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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30화 (30/108)

30화.

“공작 각하! 의원은 어디 있나! 당장 오라! 당장!”

에드가는 쓰러진 이즈카엘을 업고서 고함을 질렀다. 주변에 있는 기사와 병사들이 의원을 찾으려 허둥지둥 움직였다.

이틀 만에 모습을 드러낸 이즈카엘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병영 입구에 다다랐을 때 말에서 떨어진 그는 몸이 온통 피투성이인 데다가 등에는 여러 대의 화살을 맞은 후였다. 전쟁에서도 보인 적 없는 상전의 모습에 에드가는 그답지 않게 당혹감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각하! 정신 차리십시오! 너희는 의원을 부르고 근처를 방비하라! 적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에드가는 이즈카엘의 등에 박힌 화살 깃이 붉은 것을 기억하고는 입술을 물었다. 이는 분명 야만인들의 화살이었다.

‘이 주변은 거진 다 소탕했는데…….’

공작이 야만인들을 어디서 마주쳤는지, 어쩌다 이리 다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 이즈카엘에게서 흘러나온 피는 벌써 에드가의 등을 축축이 적셨다.

“정신을 차리십시오. 이대로 눈을 감으시면 안 됩니다.”

굳건하기로 유명한 사내의 목소리가 두려움으로 덜덜 떨렸다. 하지만 업혀 있는 이는 이미 정신을 잃은 듯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 * *

시야가 가물가물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저 앞 촛불을 바라보던 이즈카엘은 엄청난 고통에 고개를 밑으로 꺾었다.

“허억!”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폐를 다쳤는지 공기가 들어가다 어디론가 새어 버렸다. 이즈카엘은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제 옆구리를 붙잡았다. 피가 새어 나와 허리에 단단히 감겨 있는 흰 붕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즈카엘의 눈에 제 상처는 들어오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 사이에서도 또렷한 저것은 무엇인가. 작은 들짐승 크기의 검은 덩어리가 그의 옆구리에 붙어 쭉쭉 무언가를 빨아 먹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고통에 흐려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는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네, 네놈은…… 으윽…… 뭐지?”

「참 빨리도 묻는구나.」

눈도, 코도 없는 것이 입은 있는지 이빨을 드러내며 답했다. 몸체와 같은 검은 이는 보기만 해도 베일 듯 날카로웠다.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에 이즈카엘이 재차 물었다.

“뭐냐 물……었어. 분명 그때도…….”

「답해 주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 제일 중요한 것부터 물어볼게. 살고 싶어?」

“무, 무슨……. 으윽!”

「너도 네 꼴을 보니 알겠지? 너 이대로면 곧 죽을걸. 아마 한 시간도 남지 않았지?」

검은 것을 떼어 내려 손을 뻗었지만 만져지는 건 피가 흐르는 옆구리뿐, 검은 물체는 연기처럼 흩어지다 다시 형체를 만들었다. 이즈카엘은 눈을 어떻게든 치켜뜬 채 잡히지 않는 그것을 노려봤다. 생긴 것도 불길한 저것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흉측한 것임을 이즈카엘은 이미 숱한 경험으로 알았다.

‘또다시 저것에 홀려서는…….’

숨을 가쁘게 몰아쉰 이즈카엘이 인상을 찌푸린 채 상처를 눌렀다. 무시해야 했다. 어떻게든 홀로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그의 가장 약한 곳을 찔렀다.

「고민할 필요 있나?」

“…….”

「네가 죽으면 네가 사랑하는 네 아내는 즉시 불행해질 텐데? 알잖아. 그녀의 처지가 어떤지. 하나뿐인 바람막이를 잃게 되면 그녀는 아마도…….」

눈앞이 어질해지며 헤레이스가 흐르는 물처럼 그려졌다.

나신의 그녀 곁에는 수많은 사내의 손이 있었다. 천을 꼭 쥔 그녀가 우는 얼굴로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무지막한 손들은 상관없다는 듯 그녀를 향해 뻗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녀를 누른 채 마음껏 희롱했다. 말을 건네고 있는 목소리 또한 그 장면이 보이는지 안타까운 탄식을 지르며 이즈카엘에게 말했다.

「어느 사내 품으로 들어가거나 여러 사내의 품에 안기겠지? 모두 기쁘게 그녀에게 손을 뻗을 거야. 그리고…….」

“닥쳐!”

환상임을 알아차렸음에도 눈에 핏발이 섰다. 당장 저치들을 죽여 없애야 했다. 헤레이스에게, 그의 아내에게 손대는 저 손들을 다 베어 내고 잘게 다져 버려야 했다.

이즈카엘이 검을 찾으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그는 침대 아래 검조차 집을 수 없었다. 피를 과하게 흘린 몸은 고함 한 번에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커억!”

「성질하고는……. 그래서 묻잖아. 살려 줘?」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죽음이 코앞에 다다랐음이 느껴졌다. 느리게 멎어 가는 심장. 거의 들리지 않는 귀와 점차 흐려지는 눈.

“헤레이스…….”

내 아내……. 신음과 함께 아내를 부른 이즈카엘이 절망에 휩싸여 목소리를 쥐어짰다. 결국 그가 제 몸에 붙어 있는 그것을 향해 비참하게 애원했다.

“……살려 줘. 나를…… 흐윽! 살려…… 줘.”

「아…….」

만족스러운 듯 목소리가 길게 신음을 뱉었다. 그것이 길게 늘어나더니 뱀처럼 이즈카엘의 몸을 타고 기어올랐다. 꼿꼿이 대가리를 치켜든 그것에게는 그새 눈이 생겨 있었다. 이즈카엘과 같은 금안. 같은 색의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 봤다.

