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죽은 거야. 저를 닮은 그 애새끼랑 함께 죽어 버린 거라고. 호수에 빠졌든 어디 산에서 굴렀든 이미 시체일 게 분명해.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이마에 손가락을 올려 구겨지는 미간을 애써 편 샬럿은 희망찬 생각을 했다.
그래. 이미 죽은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여인 둘이서, 그것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숙련된 기사들의 추격을 따돌리겠나. 이즈카엘을 비롯한 기사들의 거대한 군마를 생각하며 샬럿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죽지 않았다 한들 나에게는 미겔이 있잖아. 내 아들이 후계자만 되면…….’
아비를 닮은 아들이 떠오름과 동시에 걱정이 싹 사라졌다. 귀한 아이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샬럿에게 자신감을 가져다줬다. 미겔만 있으면, 그 애만 있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았다.
“……가서 미겔을 데려와.”
여전히 눈을 감은 샬럿이 하녀에게 명했다. 하지만 하녀는 알았다는 말 대신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주, 주인님.”
주인이라는 말에 샬럿의 눈이 번쩍 떠졌다.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지만 시기가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이야. 혹, 그 여자가 돌아왔나?
애써 불안감을 감추며 샬럿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사내의 굳은 턱과 그 아래 단단한 몸이 보였다.
이상하게 사내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웠다. 샬럿은 꼭 잘못을 저지른 죄인처럼 눈을 내리깔며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뭘 어찌했다고!’
그 여자가 돌아왔든 아니든 당당해야 했다. 그래, 내게는 미겔이 있잖아.
주먹을 꽉 쥔 샬럿은 사내의 눈을 마주 보려 했다. 하지만 사내의 얼굴을 마주하자 몸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아…….”
저절로 침음성이 나왔다. 그의 눈엔 당장이라도 그녀를 베어 버릴 듯한 날카로운 살기가 뚜렷했다. 샬럿이 창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동시에 스산한 목소리가 형체 없는 검이 되어 그녀의 목에 닿았다.
“누가 너더러 여길 이따위로 만들라 했나.”
* * *
헤레이스의 방은 반나절 만에 다시 이전처럼 원상 복귀됐다. 샬럿은 다시 변하는 방의 모습에 두려움에 질렸던 것도 잊고 나가지 않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녀는 꼭 무언가 쓰인 것처럼 광기에 차 소리 질렀다.
‘미겔의 어미가 나잖아. 그럼 당연히 이 방도 내 거야! 내 것이라고!’
하지만 이즈카엘은 가차 없었다. 그는 샬럿에게 이 방에 발을 디뎠다간 다리를 잘라 버리고, 이 방의 물건을 건드렸다간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일갈한 뒤 하인들에게 그녀를 본래의 방으로 끌고 가라 명했다.
샬럿은 자신을 끌어내는 하인들에게 발길질하며 미겔이 크면 네놈들부터 죽여 없애 버리겠다 소리쳤지만 서슬 퍼런 이즈카엘의 명을 받은 하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즈카엘은 샬럿을 내보낸 뒤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아내의 방 침대에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몇 시간이 우습게 지나갔고 순식간에 밤을 넘어 새벽이 왔다. 사내는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창가에 스며들 때쯤에야 미동 않던 몸을 움직였다.
“헤레이스…….”
아내의 이름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음울했으나 움직임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다. 사내는 소중한 것을 만지는 것처럼 천천히 침대 시트를 쓸었다. 아내의 피부처럼 나긋한 감촉이 손에 착 감기자 절로 기대감이 생겼다.
이즈카엘은 계속해서 헤레이스의 이름을 외며 얼굴 가까이로 시트를 가져왔다. 하지만 시트에서는 깨끗이 빨래한 냄새만 날 뿐, 기대했던 아내의 체취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즈카엘은 그것이 못내 분한 듯 왈칵 미간을 구겼다.
