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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36화 (36/108)

36화.

“내릴래.”

한참을 어미의 등에서 꽃을 가지고 장난치던 에르젠이 뜬금없이 내리겠다며 칭얼거렸다. 툭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피해 걸음을 재게 옮기던 헤레이스가 어린 아들의 말에 자리에서 멈췄다.

“응?”

“내리고 싶어. 에르젠 혼자 걸어갈 거야.”

아이들의 변덕이란. 몇 걸음 걷고 힘들다며 다시 안길 아들임을 알았음에도 헤레이스는 픽 웃으며 아들을 내려 줬다. 에르젠은 그녀의 등에서 내려오자마자 작은 손으로 제 옷을 펴고 제자리에서 두어 번 폴짝폴짝 뛰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모습에 헤레이스가 무릎을 꿇고 아들과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우리 에르젠, 걷고 싶었어?”

“응. 엄마가 힘들잖아.”

생각지도 못한 답에 헤레이스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녀가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들곤 아들을 꼭 안아 줬다. 작은 떨림에 의아해진 에르젠이 어미의 얼굴을 보려다 익숙한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우리 에르젠, 착하네.”

아이 특유의 냄새가 헤레이스에게 닿았다. 그녀는 아들의 머리를 쓸어 주고는 일어섰다. 에르젠이 자신보다 큰 어미의 손을 꼭 잡고 방긋 웃다가 빨리 가자는 듯 손을 흔들었다.

“천천히. 천천히 걸어도 괜찮아, 에르젠.”

함께 걷는 모자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헤레이스는 귀가가 늦을지언정 에르젠의 속도에 맞춰 느긋하게 길을 걸었다. 잡초와 여러 들꽃, 작은 산짐승 등을 가리키며 아들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알려 주는 그녀의 얼굴은 어느 순간보다 빛났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집에 가면 밥부터 먹자.”

“응!”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모자는 언덕길을 거의 다 내려왔다.

하나 그들이 언덕길 마지막 모퉁이를 돌기 전 웬 사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러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사내들의 목소리에 헤레이스가 급히 걸음을 멈췄지만 그 무리는 자신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이 있는 줄 몰랐는지 눈썹을 치켜뜨고 날카롭게 외쳤다. 심지어 한 사내는 많이 놀랐는지 허리춤에 있는 검집에 손까지 가져갔다.

“뭐야!”

사내 무리는 총 다섯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헤레이스는 그들의 차림새가 범상치 않음을 깨닫는 동시에, 무리의 맨 앞에 있는 사내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이임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티 나지 않게 입술을 문 채 길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고개를 푹 숙였다. 먼저 지나가라는 뜻이었다.

헤레이스가 비켜섰음에도 무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들의 얼굴에는 모두 놀라움이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헤레이스의 얼굴을 은근히 훔쳐보다 그녀의 차림새가 허름한 것을 깨닫고 노골적인 눈을 했다. 얼굴과 몸을 더듬는 여러 쌍의 눈에 헤레이스가 고개를 더욱 수그린 채 모로 얼굴을 틀었다.

“……먼저 지나가 보겠습니다.”

가느다란 목소리와 함께 모자가 반걸음 움직였으나 사내들은 비켜 줄 낌새가 없어 보였다. 헤레이스가 고개를 들어 눈빛으로 비켜 달라며 다시 한번 청했다. 그러자 가장 앞에 선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헤레이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가 헤레이스의 차림새를 몇 번 더 훑다 턱을 치켜들고 거만히 물었다.

“뭐 하는 계집이지?”

* * *

윌리엄은 포드 백작가의 차남이자 막내였다. 포드 백작은 장남과 달리 늘그막에 얻은 나이 어린 둘째 아들을 제법 귀여워했다. 그는 장남을 비롯하여 딸들에게도 엄격했던 모습을 윌리엄에게만은 벗어던졌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지나치게 자유로이 자란 윌리엄은 신앙에 목을 매며 청빈과 도덕을 중시하는 아비나 형과 달리, 지나치게 쾌락을 추구하며 제멋대로 삶을 살았다.

