이 날 거야.”

헤레이스를 제압한 사내 중 하나가 그녀에게만 들리게 웅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헤레이스가 윌리엄을 향해 더듬더듬, 그러나 절박하게 외쳤다.

“시,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러니 이러지 마세요. 뭐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만족스러운 듯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이며 헤레이스에게 다가갔다. 헤레이스는 사내가 다가오든 말든 에르젠만을 봤다. 윌리엄의 수하 하나가 땅에 있는 에르젠을 안아 들더니 헤레이스를 향해 측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괜찮다는 뜻이었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좋았잖아. 어미가 돼 아이를 저 꼴로 만들고 말이야. 자격이 없군.”

헤레이스의 어깨에 손을 올린 윌리엄이 사방을 살폈다. 언덕길이었으나 나무들이 빽빽한 길은 산길이라 해도 무색함이 없었다. 그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바라보며 징그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시키는 대로 하겠다니 우선…….”

어깨를 더듬던 손이 드러난 흰 목을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윌리엄이 헤레이스의 팔을 낚아채 일으키려던 차, 급박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나이 많은 이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이 무슨 짓입니까!”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지팡이를 짚은 채 나지막한 비탈길을 내려오는 나이 많은 여사제가 있었다. 하얀 백발을 꼼꼼히 땋아 말아 올린 노인은 평상시 평온했던 얼굴을 버린 채 분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노사제의 소매 넓은 신복이 거칠게 펄럭였다.

“신성해야 할 이곳에서 무슨 짓입니까!”

노사제의 뒤쪽에는 그녀를 따라 나온 율리나도 있었다. 율리나 또한 노사제와 마찬가지로 평소 온화했던 표정이 아닌 단단히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녀가 사내들을 경멸스럽게 훑어보자 윌리엄을 제외한 이들이 몸을 굳혔다.

“신도님, 일어나세요.”

“에르젠!”

율리나는 노사제의 눈치를 보다 냉큼 헤레이스에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사내들의 결박에서 벗어나자마자 에르젠을 안고 있는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사내가 주춤거리며 물러서려다 헤레이스의 얼굴을 보고 얌전히 아이를 내줬다.

“에르젠…….”

헤레이스가 에르젠을 꼭 안더니 다리가 풀린 듯 바닥에 꿇어앉았다. 흙바닥도 개의치 않고 아이를 품은 그녀는 눈뜨지 않는 아들이 걱정스러운지 덜덜 떨며 연신 에르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에르젠…… 에르젠. 내 아가. 에르젠…….”

그 모습에 율리나가 헤레이스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혀 에르젠을 살폈다. 그녀가 헤레이스의 어깨를 도닥이며 안심하라는 듯 천천히 일러 줬다.

“잠든 것뿐이니 걱정 말아요. 그보다 일어나야지요. 계속 이리 있다가는 옷이 상할 거예요.”

율리나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헤레이스가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율리나는 부들부들 떠는 헤레이스를 제 뒤로 보낸 뒤 그녀를 보호하듯 그 앞을 막아섰다. 평소의 부드러운 표정을 지운 그녀는 윌리엄을 위시한 사내들을 향해 멸시하는 눈을 숨기지 않았다.

“뭐 하는 짓이지? 그 계집은 이미 나를 따르기로 했다고! 뭐 하나, 계집. 당장 이리로 와!”

뜻대로 되어 가던 상황이 한순간에 뒤바뀌자 윌리엄이 이를 갈다가 일갈했다. 하지만 나이 많은 사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앞으로 나서더니 지팡이로 땅을 세게 찍었다.

“여기는 여신의 가호를 받는 신전의 땅입니다. 이런 곳에서 이런 무도한 죄악을 저지르려 한 주제에 고함이라니!”

늙은 사제의 기세가 얼마나 위엄이 넘치는지 윌리엄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가 바로 뒤에 있는 수하와 부딪치고는 얼굴을 붉혔다.

“노인네가 누구한테 감히…… 내가 누구인지 잊었나? 나는 포드 백작가의…….”

“백작님께서 윌리엄 님을 왜 여기로 보냈는지 잊으셨습니까?”