이렇게 사소한 일상에서 헤레이스가 지워질 때마다 그녀가 제게서 도망친 것이 상기돼 기분이 몹시 가라앉았다. 시트를 던지듯 놓은 이즈카엘이 고개를 돌려 화장대를 바라봤다. 아내가 아끼는 것 중 하나였던 화장대는 깨끗했지만 여기저기 반질거리는 것이 손때가 묻어 있었다.
그가 화장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다 그 아래 놓인 보석함에 시선을 던졌다. 작지만 화려한 상자를 보던 그는 굳은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로 다가갔다. 곧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상자 안에서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왜…….’
이즈카엘은 아내의 장신구에 대해 완전히 꿰뚫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선물한 것들만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이 보석함에 있는 것들은 물론이고, 그 어떤 장신구도, 보석도 가져가지 않았다.
봄날, 푸른 잎사귀가 예쁘다는 말에 선물했던 에메랄드 목걸이도, 바다에 가 보고 싶다는 말에 준비한 산호 팔찌도, 아내의 흰 피부만큼 새하얀 진주 귀걸이도 모두 제자리였다.
처음 헤레이스가 도망치고 나서 아내의 물건을 조사할 때 그가 선물한 것 중 이렇듯 사소한 것 하나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얼마나 분노했던가. 이즈카엘은 헤레이스가 도움이 될 법한 물건조차 챙기지 않고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탁.
이즈카엘이 갖가지 색으로 빛나는 보석들을 바라보다 소리 나게 함을 닫았다. 계속 보고 있자니 심사가 뒤틀리고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 다시 침대로 돌아온 그가 몸을 아무렇게나 뉘고 던져 놓았던 시트를 말아 쥐었다.
두 달간 어떤 마음으로 헤레이스를 찾았던가.
그날 밤 바로 아내를 추적했지만 그녀는 어찌 된 영문인지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채 감쪽같이 사라졌다.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에 이즈카엘은 달리는 말 위에서도 몇 번이고 의심했다. 혹시 도와준 이가 있는 게 아닐까. 가령…….
‘조용히 나갈게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아이와 함께 성을 나가겠다며 울먹이던 아내의 얼굴이 떠오름과 동시에, 접어 뒀던 인물 하나가 그려졌다. 아내와 다정히 붙어 있던 제 이복동생. 샤를의 붉은 머리가 그려질 때면 저절로 그날 밤이 생각났다.
“……제기랄.”
샤를 또한 언젠가부터 행방이 묘연했다. 쥐 잡듯 뒤져도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 두 사람.
이즈카엘은 헤레이스가 샤를과 함께 있는 상상을 하다 가슴 어귀의 옷을 쥐었다. 원래 연처럼 두 사람은 정말 함께하고 있는 걸까? 그의 눈을 피해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하게 웃고 있을까?
“안 돼, 헤레이스. 당신은 내 부인이야. 내 아내라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 그 밤이 악몽처럼 다가왔다. 지난 두 달간 얼마나 많은 밤을 이렇게 보냈던가. 괜찮아졌다 싶다가도 문뜩 솟은 감정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즈카엘은 다시금 치솟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른 채 아내를 부르고 또 불렀다. 그것이 꼭 진정제라도 되는 것처럼.
뒤섞여 들끓었던 감정이 한차례 지나가고 나면 남는 것이라고는 차가운 분노와 미움, 그리고 약간의 자책뿐이었다. 더 옥죄었어야 했는데 어디서 마음이 약해졌던 걸까. 어디서 틈을 보였던 걸까. 눈물로 자신을 속이면서 속으로는 도망칠 궁리를 했을 아내의 말간 얼굴을 떠올리자 시린 이성이 돌아왔다.
그래. 이대로 놓아줄 수는 없지. 이즈카엘은 천장을 바라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어디로 갔던 꼭 찾아내리라. 그리하여 아내에게 누구 곁에 있어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 주리라.
짹짹.
