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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35화 (35/108)

35화.

‘본래 네 것이 아니었으니 억울하게 생각 마라.’

이즈카엘은 성을 떠나기 전, 그를 배웅하겠다고 나선 샬럿에게서 금반지를 앗아 갔다. 세르펜스 문양이 선명한 그 아름다운 반지를……. 샬럿은 과거 헤레이스가 그러했듯 안 된다 말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분명 손에 들어온 것인데도 이즈카엘의 눈짓 한 번이면 그녀는 모든 것을 박탈당했다.

“내가 가져야 할 건 하나도 주지 않으면서…… 죽은 게 분명한 그 여자를 챙기느라 줬던 것도 빼앗아 갔단 말이야!”

“어머니.”

미겔이 어미를 부드러이 부르며 작은 손으로 떼쓰는 어미의 어깨를 건드렸다. 샬럿이 고개를 살짝 들자 아이가 커다란 금안을 예쁘게 휘며 말했다.

“그걸 억울해하시면 안 돼요. 저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고 항상 말하잖아요. 착각도, 과한 욕심도 곤란해요. 그리고 공작 부인은 죽지 않았어요. 멀쩡히 살아 있답니다.”

“너, 너어!”

샬럿이 거칠게 고개를 들고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아는 양 구는 자신의 아들을 기이하게 느끼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벌떡 일어나 눌러 왔던 모든 감정을 분출하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었어! 죽었다고! 그러니까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지!”

“…….”

“네 어미는 나야! 그러니 그 반지도! 공작 부인 자리도 내 거야! 다 내 것이라고!”

흡사 광인에 가까운 어미를 보며 미겔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살짝 핥은 아이는 꼭 맛있는 사탕을 먹는 것처럼 달뜬 표정이었다. 아이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다가 눈을 감았다.

“그런데 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계속 내 걸 빼앗아 가느냐고!”

샬럿은 계속해서 혼자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집어 던졌다. 하지만 그녀의 고함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으며 바닥을 향했던 물건들은 어쩐 일인지 모두 멀쩡했다.

누가 보더라도 기괴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침대에 앉아 신선한 공기를 마시듯 크게 숨을 들이켜는 아이도, 자리에서 날뛰는 여인도 모두 그 비이상적인 현상에는 아무 반응도 않았다.

한참 난리를 치던 샬럿은 어느 순간 행동을 멈췄다. 그녀가 후다닥 뛰어가 다시 아들의 손을 붙잡았다.

“너…… 미겔, 네가 커서 후계자가 되면…… 그러면…….”

“…….”

“모두 날 우러러보겠지? 공작 부인으로 볼 거야. 그렇지?”

미겔은 애처로운 어미의 말에 고민하듯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샬럿이 애원하듯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그제야 아이가 예쁜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괜한 걱정 말고 한숨 푹 자세요. 이런 모습 아랫것들에게 보이기 부끄럽잖아요.”

작은 손이 샬럿의 눈가를 배회했다. 그녀가 아이의 손길을 따르다 그대로 무너졌다.

“맞아. 이런 모습을 천것들에게 보일 수는 없어. 난 공작 부인이 될 여자니까.”

멍하니 중얼거린 샬럿은 미겔이 앉은 자리의 옆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미겔은 잠든 어미의 머리카락 위 장신구를 가만히 보다 그중 커다란 루비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붉디붉은 단단한 보석을 와각와각 씹어 삼키며 말했다.

“……물론 그때까지 어머니 당신이 살아 있다면 하는 말이지만.”

* * *

신전의 문양을 따라 그려진 하얀 백합 다발이 당장에라도 향을 뿜을 듯 정교했다. 장인의 작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솜씨에 율리나 사제는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말했다.

“이번에도 감사드립니다. 여신님께서도 신도님의 정성을 살펴 주실 겁니다.”

칭찬에 얼굴을 붉힌 헤레이스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말은 없었으나 수줍음 가득한 미소와 조금 붉어진 얼굴이 그녀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여실히 잘 보여 줬다.

‘언제 보아도 참 아름다운 신도야.’

율리나는 기쁨에 반짝이는 헤레이스의 얼굴을 보며 새삼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익숙해질 법도 했건만 눈앞의 여인은 같은 또래의 여인인 자신이 보아도 언제나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이런 아내를 두고 먼저 여신의 곁으로 떠난 남편은 눈이나 제대로 감았…… 아이고, 이 무슨 불경한 생각이야. 여신이여, 용서하소서.’

제 불순한 말에 놀란 율리나 사제가 하얀 정복 소매 안으로 급히 손을 넣었다. 작은 주머니가 짤랑이는 소리와 함께 헤레이스의 흰 손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항상 솜씨에 비해 값이 적은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항상 감사드립니다, 사제님.”

주머니를 받아 든 헤레이스가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리 무겁지는 않았으나 이 정도면 올겨울을 준비하는 데 큰 보탬이 될 뿐 아니라, 오늘 저녁 에르젠에게 고기 스튜를 먹일 수 있으리라. 헤레이스가 주머니를 품 안에 넣고 제 손을 잡은 작은 아이를 바라봤다.

헤레이스가 에르젠을 바라보자 율리나 또한 자연스레 아이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녀가 헤레이스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에르젠을 향해 인자한 얼굴로 인사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어린 신도님을 잊고 있었구나, 그래. 에르젠, 그동안 잘 지냈니?”

