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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28화 (28/108)

28화.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이 그가 기대앉아 있던 나무를 때렸다. 그러자 나뭇잎이 그새 완전히 붉게 물들었다. 살랑거리며 나무를 맴돌던 바람이 피 같은 단풍을 하나하나 떼어 내 사내의 곁으로 떨궜다.

「메데아의 아이야…….」

마지막 단풍이 사내의 등 위에 안착하며, 기이한 목소리가 이명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그 목소리만은 너무도 선명했다.

「……내가 너를 도울 수 있단다.」

목소리가 이즈카엘의 턱밑을 툭툭 쳐올리듯 울렸다. 그가 귀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 내며 앞을 봤다. 중요해 뵈는 종이 한 장이 팔랑 날아오더니 손가락 끝에 닿았다.

* * *

“비켜.”

“하, 하지만…….”

간수 옆 구석에 쥐의 사체가 보였다. 이즈카엘은 이 구역질 나는 공간에 헤레이스가 열흘 넘게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저로 인해 이리됐음을 알고 있음에도.

“조금 전 폐하의 허락을 받았다. 그러니 죽기 싫으면 당장 비켜.”

그가 검으로 가는 손을 간신히 억누른 채 간수를 윽박질렀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성지에 그제야 간수가 열쇠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즈카엘은 그것을 빼앗다시피 받아 들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죄인의 충격이 좀 큽니다. 아무래도 오라비가 얼마 전 눈앞에서 끌려간 터라…….”

따라온 간수가 눈치를 살피며 그에게 말하자 이즈카엘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오라비가 끌려갈 때 그녀가 지었을 표정이 생생히 그려졌다.

‘좀 더 빨리 움직였어야 했는데.’

헤레이스의 오라비 크리스에 대한 처분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에게 내려질 사형을 추방형으로 만든 것이 그 자신이었으니.

‘헤레이스 곁에서 떨어지십시오. 이제는 성인이 된 아이입니다.’

크리스를 살려 줬다 해서 이즈카엘이 그에게 호감을 느낀 건 아니었다. 크리스는 그의 여동생과 이즈카엘을 어떻게든 떨어뜨려 놓으려 했으며, 이즈카엘은 그런 그를 싫어했다.

하지만 헤레이스에게 그는 하나뿐인 오라비이자 진정으로 아끼는 가족이었다. 그는 헤레이스를 기괴한 이유로 학대했던 디본 후작과, 일찍 죽은 후작 부인을 대신해 그녀에게 부모와 같은 정을 준 인물이었다.

“……혹 그녀에게 손을 댔나?”

이즈카엘이 긴 복도를 걸으며 스산하게 묻자 간수가 거세게 고개를 내저었다. 여신에게 맹세하건대 적어도 그는 헤레이스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아, 아닙니다요. 사내도 아니고 여인 아닙니까. 아무리 이곳이 죄인들에게 각박하다지만 귀족이었던 계집…… 아니, 아가씨를 함부로 할 수야 없지요.”

사실 죄인으로 떨어진 여인을 간수들이 건드리는 일은 흔했다. 특히 반역죄처럼 돌이킬 수 없는 죄로 들어온 죄인일 경우 특별한 명이 없다면 사형을 당하거나 노예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더더욱 간수들에게 험한 일을 당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헤레이스 같은 경우에는 눈앞의 새로운 공작뿐 아니라 더 높으신 분이 손 하나 대지 말라 명령한 죄수였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그녀를 건드릴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널 비롯해 여기 있는 모두의 숨을 끊어 놓을 테니까.”

간수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이었다. 목적지에 도달한 이즈카엘이 재빨리 뛰어간다 싶더니 곧이어 어두컴컴한 복도에 철컥, 하고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쇠 긁는 소리와 함께 단단한 철문이 열렸다.

끼이익.

이즈카엘은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보고 말았다. 해진 죄수복에 멍한 눈을 한 채 차가운 돌벽에 기대앉은 여인을.

당장에라도 부서질 듯 가는 발목에 감긴 족쇄와, 곧 쓰러질 것처럼 피폐해진 모습이 그가 알던 헤레이스와 달랐다. 빛바래지 않을 특유의 아름다움은 여전했지만 망연한 표정은 그녀를 꼭 말라비틀어진 화초처럼 보이게 했다.

‘내가 이렇게…….’

이즈카엘은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결혼식에 쓸 베일을 고르며 환하게 웃고 있던 그녀를 기억했다. 그날 헤레이스의 표정은 지금과 반대로 눈이 부실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

그는 이런 상황을 초래한 스스로를 원망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 괴롭긴 했으나 그의 마음에 후회는 없었다.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헤레이스.”

헤레이스는 바로 앞까지 다가온 이즈카엘을 천천히 올려다봤다. 그녀가 움직이자 발목에 감겨 있는 족쇄가 절그럭 소리를 냈다.

“……나는 언제 죽는 건가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이의 목소리였다. 이즈카엘이 이를 악물었다. 이런 걸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녀를 힘들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은 다만…….

속으로 변명하려던 이즈카엘은 욕지거리를 하며 말을 내리눌렀다. 무슨 말을 한들 자신이 벌인 일이었다. 그렇다면 책임을 져야지.

헤레이스에게 미움받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짓눌리듯 무거워졌다. 그가 마른침을 삼킨 채 한쪽 무릎을 꿇어 헤레이스와 마주 봤다. 흐려진 푸른 눈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나는 언제 죽나요? 오라버니가 끌려갔어요. 그렇다면 다음은 분명 나겠지요?”

헤레이스가 다시 물었다. 차라리 욕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녀도 어느 정도는 알 터였다. 이번 반역의 밀고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의 무릎 뒤에 손을 넣었다. 그가 쉽게 그녀를 들어 올린 채 나지막이 말했다.

