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파랑새…….’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는 파랑새를 수놓고 있었다. 거의 완성된 새의 모습에 이즈카엘은 눈을 떼지 못했다.
어릴 적보다 더 정교해진 솜씨는 파랑새를 당장에라도 날려 보낼 듯 생동감 있게 그려 냈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싶더니 이내 가위를 집어 들었다.
찌익.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자수에 가위가 박혔다. 이즈카엘의 얼굴이 굳어졌다. 헤레이스는 화풀이하듯 몇 번 더 천을 찢어발기다 바닥에 자수틀을 던지듯 놓았다. 그리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뒤로 조금 돌렸다.
“……나는 당신이 미워요.”
세르펜스 성에 온 뒤 헤레이스가 처음으로 이즈카엘에게 말을 걸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담긴 원망은 선명했다.
“반, 반역은 분명 큰 죄지만…… 그래도…….”
“…….”
“그렇다 해도 크리스를, 내 불쌍한 오빠를 그렇게 만든 건 당신이잖아. 샤, 샤를을……, 공작 부인을 그렇게 한 것도…….”
울음이 섞여 들기 시작한 목소리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샤를의 이름을 올렸을 때, 그의 금안은 일순이지만 위험한 빛을 띠었다. 손등을 비롯해 팔에 두드러진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공작 부인은 몰라도 샤를은 당신한테 잘해 줬잖아요. 나도…….”
“…….”
“……당신이 미워요. 하지만 역시 제일 미운 건 나야.”
“…….”
“당신을 구원자로 둔 내가 제일 미워. 싫어!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는 내가 제일 밉단 말이야!”
고함과 함께 여전히 손에 쥐어져 있던 가위가 위로 휙 올라갔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헤레이스는 세르펜스 성에 온 뒤로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낄 때면 가위나 바늘 등으로 간혹 스스로를 찔렀다. 보통은 손가락 끝을 살짝 찌르는 것에서 멈췄지만 이즈카엘이 자리하자 감정은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날뛰었다. 높다랗게 들린 손이 정확히 허벅지를 겨냥했다.
그러나 그녀가 예상했던 아픔은 없었다. 이즈카엘은 가위가 떨어지기 직전 헤레이스의 손목을 낚아채 잡았다. 사내의 힘에 손목이 살짝 비틀리자 손에서 가위가 스르륵 빠져나갔다.
이즈카엘이 바닥으로 떨어진 가위에 시선을 두다가 헤레이스의 앞에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진지한 표정의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가 느리게 팔을 올렸다.
“헤레이스.”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의 이름을 부르며 양손을 쥐자 헤레이스가 버둥거리며 발악했다. 이즈카엘은 감싸듯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결국 먼저 지쳐 떨어져 나간 건 헤레이스였다. 이즈카엘은 거칠게 숨 쉬는 그녀의 푸른 눈을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에게 죄를 지었어. 당신을 괴롭게 했음을 인정해. 하지만…….”
이즈카엘이 계속해서 헤레이스와 눈을 마주치며 바닥에 떨어진 가위를 집어 들었다. 날카로운 날이 예기를 뿌렸다. 헤레이스가 독기 서린 눈으로 이즈카엘을 바라보다 불안한 듯 가윗날을 응시했다.
“제발 당신을 다치게 하지는 마. 화가 나고 참을 수 없으면 차라리.”
그가 말을 흐리며 조금 전 헤레이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번쩍하고 금속에 햇빛이 반사되더니 피부를 찢는 소리와 함께 가위가 푹 하고 빗장뼈 아래쪽에 박혔다.
“……이렇게 하도록 해.”
어깨 주위가 금세 붉게 젖어 들기 시작하더니 곧 가윗날을 따라 뚝뚝 피가 떨어졌다. 놀란 헤레이스는 창백하게 질린 채 덜덜 떨다 한참 만에 비명을 지르듯 입을 열었다. 그녀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사내의 다친 어깨 부위를 맴돌고 있었다.
“왜……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사랑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와 달리 사내의 답은 담백했다. 사내가 당연하다는 듯 너무도 쉽게 사랑을 말하자 헤레이스가 기괴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 시선에도 이즈카엘은 손을 들어 헤레이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사내의 눈에는 감출 수 없는 감정이 가득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헤레이스. 내 삶의 중심은 당신이야.”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의 손을 뿌리치고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 사내는 미쳤다. 미친 게 분명했다. 아니라면…….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녀에게서 지금껏 눌러 왔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해서 당신의 마음이 풀린다면 언제든 찔려 줄게. 그러니 다시는 이런 짓 마.”
이즈카엘이 조심스레 그녀를 감싸 제 품에 안았다. 조금 전과 달리 헤레이스는 반항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아이처럼 더 큰 소리로 엉엉 울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꼭 기댈 구석이 필요하다는 듯 어리광을 부리는 모양새였다.
이즈카엘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그가 눈을 내리깐 채 품속에 담긴 여인의 등을 보다 천천히 쓸어내리듯 더듬었다.
울음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하지만 그날 이후 헤레이스의 말은 조금씩, 그러나 천천히 늘어나더니 안나가 성에 들어온 뒤로는 거의 예전만큼 돌아왔다. 이즈카엘은 그녀가 먼저 말을 걸 때마다 기쁜 낯을 숨기지 못했다.
* * *
“이즈카엘.”
이즈카엘은 드레스를 팔랑이며 제 이름을 부르는 아내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환한 미소가 그의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사랑해, 헤레이스.”
“갑자기 무슨 말을……. 나도 사랑해요, 이즈카엘.”