문뜩 그의 귓가에 새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탁자 위 새장에 갇힌 파란 새가 보였다. 작은 새는 갑갑한 모양인지 부리로 새장을 쪼고 있었다.
성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의 눈동자를 닮은 푸른색이 눈에 띄어 단숨에 붙잡은 새였다. 알을 품고 있었는지 그가 손을 뻗었음에도 둥지에서 꼼짝하지 않던 새는 쉽게 그의 손에 잡혔다.
여린 생명체에 시선을 둔 그가 천천히 일어났다.
‘수컷은 날개 끝 붉은 깃이 아름답지요. 하지만 암컷 또한 특유의 파란색이 아름다워 인기가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야생성이 짙어 애완조로 길들일 수는 없지만 박제해 장식용으로 많이들 두시지요.’
이즈카엘은 지저귀는 새를 바라보다 새장에 손을 넣었다. 커다란 손이 불쑥 들어오자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새장은 날갯짓 두어 번에 막힐 정도로 좁았으며 이즈카엘의 손은 크고 빨랐다.
이즈카엘에게 잡힌 새가 빽빽 울었다. 지저귀는 것이 아닌 도움을 청하는 듯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을 갈랐다. 작은 부리로 제법 빠르게 쪼아 대는 몸짓이 사나웠으나 이즈카엘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새의 날개를 지긋이 노려보다 말했다.
“다치게 하지 않아. 그저 곁에 있었으면 할 뿐이야.”
* * *
“에르젠, 이제 그만 자야지.”
헤레이스의 말에 에르젠이 고개를 저었다. 침대에 누워 어미를 빤히 보는 아이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시간이 늦었어요. 일찍 자야 내일도 일찍 일어나 놀지.”
“싫어, 엄마랑 더 놀 거야.”
아이는 평소와 달리 칭얼거렸다. 더듬더듬 느리지만 의사 표현을 하는 아들의 모습에 헤레이스는 왈칵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아들의 이마에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세 밤 뒤에. 세 밤 자고 나면 하루 종일 에르젠하고 놀아 줄게. 우리 아들은 착하니까 이번 한 번 엄마 부탁 들어줄 수 있지?”
에르젠은 그제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실망 가득한 눈은 여전하여 헤레이스는 시큰거리는 눈가를 계속해서 눌러야 했다.
“엄마, 에르젠 옆에 있어.”
에르젠은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뜨며 헤레이스가 제 곁에 있는 걸 확인하더니 한참 만에 잠들었다. 헤레이스는 에르젠이 고른 숨을 내쉬는 걸 바라보다 안타까운 얼굴로 이불을 여며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선 헤레이스가 문을 닫고 등을 기댔다. 저절로 한숨이 나오며 참아 왔던 눈물이 쏟아졌다. 헤레이스는 새어 나온 눈물을 소매로 재빠르게 닦고 안나가 있을 부엌으로 몸을 움직였다.
“저 혼자 할 수 있는데……. 그냥 도련님하고 같이 계시지.”
“아니야. 같이해야지. 혼자 하면 밤을 꼬박 새야 하잖니.”
상황을 짐작한 안나가 헤레이스를 보며 말했다. 소매로 닦았다지만 붉어진 눈가는 선명했다. 헤레이스는 애써 웃으며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 낡은 나무 의자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끌렸다.
“그래도 이번 일을 끝내면 당분간은 여유로울 거예요.”
탁자 위에는 여러 종류의 실과 천이 늘어져 있었다. 헤레이스는 바구니에 담긴 실패를 꺼내 들고는 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바늘을 집어 들었다. 자수틀에는 신전의 문양과 함께 아름다운 백합이 정교히 수놓아져 있었다.
“그래. 율리나 사제님께서 넉넉하게 값을 쳐준다고 하셨으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좀 쉬자. 날씨도 추워지고 곧 겨울이 올 텐데 몸 건강히 지내야지.”
“그러고 보니 벌써 겨울이네요. 쉬는 것도 잠깐이겠어요. 준비된 것도 없는데. 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