“그대는 죽지 못합니다.”

성인이 된 후 그녀에게 이리 가까이 닿은 것은 처음이었다. 가벼운 몸이 제 품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벅찬 감동이 차올랐다. 그래. 이것을 위해 자신은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다. 다른 이도 아닌 그녀에게.

헤레이스는 그에게 갑자기 안겼음에도 별달리 반항하지 않았다.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몸을 축 늘어뜨린 그녀는 그저 멍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더듬을 뿐이었다.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감옥을 벗어났다. 감옥을 지키고 있던 간수들이 얼어붙어 있는 와중에도 두 사람을 곁눈질하는 것이 보였지만 상관없었다.

그가 고개 숙여 헤레이스에게 단단히 속삭였다.

“헤레이스…….”

“…….”

“살아. 살기만 해. 나머지는 모두 내가 감당할 테니.”

이즈카엘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헤레이스를 더욱 세게 안아 든 채 지하를 벗어났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에 눈이 부실 법도 했건만 그가 만든 그림자에 헤레이스는 적당한 볕만 받았다.

두 달 뒤,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와 함께 세르펜스 성에 도착했다. 하얀 드레스를 차려입고 화려하게 치장한 그녀를 보며 하녀들이 찬탄했다. 하나 그의 새신부가 될 헤레이스의 눈에서는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 * *

헤레이스는 이즈카엘과 결혼한 후 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청혼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인 이치고는 기이할 정도로 벽을 치는 모습에 세르펜스 성내에는 그녀를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늘어 갔다.

그러나 성안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 헤레이스는 모든 말들이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온종일 자수를 놓는 일과만 반복했다. 이즈카엘은 그게 헤레이스가 자신에게 보이는 최소한의 복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 같으면 감사하다 넙죽 엎드려 살 거 같은데…… 귀족 출신이라 그런지 뻣뻣한 것 좀 보세요.’

‘그러니까요. 원래라면 노예로 갈 것을 떡하니 공작 부인 자리를 차지한 주제에…….’

‘그래도 샤를 도련님은 안 되셨어요. 누가 알았나. 폐하와 동복 남매이신 공작 부인께서 반역에 가담하실지.’

‘목숨이라도 부지한 게 어디예요. 밖에서는 공작님이 반역을 밀고해 어미를 가두고 남동생을 쫒아냈다 수군거리는 모양이지만 사실 우리는 알잖아요. 공작 부인…… 아니, 이제 죄인이지. 죄인이 전에 한 행동들을 보면 공작님이 황제 폐하께서 사형을 내리지 않았다며 원망하지 않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지요.’

반역.

그 단어의 힘은 대단했다. 샤를 모자와 헤레이스에게 더없이 친절했던 이들이 순식간에 차갑게 등을 돌렸으니.

하지만 당연한 이치기도 했다. 저 단어와 얽히는 순간 제 모가지는 물론이요, 가족들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반역죄가 드러난 지 고작 몇 달이었다. 속 깊이 동정을 품고 있는 이들도 아직도 죄인이 끌려 나오는 시기에 감히 헤레이스를 두둔하거나 동정하진 못했다.

‘반역’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에도 개의치 않는 이는 이즈카엘뿐이었다. 그는 사용인들의 입을 단속하며 헤레이스의 심기만을 살폈다. 그가 어찌나 지극정성으로 헤레이스를 돌보는지 몇몇은 지금껏 그 마음을 숨긴 것이 용하다며 혀를 찼다.

‘디본 후…… 아니, 당신 아버지를 묻어 주고 왔어. 묘비를 보고 싶다면 언제든 말해.’

‘…….’

‘그리고 당신 오라비 말이야. 잘 지내고 있다 하니 너무 걱정은 마. 사람을 보내 가끔 소식을 알려 줄게. 폐하의 분노가 가라앉으면 제국 내에서는 힘들겠지만 밖에서는 그를 만날 수도 있을 거야. 그러니까…….’

헤레이스는 아비인 후작의 죽음에는 이상하리만치 무덤덤했다. 애초 그런 사람은 없었다는 듯. 하지만 오라비인 크리스나 샤를, 율리스 황녀의 이름이 언급될 때면 평소보다 배는 차가워진 얼굴로 이즈카엘을 노려봤다.

물론 이즈카엘은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든 단 한 번도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항상 낮은 자세로 아내를 대했다. 꼭 죄를 지은 사람이 그인 것처럼.

“헤레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헤레이스의 방에 조심스레 들어온 이즈카엘은 그녀를 부르려다 그만뒀다. 창가에 앉은 헤레이스는 무언가에 푹 빠져 그가 들어온 것도 모른 채 집중하고 있었다.

작은 손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이즈카엘은 헤레이스가 자수를 두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조용히 그녀의 뒤에 서서 구경했다. 뾰족한 바늘이 천에 푹 꽂혔다 다시 나오는 광경은 정적이었지만 그럼에도 특유의 재미가 있었다.

헤레이스의 자수 솜씨는 그녀가 어릴 적부터 칭찬이 자자했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녀는 칭찬받는 것만큼 제법 자수를 즐겼기에 헤레이스와 가까운 이들은 한 번쯤 그녀에게 자수가 놓인 자잘한 물건을 선물받았다.

이즈카엘 또한 그녀에게 딱 한 번 예쁜 파랑새가 새겨진 손수건을 선물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약혼녀인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에게 손수건을 선물한 사실을 알게 된 율리스 황녀는 분노했고, 손수건 위에서 날개를 펼치던 파랑새는 황녀의 손에서 갈가리 찢겨 태워졌다. 그 이후 이즈카엘은 헤레이스가 파랑새를 누군가에게 선물했다는 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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