영지에서 왕이나 다름없는 아비의 권력, 제 사고를 모두 수습해 주는 형. 무서울 거 하나 없이 자란 윌리엄은 아비가 돈을 꽤나 들여 보내 준 수도에서도 공부나 제대로 된 사교 활동들은커녕, 제 욕망을 채우고 사고를 치며 방종하게 지냈다.

그리고 그렇게 지내길 몇 년, 그는 질 나쁜 친구들과 함께 약혼자가 있는 여인을 강제로 취하는 극악무도한 죄까지 저질렀다.

‘포드 백작께서는 여자의 약혼자 쪽에 적당한 보상을 해 주시면 됩니다. 여자 쪽은 저희가 보상을 하지요.’

본래라면 이리 무도한 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은 모조리 처벌받아야 했다. 그러나 여인의 출신이 한미한 자작가 사생아인 데다, 같이 사고를 친 가해자 중 몇이 제법 대단한 가문의 자제였기에 윌리엄은 벌을 피해 갔다.

가문끼리 정한 보상이라는 이름에 피해자인 여인은 수도를 떠나 외진 곳에 있는 신전에 억지로 끌려갔다. 몸도, 마음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다친 그녀는 영영 수도로 올라오지도, 사랑하는 이와 혼인할 수도 없게 됐다. 참담한 결말이었다.

일은 그렇게 끝났지만 신실했던 백작은 아들이 친 사고에 제법 큰 충격을 받았다. 백작은 즉시 아들을 영지로 불러들였고 영지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에서 두 달간 기도를 올리며 죄를 씻으라고 고래고래 고함질렀다.

‘당장 나가거라! 나가서 네 죄를 기도로 씻고 와! 당장!’

어찌 보면 벌이라 하기 민망할 정도의 처분이었건만 윌리엄은 아비의 명에 입을 내밀고 억울한 얼굴을 했다. 그런 사생아 계집애 하나 건드린 것이 무에 죄란 말인가. 게다가 그 계집애가 먼저 살살 웃으며 자신과 친우들을 꼬드기지 않았나.

처음 보는 아비의 화난 얼굴과 형의 차가운 눈초리에 윌리엄은 말없이 산골짜기 신전으로 향했으나 그의 속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아버지께 감사해야겠군.’

하지만 그것도 조금 전까지였다. 윌리엄은 눈앞의 여인을 보는 순간 여신께서 억울한 저를 보살핀 것이 분명하다 여겼다.

“뭐 하는 계집이지?”

윌리엄이 혀로 입술을 적셨다. 온몸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은 참기가 어려웠다.

눈앞의 여인은 여느 평민들처럼 거적때기 같은 차림새였으나 그가 본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웠다. 보고만 있어도 동하는 얼굴에, 부드러워 보이는 몸, 게다가 설명할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까지.

그는 길고 풍성한 검은 속눈썹 아래 우물처럼 깊은 여인의 눈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그러다가 여인에게 바짝 붙어 바르작거리는 물체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

여인을 살피느라 미처 보지 못한 아이가 눈에 잡혔다. 윌리엄이 아이를 쳐다보다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조막만 한 아이는 척 봐도 여인의 핏줄이었다. 굳어 있는 어미와 마찬가지로 겁에 질린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이 여인의 푸른 눈과 같은 색을 뽐냈다.

‘남편이 있나?’

하기야 저 정도 미모라면 열 번을 결혼하고도 또 할 수도 있으리라.

윌리엄은 저 혼자 결론을 내리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남편 있는 여인을 차지하는 일은 피곤하긴 했지만 상대는 벌레 같은 평민이 아닌가. 수도의 부유한 평민도 아닌 이런 산골짜기 촌부 하나 눌러 버리는 것쯤은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뭐 상관없겠지.”

