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겨울이라는 단어에 안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놓았다. 나무 자수틀이 탁자 위에 툭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내자 헤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 떨었다. 저야 자신의 선택으로 이리 살아가고 있지만 안나는 무슨 죄로 제 옆에서 고생한단 말인가. 안나의 앞길을 막았다는 사실이 떠오를 때면 헤레이스는 그녀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미안해. 내가 부족한 탓이야. 날 따라와 안나 네가 고생하는구나.”
헤레이스가 눈을 내리깔고 안나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그제야 제가 눈치 없는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안나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 그저 겨울을 생각하니 갑갑해서 그런 건데. 그녀가 헤레이스의 눈치를 살피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탓이 아닌걸요. 세상에 못된 놈들이 많아 그런 거지. 용서하세요. 제가 말실수를 했어요.”
하지만 죄책감의 무게는 이미 헤레이스의 등을 억누른 후였다. 헤레이스가 안나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지난 세월을 더듬기 시작했다.
‘어느새 겨울이구나. 세르펜스 성은 이쯤이면 벌써 얼어붙었겠지. 그이는…….’
헤레이스는 겨울을 맞이했을 북부를 생각하다 저도 모르게 에르젠의 아비를 떠올렸다. 애써 잊으려 했지만 사내는 이리 계절을 생각하다가도, 일렁이는 촛불을 볼 때도 불쑥불쑥 튀어나와 그녀의 정신을 흩트려 놓았다.
잠깐 바느질을 멈춘 헤레이스가 입매를 꾹 물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빨리 해야 해. 아니면 안나가 힘들 거야.’
* * *
세르펜스 성에서 도망친 지 어언 3년, 이즈카엘에게서 벗어난 세 사람은 풍족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헤레이스의 전 신분을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수중에 있는 돈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고,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자수밖에 없는 헤레이스와 안나는 그 재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귀부인이면서 왜 도망칠 때 귀한 보석 하나 챙기지 않았는지 의아할 수 있었지만, 헤레이스는 성을 떠나오며 보석이나 장신구 등은 처녀 시절의 것을 제외하면 일절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처녀 때라고 해 봤자 디본이 멸문하며 대부분 사라졌기에 그마저 얼마 없었다.
‘몇 개 챙기세요. 한두 개쯤은 모르실 거예요.’
떠나기 전 안나는 이즈카엘에게 받았던 것 중 두어 개쯤은 챙기라 말했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즈카엘이 그녀에게 쥐여 줬던 것들은 가져오기에는 거부감이 심하게 들었을뿐더러, 그의 기억력이 비상하다는 것을 헤레이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 귀걸이 제법 좋아하나 봐. 당신에게 주기에 작고 초라해 미안했는데 해 줘서 고마워. 당신 귀에 있으니 값어치 이상을 하는 것 같아 기뻐.’
보석함에서 함부로 무언가를 꺼내 장물로 썼다가는 추격의 대상이 되기에 딱 좋았다. 그리고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챙긴 것만으로도 몇 년은 걱정 없이 살았으리라. 그러나 헤레이스의 일행은 예상보다 훨씬 자주 주거지를 옮겨야 했고, 잦은 이동 때문에 돈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순식간에 소진되었다.
‘아기 엄마가 참으로 곱상하구먼. 품에 있는 갓난애만 아니어도 오늘 당장 사내 하나를 낚아채 결혼할 수 있겠어.’
돈을 아끼려면 어디 한곳에 정착해야 했지만 그건 쉽지 않았다. 헤레이스의 외관은 어디를 가나 눈에 확 들어왔다. 덕분에 그들이 정착하는 마을은 작으나 크나 언제나 아름다운 이방인에 대한 소문이 들끓었다.
마을에서 떨어져 살아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이웃들과 교류하다 보면 어느새 헤레이스는 유명 인사가 돼 있었다. 예쁜 외모의 여인에게 주는 관심, 단지 그뿐이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렇지 못했다.
‘우리 주인 나리께서 아가씨를 집에 들이고 싶으시답니다. 아, 물론 안주인께서 계시지만 따로 지낼 거고 별문제는 없을 거요. 그러니…….’
‘내일 밤 이곳으로 오게. 듣지 않는다면 알지?’
‘아이는 두고 몸만 와. 그러면 편히 살게 해 주지.’
달콤한 음식에 벌레가 꼬이듯, 아름다운 헤레이스에게는 추접스러운 이들이 많이 꼬였다. 여인 둘에 아기 하나. 만만한 먹잇감에 무뢰배들은 침을 흘리며 달려들었다.
마을의 유지, 자신의 평판이 뛰어나다며 스스로 밝히는 기사, 심지어 신전의 사제 등등 그럴싸한 껍데기를 쓴 이들은 호의를 베푸는 척, 아니 가끔은 대놓고 제 욕망을 드러냈다. 처음 그들의 욕망을 호의라 착각했던 헤레이스 일행은 몇 번이고 고비를 넘긴 후에야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덕분에 헤레이스의 도주가 성공한 것인지도 몰랐다. 짧은 기간 여러 곳으로 이동하다 보니 일행은 어느새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세르펜스 성에서 멀리 떠나와 있었다. 북부를 지나 동부의 산 몇 개를 넘은 그들은 한참 만에야 딱 맞는 안식처를 찾았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이번에도 조심해야겠지요?’
