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그 사람한테 뭐라 말씀하신 거예요!’
에르나가 남몰래 밖에 나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리 행동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비로 인해 밖에 나가지 못하는 어미에게 꽃을 꺾어 주기 위해서, 세상을 알려 주기 위해서. 그게 전부였다.
‘미안해. 하지만 난…….’
‘제발…… 제발 이러지 말아요.’
‘……당신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아.’
줏대 없던 외지 청년은 빌의 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에르나를 믿지 못하고 올 때처럼 훌쩍 떠났다. 메모 한 줄, 인사 한마디 없었다.
‘아아아악!’
떠난 이와 보낸 짧은 시간이 에르나에게 전부였다. 그녀는 자신과 어미를 지옥에서 꺼내 줄 거라 믿었던 사내와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 이보게, 빌 할아범. 에르나가…….’
청년이 떠나고 얼마 안 가 아우뉴 호수에 새파란 시체가 떠올랐다. 에르나의 뺨은 물에 젖었음에도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얼어붙은 손끝은 또 어찌나 시퍼런지. 사람들은 그녀의 슬픔이 온몸에 배다 못해 박혔다 말했다.
‘그러려던 게 아니야. 난 그저…… 그저…….’
딸의 죽음에 빌은 절망했다. 10년 이상 자식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아이였건만 죽으니 그렇게 사무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그보다 더한 고통에 빠졌다. 남편이 만든 지옥 속에서 딸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던 여인은 절규하고 또 절망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아이고, 빌. 이를 어쩌면 좋소. 자네 안사람이 그만…….’
딸아이의 무덤가에서 목을 맸다. 차디찬 땅에 딸을 묻은 지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 아으…… 아…….’
빌은 제 손으로 만든 비극에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을 쥐어뜯었다. 아내와 딸, 두 사람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후회한들 무얼 하나. 이미 그의 곁에는 아내도, 딸도 남지 않았다.
늙은 어부는 한동안 정처 없이 배를 탔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은 채 노를 젓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이러다 물귀신이 나타나는 게 아니냐며 속닥거렸다.
‘……나를 용서해 주오.’
어느 이른 새벽, 빌은 여느 때처럼 배를 타고 아우뉴 호수로 나갔다. 그리고 그는 아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올가미를 목에 건 채 딸아이처럼 시퍼런 호수로 뛰어들었다.
풍덩.
깊은 물은 늙은 어부를 한 번에 삼켰다. 하나 사내의 죄악과 후회는 너무도 깊어 호수가 품어 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빈 배는 홀로 끼익끼익 움직이며 간혹 호수를 떠돌았다.
* * *
한시가 급한 와중 왜 그러했는가. 이즈카엘은 늙은 어부의 죽음에 대해 왜 잠자코 듣고 있었는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쓸데없이…….’
시간 낭비였다 생각해도 마음 한구석은 이상하리만치 불편했다. 결국 참지 못한 그가 인상을 구긴 채 아우뉴 호수를 노려보다 씹어 짓이기듯 말을 뱉었다.
“헤레이스, 난 그처럼 멍청하지 않아. 그러니 당신은…… 날 떠날 수 없어.”
섬뜩한 낯이 당장에라도 호수를 가르고 아내를 잡아 제 앞으로 끌어낼 것만 같았다.
바로 곁에서 주군을 바라보던 에드가가 흠칫 놀라 물러섰다. 흑마도 주인의 살기 어린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부르르 거대한 몸을 떨었다. 그러나 원흉인 이즈카엘은 인상만을 구길 뿐, 주변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즈카엘이 고삐를 당겨 말머리를 틀었다. 이쪽 마을은 샅샅이 둘러봤으니 다음 장소로 향할 차례였다. 그가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찼다.
“이랴!”
흑마가 달리기 시작하자 뒤이어 에드가를 포함한 기사들도 따라 움직였다. 말 무리가 움직이며 건조한 땅이 울리고 흙먼지가 일었다. 아내를 향한 사내의 집요한 추격이 다시금 시작됐다.
* * *
세르펜스 성안은 살얼음판과 다름없었다. 모두 물 밖으로 나온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지만 이게 숨긴다고 숨겨질 일인가.
안주인과 그 아들이 사라진 지 어언 두 달, 성안은 찬바람이 부는 바깥처럼 조금의 온기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음…… 괜찮네.”
하지만 단 한 사람에게만은 지금이 봄날이나 마찬가지였다. 샬럿은 창 너머 꽁꽁 얼어붙은 아우뉴 호수를 바라보며 곱게 웃었다. 금반지가 반짝이는 그녀의 손에는 금테를 두른 우아한 찻잔이 들려 있었다. 샬럿이 호록 소리와 함께 차를 들이켜며 물었다.
“그이는? 아직도 언제 온다 말이 없어?”
“예.”
여유 만만한 샬럿과 달리 곁에 선 하녀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방 여기저기를 훑어본 하녀가 차를 마시는 상전 몰래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러다 나한테 불똥이라도 튀면…….’
하녀의 불안감은 현재 그녀가 서 있는 방에서 기인했다.
반짝일 정도로 청소된 방은 우아했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커튼과 벽지는 조화를 이루지 못했고, 잔뜩 늘어져 있는 장식품들은 하나하나 화려하고 귀한 것이었지만 어딘가 너저분했다. 특히 방구석에 자리한 호화로운 화장대는 어찌나 휘황찬란한지, 방과 전혀 어우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다른 방에 있던 것이었으니.
‘이제부터 여기서 지내야겠어.’
샬럿은 이즈카엘이 성을 비우기가 무섭게 헤레이스가 기거했던 방이자 공작 부인의 방으로 제 물건들을 옮기라 명했다. 너무도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사용인들은 이즈카엘의 허락이 있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수준하고는. 이따위 물건으로 어떻게 치장을 해. 당장 치워 버리고 저 방에 있는 거로 가져와.’