윌리엄은 저를 경계하며 살피는 모자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가 가까워지자 헤레이스가 에르젠을 뒤로 보내고 입술을 꾹 물었다. 그 모습이 꼭 맹수에게서 새끼를 지키는 어미 짐승 같아 비소가 새어 나왔다. 윌리엄이 입꼬리를 올린 채 물었다.

“이 근방에 사는 계집인가?”

헤레이스는 윌리엄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고개를 내려 사내의 눈을 피하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나가지 않으실 거라면 비켜 주세요.”

“남편은 있나?”

윌리엄은 헤레이스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장갑 낀 손으로 헤레이스의 턱을 잡아 들고는 물건을 품평하듯 이리저리 비틀었다.

사냥 장갑 특유의 가죽 내와 축축함이 소름 끼쳤다. 불쾌해진 헤레이스가 거칠게 고개를 틀어 윌리엄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제법 앙칼진 계집이로군.”

윌리엄이 킬킬대며 웃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사내들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거대한 성인 남성들의 비웃음 소리와 압도적인 그들의 분위기에 에르젠이 긴장한 듯 딸꾹질을 하며 헤레이스에게 더욱 가까이 붙었다.

“괜찮아, 에르젠. 엄마가 있잖아.”

헤레이스가 겁먹은 아들을 달래려 할 때였다. 팔짱을 낀 채 소리 높여 웃고 있던 윌리엄이 웃음을 멈추고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하지만 평민 주제에 지나치게 건방져.”

짝!

익숙한 듯 내리치는 손길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헤레이스는 혹여나 에르젠이 놀랄까 싶어 입술을 문 채 비명을 삼켰지만 옆으로 내쳐지는 몸을 막지는 못했다. 에르젠이 어미와 함께 옆으로 쓰러졌다.

“엄, 엄마…… 흐읍.”

헤레이스는 에르젠이 넘어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품 안으로 아들을 끌어당겼다. 많이 놀란 아이는 큰 소리로 울지도 못하고 헤레이스의 품에서 끅끅 울음을 토했다. 그녀는 부어오르는 자신의 뺨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에르젠을 어르고 달랬다.

“에르젠, 울지 마. 울지 마, 우리 아가.”

“흐윽…… 흡…… 엄, 엄마.”

마음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측은함을 느낄 만했다.

하지만 윌리엄은 저보다 신분이 낮은 이들을 가축이나 다름없이 보는 자였다. 노예가 아닌 국민으로서 권리를 가진 평민에게도 그는 가차 없었다. 짐승의 마음을 가진 사내는 몸을 옹송그려 모아 아이를 감싸는 여인을 보며 제 욕심이 더 커짐을 느꼈다.

‘보면 볼수록 괜찮은 계집이란 말이지.’

수도에서 지낼 적 금화 수백 개를 쏟아부어 겨우 하룻밤을 사들였던 이름 높은 계집도, 한 번 춤추는 데 값비싼 선물이 필요했던 사교계의 꽃도 눈앞의 여인만 못했다. 이런 계집을 옆에 끼고 있으면 즐거울 뿐 아니라 다른 사내들의 앞에서 제법 면목도 서겠지. 그뿐인가? 저 정도 외관은 여러 방면으로 도움이 될 법했다.

윌리엄은 제 친우들이 정부들을 어떻게 써먹는지를 기억하며 입맛을 다셨다. 충분히 취한 다음 수도로 데리고 가 장사를 한다면 돈이든 지위든 크게 이윤이 남을 것이다.

“끌어내.”

윌리엄이 헤레이스 모자를 내려다보다 뒤에 있는 수하들에게 턱짓했다. 애 딸린 여인을 다루는 거야, 아이에게 사탕 뺏기보다 쉬웠다. 저리 온몸으로 아이를 아낀다 알려 주는데 이를 이용하지 않으면 더 이상한 것 아닌가. 아이를 인질 삼으면 여인은 분명 고분고분해지리라. 그의 명에 뒤에 있던 수하들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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