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5장. 도주
늙은 어부가 물가에 배를 대며 허리를 쭉 폈다. 밤새 노를 저어 힘들 법도 하건만 그는 나이답지 않게 피곤한 기색 없이 멀쩡했다.
“이만 내리는 게 좋을 듯싶소만. 이쯤 왔으면 나도 이제 돌아가 봐야지.”
헤레이스가 아슬아슬 균형을 잡은 채 배에서 내렸다. 그녀의 품에 안긴 에르젠은 실컷 잤는지 작은 입을 벌려 하품을 하고는 또렷한 눈으로 어미를 쳐다보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아들과 눈을 마주하곤 배시시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히 왔어요, 저…….”
아들을 추스른 헤레이스가 안나에게 눈짓했다. 헤레이스의 신호에 안나가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더니 어부에게 금화 세 개를 내밀었다. 반짝이는 금화를 본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다시 제 크기로 돌아왔다.
“이것도 과하오.”
노인이 금화 한 개를 집어 들고는 손을 내저었지만 안나는 한 번 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금화 세 개라는 후한 값을 치른 데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비밀을 지켜 주셔야 해요. 누가 묻더라도 저랑 부인이 여기서 내렸다 말하시면 안 돼요. 그러니 이거마저 받으시고…….”
“그건 걱정 마오. 나나 집에 있는 이나 사람 만날 일은 없으니.”
노인이 안나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한 발 물러난 모습에 안나가 헤레이스를 쳐다봤다.
헤레이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가 나머지 금화를 주머니 속으로 넣더니 품 안에 소중히 갈무리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생길지 모르는데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저리 큰길을 따라가면 마을이 있을 거요. 작아도 이 근방의 중심지라 마차도 다니고…… 여러모로 편할 테지.”
계산이 끝나자 늙은 어부가 저 멀리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헤레이스는 노인을 따라 길을 보다 그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려 에르젠을 고쳐 안았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
하지만 인사는 이어지지 못했다. 이상한 기시감이 헤레이스를 자극한 탓이었다.
늙은 어부의 깊고도 탁한 눈과 자글자글한 주름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쭈뼛 소름이 돋았다. 헤레이스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서 아들을 꼭 안았다. 갑자기 가해진 힘에 에르젠이 옹알이를 하며 몸을 틀었다.
“……그럼 몸조심하시구려.”
노인은 헤레이스와 에르젠을 물끄러미 보다 들고 있던 노로 땅을 슬쩍 밀쳤다. 반동에 배가 미끄러지듯 호수로 들어가더니 금세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가씨, 어서 가요. 빨리 움직여야지요.”
멍하니 배를 보고 있던 헤레이스는 안나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점이 되어 가는 늙은 어부를 다시 한번 보고는 몸을 돌렸다.
안나의 말대로 한시가 급할 때였다.
* * *
늙은 어부는 노를 젓다 말고 손바닥 위 금화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무얼 사 가면 나를 용서하려나.”
평생 손에 꼽히게 잡아 본 금화였다. 차가운 감촉이 자주 만지던 구리 동전과 달랐다.
“눈 딱 감고 다 받을 걸 괜히 오기를 부린 게 아닌가 모르겠구먼.”
그같이 날 때부터 가난한 이에게 떨어지는 돈이라고는 항상 동전 몇 푼이 전부였다. 노인은 지문마저 닳아 버린 손가락으로 한참 동안 금화를 만지작거렸다. 이것으로 집에 있는 이가 좋아하는 사슴 고기를 살 수 있었다. 그뿐인가? 남는 돈으로 그이에게 줄 고운 옷감도 손에 넣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멀리 시집갈 딸아이에게도 얼마간 보태 줄 수 있겠지.
늙은 어부가 힘차게 노를 저었다. 배가 뿌연 아침 안개 속으로 사라지며 노인의 인영도 그에 따라 스르르 희미해졌다.
“기다려만 주오. 지금 가고 있으니…….”
형체 없는, 회한 가득한 목소리가 호수 위를 맴돌았다. 그리고 동시에 무언가 떨어지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짤그랑.