율리나의 목소리에는 아이를 향한 호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에르젠은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헤레이스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푹 파묻더니 한쪽만 빼꼼 내밀어 율리나를 관찰하듯 살폈다. 어미를 꼭 빼닮은 푸른 눈이 아이 특유의 순수함으로 반짝였다.

“에르젠, 사제님께 인사해야지.”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봐 낯을 가리는 게지요.”

헤레이스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아이를 부르자 율리나 사제가 손사래를 쳤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이를 보며 알았다. 어미를 닮아 곱고 예쁜 아이는 여려 보이는 생김새만큼이나 수줍음이 많았다.

“에르젠, 어서.”

헤레이스는 율리나 사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눈을 했다. 에르젠이 엄한 얼굴의 어미를 올려다보고는 입술을 삐쭉거리다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아이의 작은 발에 꼭 맞는 앙증맞은 신발이 앞쪽으로 모이며 퍽 귀여운 모양새를 만들었다.

“……안녕하세요, 사제님.”

집중해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으나 헤레이스는 잘했다는 듯 부드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어미의 칭찬에 에르젠이 배시시 웃으며 다시 헤레이스의 다리에 착 달라붙었다. 어미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비비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율리나 사제는 흐뭇한 얼굴로 모자를 바라보다 허리춤에 걸려 있던 천 주머니를 풀어 내밀었다.

“그럼 이번 것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번에 말씀드렸지만 꽤 중요한 물건에 쓰일 거라서요.”

“걱정 마세요.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대한 이른 시일 내로 가져다 드릴게요.”

헤레이스가 주머니 속 값비싼 금실과 천을 곁눈질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신전에서 맡긴 일은 재료가 값비싼 만큼 보수도 두둑했다.

‘예상보다 빨리 일을 쉴 수 있겠어.’

이 일을 끝내고 겨울 준비마저 끝내면 에르젠과 온종일 놀아 줘야지. 눈이 오는 날에는 같이 눈싸움도 하고, 아이에게 이야기도 잔뜩 들려 주리라.

평탄한 앞날을 생각하며 헤레이스가 제게 붙어 있는 에르젠의 뺨을 살살 쓸었다. 그러자 아이가 어미의 손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어리광을 피웠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헤레이스가 꾸벅 허리를 숙이자 에르젠 또한 율리나에게 인사하고는 어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율리나가 기도하듯 손을 모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예, 조심히 살펴 가세요. 여신의 가호가…….”

하지만 여사제의 인사는 끝을 맺지 못했다. 율리나가 막 헤레이스 모자에게 인사하려던 차, 언덕에 있는 신전 바로 아래 마을 공터 쪽에서 소란이 인 듯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중간에 꽤 큰 고함도 있었기에 세 사람의 시선은 자연히 언덕 아래로 향했다.

“저분은…….”

율리나 사제가 소란의 중심에 있는 말, 정확히는 말 위 젊은 사내의 형체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여사제의 시선을 따라 사내를 보던 헤레이스가 말 뒤에 있는 마차를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이런 산골짜기와 어울리지 않는 고급 마차와, 마차 지붕 위 사슴뿔…….

‘……이런 마을에 귀족이 왜.’

저 마차의 주인은 분명 귀족이었다. 아무리 부유하다고 해도 함부로 달 수 없는 사슴뿔 장식이 그것을 증명했다. 왕관 모양은 황족들만, 부엉이 모양은 고위 관료들만, 백합 모양은 사제들만 사용하는 것처럼 사슴뿔 장식은 일정 신분 이상의 귀족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으로 허락되지 않은 이가 사용하면 중죄였다.

헤레이스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신가요?”

* * *

“엄마, 배고파.”

지체된 점심시간에 아이가 보채기 시작했다. 헤레이스는 그런 에르젠을 살살 달래며 걷다가 길가에서 들꽃 하나를 꺾어 쥐여 주고는 등을 내밀었다. 제법 묵직한 무게에 힘들 법도 했지만 헤레이스는 나날이 자라나는 아이를 이렇게라도 느낄 수 있어 기뻤다.

“그래, 에르젠. 빨리 집에 가자. 가서 엄마가 맛있는 거 해 줄게.”

원래라면 이미 집에 도착해 식사를 마쳐야 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핑계를 대며 신전에 몇 시간 더 머물렀다. 당장 내려갈 수도 있었지만 말 위 사내를 비롯해 그 일행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쯤이면 아예 마을을 떠났겠지.’

사내는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봤음에도 외모가 준수했다. 타고 있는 말의 털 오라기만큼이나 윤기 나는 갈색 머리카락에 말쑥한 모습이 이런 작은 마을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 근방 영주님의 막내 아드님이십니다. 수도에서 돌아오셨다 듣긴 했지만…… 이런 마을은 아예 발걸음 하지 않으실 분인데. 저도 기도회에 참석해 몇 번 본 것이 다라 얼굴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했기에 더욱 경계심이 들었다. 헤레이스의 얼굴은커녕 그녀의 존재조차 몰랐던 마을 사람들과 달리, 수도에 머물렀던 귀족이라면 혹 그녀의 얼굴을 알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녀를 모른다 해도 지역 유지와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여러 번 좋지 못했던 경험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괜한 걱정이야.’

헤레이스가 여러 상황을 가정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수도를 떠난 지 몇 년이었다. 그리고 성을 떠나고 나서 겪었던 일들은 그저 몇몇 나쁜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괜히 불안해하고 의심하는 짓은 좋지 못했다.

헤레이스는 에르젠을 고쳐 업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파르지는 않았으나 내리막길이었기에 헤레이스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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