이즈카엘은 자신을 사랑한다 속삭이는 헤레이스를 마주 보며 지금을 영영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저지른 죄악은 깊었으나 이것을 위해서라면 죄책감 따위 묻어 둔 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행복에 한참 젖어 있을 때, 검은 무언가가 그의 귀에서 스르륵 흘러내리듯 나오더니 꾸물거리며 그의 오른쪽 눈가로 은밀히 향했다. 그리고 한순간에 튀어 올라 이즈카엘의 오른쪽 눈 가장자리로 쑥 들어갔다.
“윽!”
“이즈카엘? 왜 그래요?”
기이한 아픔과 사라진 시야에 이즈카엘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다시 곧 멀쩡해진 눈으로 아내를 담기 바빴기에 그는 잠시간의 고통을 망각했다. 그가 고개를 작게 저으며 다정히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눈이 아주 조금 따갑긴 했으나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잠깐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
“어디 봐요. 내가 불어 줄게요.”
후후. 따스하고 미약한 바람이 금안을 스쳤으나 오른쪽 눈 깊숙이 똬리를 튼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제 몸채만 한 입 속으로 다디단 애정을 삼킬 뿐이었다.
* * *
[……이만 소식을 줄이며 당신이 오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겠어요. 돌아오면 아이에게 말을 걸어 줘요.
아무쪼록 건강하길 빌며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 헤레이스가]
막사에 앉은 이즈카엘은 편지를 몇 번이고 읽었다. 얇은 종이를 쥔 모습이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그가 무거운 검을 휘두르며 야만인들의 목을 베어 넘기는 이라고는 생각하긴 힘들었다.
“아이…….”
이즈카엘은 더없이 행복했다. 그는 종이 위 아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엄지로 쓸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혹여나 눈물이 떨어져 편지의 글자가 번지면 어쩌나 걱정을 하며.
편지를 곱게 접어 베개 밑에 넣은 그가 간이침대에 누워 막사의 천장을 바라봤다. 이 지긋한 토벌도 얼마 남지 않았다. 북부 야만인들은 이번 전쟁으로 몇 년간은 조용할 테고, 그러면 자신은 아내와 태어날 아이에게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봄날을 생각하며 이즈카엘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억지로 눈을 붙이려 해도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결국 벌떡 일어난 그가 홀린 듯 달력과 지도를 바라보더니 의복을 갖춰 입고 검을 챙겨 들었다.
‘나흘…… 혼자 말을 달리면 충분해.’
큰일 날 생각이었다. 아무리 잔챙이들만 남았다지만 그는 지금 전장에 있었다. 우두머리가 자리를 비우다니. 그가 하려는 행동은 탈영이었다.
하지만 이즈카엘은 아내에게 가고 싶다는 욕망을 이상하게 이기기 어려웠다. 아직 배가 부풀지는 않았겠지만 제 씨를 품고 미소를 지을 아내를 생각하니 기이하리만치 목이 탔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막사를 나섰다.
“어디 가십니까? 각하!”
“금방 다녀오겠다. 그동안 부탁한다, 에드가.”
이즈카엘이 말을 챙기고 있다는 말에 에드가가 기겁하며 달려왔지만 소용없었다. 이즈카엘은 저 멀리 성의 방향만을 보고 말의 옆구리를 찼다.
바닥에 눈이 튀어 오르며 말이 길게 울었다. 달려가는 말꼬리를 따라 검은 연기가 길게 이어졌다.
* * *
이즈카엘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며 눈은 커질 대로 커졌다.
몰래 성에 들어가 아내를 놀라게 해 주려던 것이 문제였을까? 눈이 내려앉은 정원 사이에서 홀로 빛나는 온실의 빛에 이끌린 것이 문제였을까?
‘왜…….’
아니, 문제는 그에게 있지 않았다. 문제는 저들이었다. 온실 안 길게 자란 화초 속에서 껴안고 있는 둘……. 두 사람은 은밀한 만남이 우려되지도 않은 모양인지 거리낌이 없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온실 아래 당당히 빛났다. 검은 머리카락을 쉴 새 없이 쓰다듬는 큰 손이 다정했다.
아내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옛 약혼자를 꼭 껴안은 채 그의 귓속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우는 와중에도 웃는 얼굴이 생소했다.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가. 이즈카엘은 맹세컨대 헤레이스의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푸른 눈에 담긴 감정은 감히 읽기 힘들 정도로 복잡했으나 동시에 너무도 맑고 진실했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주지 않았으면서. 한 번도 난 그렇게 바라봐 주지 않았으면서.
심장에 박혀 말라 가던 가시가 순식간에 양분을 먹었다. 죽어 가고 있었으나 단단히 뿌리내린 그것은 금세 다시 세력을 키우더니 짧은 시간 안에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툭 떨궜다.
떨어진 열매에서 터져 나온 수천 개의 씨앗이 온 마음을 잠식했다. 너무도 풍족한 양분이 그 모든 씨앗을 키우고 다시 열매를 맺었으니…….
‘나에게는…….’
고개를 젓던 헤레이스가 무어라 말하며 뒷걸음질 쳤다. 신의 장난인지 무언가에 걸린 듯 그녀가 휘청이며 뒤로 넘어갔다. 이즈카엘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달려 나갈 뻔했다.
그 순간, 샤를이 그녀를 향해 재빨리 손을 뻗었다. 단숨에 가까워진 모습. 다행이란 듯 한숨을 쉬며 웃어 보이는 얼굴. 두 사람 사이에는 조금의 어색함도 없었다.
아아……. 이즈카엘은 더는 눈을 뜨고 있기가 어려웠다.
그가 눈을 감자 오른쪽 눈에서 검은 연기가 기어 나와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동시에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어둑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속살거렸다.
「네 아내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과연 네 아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