빈 배가 호수 위에서 흔들렸다. 덩그러니 남겨진 배 위에 남은 거라고는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는 노와 반짝이는 금화 한 닢뿐이었다.
* * *
사내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와 같은 무지렁이가 평생 가도 멀리서만 볼 이가 바로 눈앞에 있는 탓이었다.
“근방에 늙은 어부가 있나? 있다면 어디에 살지?”
핏발이 서 붉은 눈이 흉흉했다. 바짝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에 사내가 덜덜 떨며 간신히 입을 뗐다. 하지만 때마침 이즈카엘의 흑마가 사납게 콧김을 뿜었다.
“이, 이 근처에는…… 히익!”
“……답답하군.”
놀란 사내가 뒤로 넘어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즈카엘은 바닥에 붙어 말조차 제대로 못 하는 촌부를 노려보다 바로 뒤에 있는 에드가를 향해 손짓했다. 에드가가 말에서 내려 사내에게 다가갔다.
“공작 각하의 앞이다. 똑바로 말하라.”
이즈카엘 일행은 헤레이스의 흔적을 쫓아 아우뉴 호수까지 왔다. 그리고 어젯밤 늙은 어부가 작은 배에 여인 둘과 아기 하나를 태워 가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담을 듣고, 아우뉴 호수 근방에 나이 든 어부란 어부는 다 찾고 있는 참이었다.
“이 근처에는 늙은 어부라 불릴 사람은 없습니다. 빌 할아범이 있긴 했지만 그, 그는…….”
“빌 할아범?”
에드가가 빨리 말하라는 눈짓으로 사내를 재촉했다. 뒤에서 듣고 있던 이즈카엘의 눈도 한층 사나워졌다.
사내는 말 위에 있는 이즈카엘을 차마 마주 보지 못했다. 그가 흑마의 거대한 말굽과 그 위 뻗은 다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힘겹게 말을 이었다.
“빌, 빌 할아범은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딸아이를 잃고 자결한 부인을 따라갔습죠. 흔, 흔치 않은 일이라 제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무렴요.”
* * *
빌은 아우뉴 호수의 어부였다. 그는 30년 이상 홀로 살며 매일같이 배를 타고 그물을 쳤다.
‘이 나이에 결혼은 무슨…… 난 그냥 이리 살 거요.’
그는 혼자인 게 편한 사람이었다. 조부와 단둘이 살다 열댓 살 무렵부터 혼자가 된 그는 여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 누구에게나 신이 정해 준 짝이 있다고 했던가.
‘이보시오! 이보시오! 정신 좀 차려 보오!’
어느 늦봄, 여느 때처럼 그물을 치고 있던 빌의 눈에 외지 여인 하나가 흘러들어 왔다. 물을 잔뜩 먹었는지 여인의 배는 몸에 비해 부풀었고 얼굴은 호수만큼이나 새파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전설 속 세이렌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빌은 한동안 고기 잡는 것도 포기한 채 여인을 돌봤다. 그가 외지 여인 하나를 주워 애지중지 챙긴다는 말에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젊은 애들이 쫓아다녀도 거들떠보지 않을 얼굴이더구먼.’
‘벌써 그 여인네를 짝사랑한다는 청년만 몇이에요.’
외지 여인은 누가 보더라도 아름답다 말할 만했다. 게다가 그녀는 한창때의 젊은 여인이었다. 어떤 기구한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빌 같은 나이 많은 사내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모두들 여인이 건강을 되찾으면 빌을 떠나거나 다른 사내에게 갈 거라 여겼다.
하지만 외지 여인은 몸을 추스른 후에도 빌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빌을 도와 그물을 짜고 낚시 나간 그를 대신해 집안을 챙겼다. 그러길 몇 년, 여인은 자연스레 빌의 아내가 됐다.
‘수고했어. 수고했구려.’
‘……이, 이름은 에르나로 해요.’
젊은 아내 덕에 빌은 늘그막에 딸 하나를 두게 됐다. 에르나라는 이름에 어미를 닮은 아주 예쁜 아이였다.
‘어디 빌을 닮은 구석이 있나요. 나이 먹은 빌이 어떻게 저런 아이를 낳겠소.’