샬럿이 주인 잃은 화장대를 아무렇게나 밀치며 방을 헤집는 모습에 사용인들은 당황한 얼굴을 했지만, 주인도 자리를 비운 시기인지라 그 누구도 먼저 나서서 무어라 말리지는 못했다. 출신 성분이 어떻든 그녀는 이제 주인의 유일한 여인이자 공작가의 고귀한 아이의 어미였다.
그나마 뒤늦게 사실을 안 노집사가 뛰어 올라왔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헤레이스의 방은 엉망이었다. 두 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방 안 커튼은 모조리 내려졌으며, 주인의 정취가 담겨 있던 카우치와 화장대, 작은 탁자 그리고 장식품 등은 복도 구석에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경악한 노집사는 침착한 그답지 않게 붉어진 얼굴로 물건을 옮기는 하인들을 쫒아냈다. 그리고 방문을 막아선 채 샬럿에게 단호히 말했다.
‘절대 안 됩니다. 주인님의 허락이 있기 전까지 이 방에 출입하시는 건 불가합니다.’
‘비켜! 늙은이가 뭘 착각하는 모양인데, 이제 난 이 성 안주인이야. 그러니 이 방도 당연히 내 것이지.’
샬럿은 얼굴을 팍 구기며 노집사에게 대거리를 했다. 하지만 규율을 엄격히 여기는 노집사는 만만찮았다. 그는 독기 서린 샬럿의 눈에도 꿈쩍 않은 채 문지기처럼 꼿꼿이 섰다. 그리고 샬럿을 향해 뼈 있는 말을 뱉었다.
‘이 방은 대대로 공작 부인께서 쓰시던 방입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안주인도, 공작 부인도 아니시지요.’
‘뭐? 아가씨? 이 늙은이가!’
아가씨라는 단어에 샬럿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화를 참지 못한 그녀는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장식용 도자기를 집어 들더니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내던졌다.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노집사가 허리를 굽히며 쓰러졌다. 놀란 사용인들이 재빨리 달려가 그를 부축했지만 노집사는 피를 흘리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뭣들 해! 빨리 옮기지 않고!’
‘집, 집사님.’
‘누가 그 늙은이 옮기래! 이 물건들 옮기라고!’
샬럿은 자신을 막는 유일한 이가 사라지자 사용인들을 닦달해 제 뜻대로 헤레이스의 방을 꾸몄다. 그리고 본래 제 것이었던 것처럼 헤레이스의 물건을 평가했다.
바로 지금처럼.
“쓸 만한 거라고는 없네. 하나같이 구질구질해서는. 그래도 공작 부인이 썼던 거라 써 주려 했더니…… 그이가 돌아오면 이런 것부터 바꿔야지.”
샬럿은 차를 마신 뒤 찻잔 여기저기를 뜯어보다 손을 아무렇게나 놓았다. 우아한 곡선을 자랑하던 찻잔이 찰나 허공을 날더니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쨍그랑!
찻잔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산산이 조각났다. 놀란 하녀가 저도 모르게 샬럿을 바라봤다. 하지만 샬럿은 무얼 보냐는 듯 날카로운 눈초리로 하녀를 노려보다 턱짓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뭐 하고 서 있어. 치우지 않고.”
샬럿의 말에 하녀가 몸을 움찔거리다 몸을 굽혀 깨진 사기 조각을 줍기 시작했다.
샬럿은 미소를 지은 채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하녀를 내려다봤다. 다른 이들을 부리며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을 수 없었다. 과거 별것도 아닌 이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모욕할 때마다 얼마나 분했던가.
샬럿이 제 심기처럼 꼬았던 다리를 풀고 하녀의 등을 툭 밀쳤다.
“앗!”
균형이 무너지며 하녀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 깨진 사기 조각 하나가 하녀의 손바닥을 스치며 피를 냈다. 샬럿은 울상 짓는 하녀의 옆얼굴을 보다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프니?”
하녀가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눈망울에 담긴 긍정을 읽지 못할 샬럿이 아니었다. 그녀가 턱을 괸 채 얄밉게 속삭였다.
“어쩔 수 없잖아. 넌 천한걸. 나하고는 달라.”
깔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녀의 얼굴이 억울한 듯 굳어졌지만 알 게 뭐란 말인가. 샬럿은 빨리 치우라는 듯 손을 내젓고는 눈을 감았다. 조금 전처럼 큰 웃음은 아니었지만 간헐적으로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게 진짜 내 삶이야.’
밖의 날씨와 상관없는 따뜻한 온기, 편안한 카우치, 그리고 대신 일해 주는 이들.
샬럿은 손가락에 자리한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카우치에 편히 몸을 기댔다. 하지만 몸이 편안해지자 잠깐 넣어 뒀던 걱정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도망치다 콱 죽어 버리면 좋을 텐데.’
샬럿은 헤레이스의 방을 차지해 기분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상황이 제게 마냥 유리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사내는 도망친 아내를 쫓아 거의 두 달 가까이 성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이유가 어찌 되었건 사내가 아내에게 집요하리만치 집착하고 있음을 방증했다.
‘이미 죽은 게 아닐까. 그게 아니면 지금까지 찾지 못한 것이 말이 안 되잖아.’
마지막으로 봤던 사내의 얼굴이 생각났다. 붉은 피를 뒤집어쓴 사내는 그 불길한 액체만큼이나 흉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핏발 선 눈, 누구라도 당장 베어 넘길 듯한 살기……. 누가 보면 도망친 아내를 잡으러 가는 게 아니라 일평생의 원수를 죽이러 가는 줄 알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