「그래. 살려 줄게. 하지만 처음 널 도왔을 때처럼 대가 없이는 안 돼. 난 원래 자비를 베푸는 성미가 아니거든. 물론 이미 값을 조금 치르긴 했다만…….」

뱀의 꼬리가 피 흐르는 옆구리를 살살 쓸었다. 붕대에 번지다 못해 아래로 흐르던 피가 꼬리 끝에 역류하듯 빨려 들어갔다. 점점 몸체를 키우던 뱀이 이즈카엘의 얼굴 가까이에 제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그것만 받기에 네 목숨값으로 부족할 것 같아.」

“뭘…… 원하나.”

어떤 대가를 지불해도 좋았다. 아내의 곁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자신 외 그 누구도 그녀의 곁에 있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이즈카엘의 마음을 읽은 듯 그것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혀를 날름거렸다. 이즈카엘은 그것이 저를 비웃고 있음을 확신했다.

「네가 무사히 아내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줄게. 대신 네 기억의 일부만 내게 주렴.」

“……기억?”

「많이 가져가지 않아. 하루도 채 되지 않는 기억일 뿐이야. 사실 엄청 값싼 거 아니야? 목숨값인데?」

기억. 이상한 대가였다. 이 불길한 것의 말처럼 너무도 싼 대가 같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즈카엘은 함부로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깊은 의심이 걸쇠가 되어 그의 행동을 막아섰다.

「이런…… 의심이 많구나. 하지만 내가 그 기억을 가져가면 넌 훨씬 편해질걸. 죄악을 잊는 셈이거든.」

이즈카엘의 의심을 눈치챈 듯 그것이 낮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실마리를 흘렸다. 그제야 그것이 원하는 기억이 무엇인지 깨달은 이즈카엘은 주먹을 쥐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고통과 죽음 앞에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것들이 떠올랐다.

“네놈……!”

「그렇게 노려보지 마. 얼마 안 남은 시간이 더 빨리 갈지도 몰라. 그리고 이건 호의 아냐? 잊게 해 주겠다는 건데? 그 일의 목격자조차 너밖에 없었으니 네 기억이 사라지면 그 일은 영영 비밀로 남겠지.」

어찌 그 일을 잊을 수 있겠나.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즈카엘은 눈앞에서 맴도는 헤레이스의 얼굴을 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자신은 돌아가야 했다. 그녀의 곁으로…….

“좋……아. 네 뜻대로…… 크윽! 하, 하지만 헤레이스만은…… 그녀가 담긴 기억만은 안 돼. 그녀의 일부라도 잊을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오, 세상에. 아이야, 넌 정말 날 놀라게 하는구나.」

“…….”

「좋아. 그녀의 모습이 담긴 기억은 어떤 것도 건드리지 않겠어. 하지만 그러면 저울추가 다시 너무 기우니까…….」

“…….”

「대신 내가 껍데기를 얻고 네 곁에 머무는 데 도움을 줘. 그리고 이번 계약 조건을 잊겠다 맹세해. 나도 작은 재미는 봐야지. 어때? 동의하겠어?」

늘어나는 대가에 따지고 싶었으나 이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즈카엘은 서서히 감기는 눈꺼풀을 밀어내며 마지막 힘을 짜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뱀의 모습을 한 그것이 안개처럼 흩어지더니 그의 몸 전체를 감쌌다.

「좋아, 이즈카엘. 메데아의 아이야…….」

울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이즈카엘은 눈을 감았다. 죽음과도 같은 수마가 그를 집어삼켰다.

「……값을 치렀으니 넌 네 아내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갈 거야.」

* * *

에드가와 의원은 놀란 눈을 한 채 앞을 바라봤다. 어제 새벽까지만 해도 죽어 가던 그들의 주군은 어찌 된 영문인지 막사 안에서 멀쩡히 앉아 검을 닦고 있었다.

그의 앞에 떨어져 있는 붕대는 새것처럼 깨끗했다. 분명 감아 줬을 때부터 피가 스며들었는데……. 의원과 에드가의 눈이 저절로 상전의 허리에 닿았다. 하지만 헐렁한 상의 때문에 그들이 찾는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던 의원은 에드가가 자신의 허리를 찌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가 이즈카엘에게 한 발 다가서며 본분을 다하려 했다.

“각하, 잠시 상처를 보겠습니다.”

“필요 없다.”

하지만 이즈카엘은 다가오지 말라는 듯 손짓을 했다.

“넌 나가 보고. 에드가.”

의원이 무어라 재차 말하려다 주군의 시린 눈에 고개를 숙였다. 의원이 막사 밖으로 나간 후에야 에드가는 간신히 답했다.

“……예, 각하.”

“그 계집을 불러와.”

갑자기 내려진 명에 에드가가 답하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알아듣지도 못하겠거니와 계집이라니. 눈앞에 있는 자신의 주군과 가장 먼 단어가 그것 아닌가.

“계집이라 하시면…….”

어울리지 않게 우물거리던 에드가가 한참 만에 반문했다. 그러자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검을 닦고 있던 이즈카엘이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그리고 순간 에드가는 알았다. 자신의 주군이 어딘가 바뀌었다는 것을.

소름 돋는 감각이 척추를 타고 흐르더니 온몸을 잠식했다. 공포에 질린 에드가가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반걸음 물러났으나, 이즈카엘은 여전히 무감한 얼굴로 금안을 빛내더니 다시 한번 명했다.

“저번 토벌 때 내 막사를 침입했던 계집 말이야. 그 계집을 이리로 데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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