‘에르나가 팔삭둥이라잖아. 어디서 들은 말인데 애초에…….’
그러나 어미를 닮아 예쁘장한 외모가 문제였을까.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무렵, 동네에는 은밀한 소문이 돌았다. 에르나가 빌의 아이가 아니라는 삿된 소문이었다.
빌은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때 아니라고 부정하며 펄펄 뛰었다. 하지만 소문은 날이 갈수록 부풀려졌고, 아내를 믿었던 그는 어느 순간 의심으로 서서히 미쳐 갔다. 빌은 아내가 이웃집 남자와 이야기만 해도 벌컥 화를 냈다.
‘어딜 밖으로 나돌아 다녀! 망할 것!’
쨍그랑!
의심이 의심을 낳았고 폭언이 폭력으로 변했다. 어느 순간부터 빌에겐 에르나의 친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늙은 어부는 자신보다 잘난 사내가 아름답고 젊은 제 아내를 훔쳐 갈까 봐 전전긍긍 두려워할 뿐이었다.
빌은 굳은살 박인 손으로 고운 아내를 자주 내리쳤다. 밝고 아름다웠던 여인은 어느새 멍을 달고 사는 가여운 여인이 되고 말았다. 단란했던 호숫가 오두막에는 매일같이 무언가 깨지고 비명을 지르며 아이가 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고, 에르나. 너 괜찮으냐? 빌, 네 아비가 또 지랄하지는 않던?’
‘예. 오늘은 괜찮아요, 아주머니.’
아이가 자라고 여인이 집 밖에 나서지 않게 되면서 폭력은 점차 줄어들었다. 하지만 오두막의 울타리는 날이 갈수록 견고해졌다. 이웃에게 가끔 얼굴을 비추던 여인은 어느새 이웃마저 보기 힘든 이가 돼 있었다.
그래도 세 사람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었다. 비록 구속으로 만들어진 아슬아슬한 관계였지만 빌은 만족했고 여인은 체념했다. 그리고 에르나는 어느새 자라 저 멀리 타지에서 온, 자신을 마음에 둔 청년과 결혼을 약속했다.
‘엄마, 그 사람은 아버지랑 달라. 그 사람이랑 어느 정도 터를 잡으면 내가 엄마를 부를게. 아버지 말고 나랑 살아. 알았지?’
아이에서 여인이 된 에르나는 어릴 적과 다르게 자주 웃음을 지었다. 그 예전 자신의 어미처럼 아름답고 밝게.
하나 빌은 딸아이가 행복해지는 게 못마땅했다. 아니, 사실 그는 딸아이가 제 어미에게 속삭인 말에 분통이 났다.
‘내 씨도 아닌 걸 거둬 줬더니 건방진 계집애가…….’
눈이 뒤집힌 그는 자신과 같은 사내를 만들 수 없다며 자신에게 명분을 쥐여 줬다. 그리하여 그는 술에 잔뜩 취한 채 딸과 결혼할 사내를 불러 제 의심을 그에게 나눠 줬다.
‘에르나, 저 아이는 내 딸이 아니야.’
‘……예?’
‘더러운 제 어미가 어디서 몸 굴려 얻은 아이지.’
‘그, 그런 말은…….’
‘자네가 마음에 들어 하는 말이네만 에르나, 저 아이와 영원히 함께할 자신이 있나? 저 아이, 자네와 만나기 전에도 제법 사내가 있었지. 꼭 제 어미처럼 말이야. 날마다 밖으로 나다녔어.’
‘…….’
‘잘 생각하게. 아니면 나처럼 불행해질 거야. 더러운 여자를 끼고 살며 영영 이 꼴로 살 거라고. 의심하고 또 미워하겠지. 하지만 놓을 수도 없어. 왜냐? 자네가 에르나에게 말하는 것처럼 나도 저 여편네를 사랑하거든.’
‘…….’
‘……어떤가? 나처럼 한번 살아 보겠나? 자신 있어?’
빌은 외출이 잦았던 딸아이를 그렇게 흉봤다. 그 어미에 그 딸이라고, 너를 만나기 전에도 사내가 있었노라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