깊은 산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은 서른 가구도 되지 않을 만큼 작았다. 게다가 마을 근처 오래된 신전에는 여신을 모시는 여사제들이 있었다.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마을의 역사를 함께한 유서 깊은 신전 덕에 마을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신앙심이 깊었다. 수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산골 구석에 사는, 꼬장꼬장한 신앙을 가진 마을 사람들이 책에나 나오는 촌뜨기에 불과했지만, 헤레이스 일행에게 순박하고 신실한 이들은 천사나 다름없었다.
‘여인들끼리 아이를 키우는 것은 어렵겠지. 소일거리를 줄 테니 집에서 아이 돌보며 일을 해 보오.’
텃세가 없다 할 수는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금세 헤레이스 일행을 받아들였다. 나이가 지긋한 촌장은 남편을 잃었다고 말하는 헤레이스의 손을 잡고 여신의 가호가 아이에게 함께할 거라 그녀를 위로하며 소일거리를 내줬다. 또한 신전 여사제들도 아이를 홀로 키우는 그녀를 안타까워하며 여러 편의를 봐줬다.
지금 하는 일도 신전에서 받은 것이었다. 사제들은 헤레이스의 정교한 자수 솜씨를 보더니 작은 조각상이나 경전을 감싸는 천에 자수를 놓는 일을 부탁했다. 헤레이스보다는 못했지만 안나의 솜씨 또한 못 내놓을 정도는 아니어서 두 사람은 자수로 살림을 꾸려 나갔다.
“……겨울이 지나고 에르젠이 다섯 살이 되면 여길 떠나자.”
“예?”
사죄 이후 한동안 말없이 자수에 집중하던 안나는 갑작스러운 헤레이스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떠나자니. 이렇게 좋은 마을은 어디 가서 보기 힘들었다. 놀란 그녀가 손을 멈추고 헤레이스를 봤지만 헤레이스는 여전히 손을 재게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너도 이제 자리를 잡아야지. 결혼도 해야 하고……. 언제까지 내 곁에서 고생만 할 수는 없잖니.”
“…….”
“네게는 항상 미안했어, 안나. 나만 아니었으면 진작 더 좋은 삶을 살았을 텐데. 널 볼 때면 유모에게도 미안해.”
입술을 깨문 채 눈물 가득한 얼굴로 헤레이스를 보던 안나가 낯빛을 바꿨다. 그녀가 약간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께서 제 어미에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헤레이스는 무어라 말하려다 그만뒀다. 안나는 이상하리만치 제 어미에게 적대감을 가졌다. 헤레이스의 유모이기도 한 안나의 어미는 분명 딸인 안나와 사이가 좋은 어미였다. 하지만 디본의 몰락 이후 다시 만난 안나는 제 어미가 대화에 오를 때면 치를 떨었다.
“어머니는 아가씨를 죽이려 했어요. 그리고 그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에요.”
안나와 이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물론 유모가 헤레이스에게 독약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반역죄로 목숨이 위태로울 때였고, 여인인 헤레이스는 노예로 떨어져 몸을 더럽힐 가능성이 컸다. 보수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유모의 입장에선 자신이 키운 고귀한 아가씨가 그리되는 것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으리라.
“안나, 그건…….”
“디본과 함께 셜벗도 끝났어요. 가문에는 오롯이 저만 남았고 셜벗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도 없죠. 그때 아가씨께서 저를 찾아내지 않았다면 전 진즉 죽거나 노예로 팔려 갔을 거예요. 그러니 다시는 그런 말 마세요. 저는 아가씨 곁에 있을 거예요.”
안나가 어미를 미워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헤레이스는 유모를 두둔하려 입을 열었지만, 안나는 헤레이스의 말을 끊어 내더니 결연한 얼굴로 헤레이스를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자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천천히…… 시간이 많을 때 이야기해 보자.’
콱 닫힌 듯한 모습에 결국 헤레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어미에 대한 안나의 앙금을 풀어 주고 싶었지만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헤레이스는 흰 손에 바늘을 쥐어 든 채 다시금 빠르게 움직였다.
* * *
“미겔! 미겔! 어디 있니!”
방문이 쾅 열렸다. 커다란 침대 위에 홀로 앉아 인형을 만지작거리던 은발의 아이가 고개를 들어 문가를 바라봤다. 금발의 여인이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억울한 표정으로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겔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머니, 저를 찾으셨어요?”
네 살인 아이가 내뱉는 문장은 너무도 명확했다. 하지만 샬럿을 비롯한 세르펜스 성 사람들에게 그건 이미 일상이었다. 미겔은 말문을 연 지 몇 달 되지 않아 완벽히 의사소통을 했다.
사람들은 그런 미겔을 천재라 치켜세웠다. 샬럿 또한 여러모로 뛰어난 아들 덕에 으스대며 다녔다. 하지만 그녀에게 미겔은 자랑거리라기보다 다른 이유로 꼭 필요한 존재였다.
“아…… 미겔. 내 아들.”
샬럿은 자신을 바라보는 미겔을 향해 비틀거리며 걷다가 무너져 내렸다. 탐스러운 금발 위, 황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치렁치렁한 장신구가 소리를 내며 앞으로 쏟아졌다. 미겔은 제 앞에서 무릎을 꿇은 어미의 머리를 쓰다듬다 앳된 목소리로 상냥히 물었다.
“이러는 거 오랜만이네. 그래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에요?”
“……네 아버지가 그 반지를 앗아 갔어. 내 것이 아니라며…… 나한테 황금을 주겠다 말해 놓고 그것마저 앗아 갔어!”
샬럿의 목소리에는 온통 분기가 가득했다. 엉엉, 그녀는 아이처럼 울며 아들에게 제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게 어떤 물건인데. 비어 버린 약지에 세 개의 반지를 꼈지만 마음속 공허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