볼썽사나운 자신의 모습에 윌리엄이 인상을 구기며 신분을 들먹였다. 하지만 노사제는 그의 말을 싹둑 잘라 버린 채 도리어 먼저 백작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한술 더 떠 대놓고 윌리엄을 비난했다.

“죄를 씻게 도와 달라 간절히 부탁하셔 받아들였더니 어디 되먹지 못한 행태를…… 쯧.”

“뭐? 되먹지 못해?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인가?”

“그럼 누구에게 한 말이겠습니까. 저 가여운 여인에게 한 말일까요?”

아비의 영지 내에서는 거의 왕이나 다름없이 지낸 윌리엄이었다. 그는 제 아비의 땅에서 감히 제게 저런 언사를 하는 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붉어졌던 얼굴이 이제 거의 터질 듯했다.

“미친 늙은이가! 뭣들 하는 거야! 당장 저것을 잡아! 잡아서 내 앞에 꿇려!”

윌리엄이 발발 뛰며 사제에게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수하들은 헤레이스 모자를 결박했을 때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윌리엄 밑에 있는 그들은 모시는 도련님과 비슷한 성향을 어느 정도 가졌지만 모두 출신은 신앙 깊은 동부요, 신실한 포드 백작가에서 오래 지낸 사용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들과 같은 평민 여인쯤이야 쉽사리 건드렸지만 나이가 지긋한 사제에게 손대는 것은 성격 나쁜 도련님의 명이라 해도 꺼렸다.

“이 늙은이의 말이 틀렸다 싶으십니까? 그럼 당장 백작님께 사람을 보낼까요?”

사제가 율리나에게 눈짓하며 윌리엄을 압박했다. 그러자 율리나가 헤레이스 모자를 부축해 신전으로 올라가는 길로 인도했다. 윌리엄은 제 눈앞에서 사라지려는 헤레이스를 보며 핏발 선 눈을 했지만 이 이상 어쩌지는 못했다. 사제가 정말 아비에게 사람을 보낼까 두려웠고, 주춤거리는 수하들 또한 제 편이 아님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도련님, 혹여나 백작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결국 윌리엄은 수하의 만류에 못 이기는 척 몸을 돌렸다. 뒤에서 노사제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음침한 얼굴로 이를 갈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망할 것들. 두고 보라지. 내가 이대로 물러날 줄 알고.”

* * *

“지낼 곳이 누추합니다. 오랫동안 쓰지 않다 보니. 내일 청소하실 때 도와 드리지요.”

율리나 사제가 탁자를 쓸다 손에 묻어나는 먼지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기저기 구석에 껴 있는 거미줄과 먼지, 그리고 그 아래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짐과 나무 상자. 잠시 머무르라며 내주긴 했지만 오래된 신전의 별채는 민망할 정도로 처참한 꼴을 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사제님. 여기서 지낼 수 있게 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부인께서도 분명 고마워할 거예요.”

율리나 사제의 미안한 말투에 안나가 손사래 쳤다. 당분간 신전에서 지내라 방을 내준 것이 어디인가. 사제들은 헤레이스 일행에게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사제에게 신도를 돕는 일은 당연한 것이니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일도 해 주시는걸요. 여신을 위해 일하시는데 이 정도쯤은 당연히 해 드려야지요.”

낮의 일이 있고 난 뒤 헤레이스는 바로 마을을 떠나려 했다. 하지만 지도 사제인 디안나는 헤레이스를 만류하며 현실적인 문제를 꼬집었다.

‘이제 곧 겨울이오.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가시려고. 게다가 지금 떠나다 그 무도한 자를 마주친다면? 그때는 어쩔 셈이요.’

하얀 백발을 가진 디안나의 말에서는 연륜이 묻어났다. 헤레이스는 그 말을 듣다가 지난겨울을 떠올렸다.

첫 번째 겨울은 성을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닥쳤으나, 그쯤에는 수중에 돈이 적당히 있어 별 어려움 없이 넘겼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겨울은……, 지금의 마을 사람들이 헤레이스 일행을 측은히 여겨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그들은 이미 추위와 배고픔에 굶어 죽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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