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4장. 바라는 것
영원의 메데아.
내가 증오하는, 그리고 사랑하는 나만의 마녀야. 네 배신으로 심장을 걸고 영혼을 묶어 완성한 우리의 계약은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나와의 신뢰를 저버린 대가는 클 것이다. 위대한 로디바의 대마녀가 내린 자비도, 불사를 넘볼 만한 용의 마력도 네 피를 지키지는 못하리.
네 피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는 자는 영원히 내 숨결과 함께함에 은혜를 입고 그 속부터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때 등 돌렸던 네가 그랬던 것처럼.
* * *
긴 회랑을 따라 걸어오는 여인은 멀리서도 그 미색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얀 대리석과 대조되는 검은 머리. 모든 걸 밝게 보는 맑은 푸른 눈…….
“아…….”
저를 보자마자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미웠다. 당신은 알까? 내가 이리로 오는 당신을 쫓아 정원을 가로질러 일부러 여기에 서 있다는 것을.
이즈카엘은 불쑥 튀어나오려는 섭섭함을 간신히 숨겼다.
“오랜만이에요, 경.”
차라리 못 본 척 지나가지. 부러 마주침을 가장했지만 막상 그녀가 먼저 인사를 하니 상반된 바람이 나왔다. 양가적인 마음에 자조한 그가 괜스레 얼굴을 굳히며 헤레이스의 인사에 차갑게 대꾸했다.
“……언제부터 말도 높이시고 마주침도 피하시더니 이제 이름도 불러 주지 않으십니다.”
이즈카엘의 말에 헤레이스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하지만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전처럼 그를 이름으로 친근히 부르는 건 조심스러웠다. 황궁 안팎 사교계에서는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이 한창이었으니까.
‘평민 기사와 세르펜스 소공작의 약혼녀가 몰래 만난답니다.’
‘디본의 헤레이스가 약혼자를 두고 얼굴 잘난 기사와…….’
‘두 사람이 저번 연회 때 함께 나가는 걸 라니아 영애가 봤대요. 몰래 움직였다지만 사방에 사람들 눈이 있는데…… 숨겨질 리 없지요.’
헤레이스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이자 이즈카엘이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왔다. 한참 큰 키를 가진 사내가 찍어 내리듯 위압적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저…….”
“……사죄드리려 합니다.”
마른침을 삼킨 그녀가 변명하려던 차였다. 이즈카엘이 먼저 그녀에게 사죄했다. 그는 직전까지 섭섭함을 표하던 사내가 아니던가. 헤레이스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저 때문에 많이 곤란하시다고…… 소문을 낸 자를 색출하겠습니다.”
이즈카엘은 그녀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았다. 흔한 갈색 눈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그녀의 손 언저리였다. 괜스레 미안해진 헤레이스가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 생각해 보니 그로서는 당연했다. 갑자기 호칭을 바꿨으니 서운할 만했겠지. 그녀가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떠드는 것뿐인걸요. 오히려 제가 죄송해요. 그때 약주를 좀 자제했어야 했는데…….”
약으로 변한 눈 색이 이즈카엘의 처지를 알려 줬다. 본래라면 세르펜스 공작과 똑같이 호박색 눈을 빛내고 있었겠지만, 지금 그의 눈은 흔하디흔한, 특징 없는 갈색이었다.
덕분에 세르펜스 공작의 사생아인 이즈카엘의 정체를 북부 세르펜스 성 사람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물론 이 사실을 아는 고위 귀족들도 몇 있었지만 황제의 함구령이 워낙 대단했던 터라 입을 함부로 여는 이는 없었다.
“이곳에서만 잠시 호칭을 바꾸도록 할게요. 알다시피 이즈카엘이 세르펜스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걸 다른 사람들…… 읍!”
사내가 큰 손으로 갑작스레 그녀의 입을 틀어막더니 기둥 뒤로 그녀를 이끌었다. 사내의 넓은 품에 안기게 된 헤레이스가 눈을 크게 뜨고 깜빡이자 이즈카엘이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조심하시는 게 좋습니다. 어디서 듣는 귀가 있을지 몰라서.”
회랑 너머 가까운 정원에 몇몇 귀족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즈카엘은 그들이 사라지고도 한참 동안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결국 헤레이스가 먼저 그의 손을 두드렸다.
“죄, 죄송해요. 저는 그냥…….”
그의 품에서 나온 헤레이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즈카엘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발갛게 물든 귀를 바라보며 입매를 당겼다. 미처 감추지 못한 아쉬움이 밖으로 삐져나왔다. 그가 헤레이스의 입을 막았던 오른손을 몇 번 쥐었다가 폈다.
“소문 때문에 샤를이 기분 나빠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는 사정을 다 알고 있으니까요.”
“…….”
“소문에 너무 연연해 마세요. 샤를은 경을 친형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샤를의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가 자연스러웠다. 이즈카엘은 제 이름을 부를 때와 달리 어색함 없는 목소리에 미간을 살짝 구겼다.
샤를……. 그의 이복동생은 눈앞의 여인과 완벽한 한 쌍이었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며 순탄한 약혼을 이어 오고 있었다. 외관이나 성미나 어느 하나 모난 곳 없이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을 보며 사람들은 세기의 연인이다 칭했다.
차라리 샤를 그 아이가 나쁜 사내였으면 어땠을까. 이즈카엘은 여러모로 완벽한 남동생이 그 자신의 약혼녀를 냉대하는 모습을 그려봤다. 그 애한테 다른 여인이 있었다면…… 그리했다면 당신은 내게 조금 더 관심을 보였을까? 당신을 감싸고 있는 세계가 그리 완벽하지 않았다면 나에게 시선 한 번 더 던져 줬을까?
하나 그의 상상은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이었다. 샤를의 눈을 보면 알았다. 이복동생은 이 여인에게 흠뻑 빠지다 못해 잠겨 있었다. 감히 그가 이 추악한 질투를 드러내지도 못 할 만큼.
이즈카엘은 당장에라도 소문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아니, 사실 소문이 그리 퍼져 달갑다며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누가 보더라도 이 관계에 있어 이물질은 자신이었다. 그러니 이 마음은 영영 숨겨야 했다.
“공작 부인께서 워낙 완고하셔서 지금이야 이렇지만, 저나 샤를은 나중에라도 경이 성에 돌아와 주셨으면 해요. 어릴 적처럼 다 같이 지내면 즐거울 테니까요.”
“…….”
“그리 멀지 않았어요. 곧 샤를과 함께하게 되면…….”
조금 전 다짐이 무색하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건만 헤레이스에게 직접 들으니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고 세게 죄는 것 같았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뗀 이즈카엘이 떨림을 숨긴 채 말했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날짜는 언제로 예상하고 계십니까.”
“아직 정확한 날짜가 나오지는 않았어요. 다만 대략 내년 봄쯤 예상하고 있어요.”
무슨 상상을 하는지 헤레이스의 얼굴이 활짝 폈다. 봄의 신부……. 꽃과 같은 그녀와 잘 어울리는 단어였다.
두 사람은 푸릇한 잔디가 깔린 정원 안에 갖가지 꽃으로 꾸며진 둥근 아치 밑에서 사랑을 맹세하겠지. 반지를 교환하고 키스를 할 것이다. 그리고 베일 뒤 그녀는 영영 샤를의 곁에서…….
“……축하합니다.”
그 이상은 차마 상상할 수 없었다. 이즈카엘이 어지러운 시야를 무시한 채 축하의 말을 전했다. 빙글빙글 세상이 도는 와중에도 헤레이스의 얼굴은 선명했다. 견디지 못한 그가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저…… 경!”
헤레이스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뒤돌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몸은 헤레이스의 목소리에 빠르게 반응했다. 그새 다시 등을 돌린 그가 잔잔히 웃고 있는 그녀와 마주했다.
“초대장을 보낼게요. 꼭 와 주셨으면 해요. 물론 불편하시겠지만 그래도 저나 샤를은 경의 참석을 바라고 있어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전쟁 통 화살보다 빠르고 날카로웠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이즈카엘이 손을 꽉 쥐었다.
“제가 왜 불편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네?”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헤레이스가 그를 쳐다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왜 나를 보지 않아? 이즈카엘은 반 발자국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가까이 서 있다가는 손으로 헤레이스의 턱을 쥘 것 같았다.
“아…… 그 공, 공작 부인께서 계시니까.”
“…….”
“불편하시면 오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다시 생각해 보니 제가 과한 걸 부탁드린 거 같아요. 그러니까…….”
“……참석하겠습니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에게 할 말이란 정해져 있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자 헤레이스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그녀가 가슴 위로 손을 모으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감, 감사드려요. 그럼 꼭 초대장을 보내 드릴게요.”
“이야기가 끝났으면 먼저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아…….”
마주 인사한 그가 이번에는 그녀가 붙잡을 틈도 없이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따라붙는 눈길이 기쁘면서도 괴로웠다. 다리가 점차 빠르게 움직였다. 겨우 회랑 모서리를 돈 그는 결국 어느 한적한 단풍나무 밑으로 숨어들었다.
가쁜 숨과 함께 이즈카엘이 손으로 눈을 가렸다. 미끄러지듯 나무 밑에 앉은 그가 쉴 틈 없이 급격히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이를 꽉 물었다.
“……제길.”
손바닥에 가려 캄캄한 시야만큼이나 제 세상이 어두워진 기분이었다. 어미를 잃었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울컥 치솟는 감정은 여러 가지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상실감이었다.
이즈카엘이 눈을 감았다. 그러자 동시에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 번쩍 눈을 떴다.
사내의 왼 가슴 부근에서 잿빛 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연기 같기도, 유기체 같기도 한 그것은 가슴에서 새어 나오기가 무섭게 크기를 더해 갔다. 거미줄 같았던 것이 양모 같은 굵기가 되더니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서로 얽히고설켜 까만 솜뭉치 같은 형상을 띠었다.
뾰족하게 가시를 세운 그것이 사내의 몸 위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넓은 가슴을 지나고 목을 타고 올라 귓가에 다다른 그것은 반으로 쩍 갈라지더니 날카로운 이를 보였다. 그리고 한입에 삼키기라도 하듯 이즈카엘의 귀를 물었다.
“윽!”
갑작스러운 통증에 이즈카엘이 눈을 가린 손으로 귀를 매만졌다. 고통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귀는 멀쩡했다.
‘이제 별…….’
허탈한 웃음과 함께 이즈카엘이 손을 스르륵 내렸다. 그러나 순간 이명이 귀 안쪽부터 길게 울리더니 종국에는 더 큰 화를 가져왔다.
“으윽……!”
삐이이.
기이한 이명이 세상 모든 소리를 가렸다. 머리가 깨질 듯한 아픔과 동시에 온몸에 피가 끓듯 열이 올랐다. 이즈카엘이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감싸 안았다. 핏줄이 서 붉어진 눈동자가 서서히 바뀌더니 약에 가려져 있던 본래의 황금빛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