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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26화 (26/108)

26화.

“예?”

“……나이가 많지만 영리한 아이야. 어차피 우리는 얼마 달리지 않을 거라 이 아이로도 충분해. 그렇지, 브륀튈트?”

브륀튈트가 이름인지 말이 작게 콧김을 뿜었다. 헤레이스가 말을 끌어내 익숙히 이끌었다. 다각다각 발굽 소리도 거의 내지 않는 말은 오랜만에 나온 모양인지 꽤나 경쾌하게 걸었다.

“나가는 문은?”

“지금 시간에는 정원 뒤쪽 서문에 아무도 없을 거예요.”

안나가 길을 안내하며 조금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와 병사들의 보초 시간을 알아내기 위해 그녀는 폴을 이용했다. 몰래 만나자며 그를 꼬드긴 후 그를 통해 원하는 정보를 얻어 낸 그녀는 약간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좀 돌아가긴 하지만 그쪽은 개울이 여러 개 있어서 흔적을 지우기 좋겠구나. 그보다 에르젠은 괜찮은 거지?”

“걱정 마세요. 도련님은 주무시고 계세요.”

걸음을 서두르자 금세 문이 나왔다. 헤레이스는 말 위에 올라 안나가 말에 타는 걸 도운 후 뒤를 돌아봤다. 성안 홀이 있는 곳에서 즐거운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인 그녀가 말고삐를 당겨 잡았다. 곧 말이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 * *

문득 불길함이 몸을 감쌌다. 이즈카엘은 자리에 앉아 술에 취한 이들을 구경하다 손짓으로 시종을 불렀다. 뒤에서 대기하던 시종이 주인의 부름에 빠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하녀를 시켜 아내가 잠들었는지 확인하게 해.”

심상찮은 주인의 목소리에 하인이 급히 움직였다. 그가 홀 밖으로 사라지는 하인에게 시선을 던지던 와중 옆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뭐가 그리 우습지?”

샬럿에게도 들릴 법했지만 그녀는 앞을 보며 인형처럼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아까처럼 수다스럽지도, 여기저기 자랑을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손님들 중 몇몇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샬럿을 봤다. 그러나 정부를 아낀다는 공작이 바로 곁에 있었기에 누구도 나서서 샬럿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냥. 우습잖아. 나한테 백일을 맞이했다 축하해 주는 꼴이.」

이즈카엘이 목소리를 무시했다. 대신 그는 가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신경질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내에게 선물한 목걸이가 떡하니 다른 여자 목에 있는 꼴을 보니 조마조마한 마음이 더 뒤틀렸다.

‘무엇을 하느라 이리 늦어.’

하인을 보낸 지 몇 분 되지도 않았건만 이즈카엘은 초조함에 입술을 내리 물었다. 기다리는 일분일초가 편치 않았다.

아니, 기다릴 필요 있나? 어차피 관심도 없는 연회 따위……. 결국 이즈카엘이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목소리가 물었다. 홀에 있는 이들 중 아직 정신이 멀끔한 이들도 그를 보며 입을 다물고 예의 차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즈카엘은 목소리에게 대꾸를 하지도, 그 누구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그가 하인이 나선 길을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기니 취객 몇이 비틀거리면서도 허리를 숙였다.

이즈카엘이 홀 밖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미의 품에 안긴 아이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아비의 뒤를 바라보다 옹알이를 했다. 아무도 듣지 못한 말이 사내의 등 뒤에 따라붙었다.

「……가도 소용없을 텐데.」

* * *

밤의 호수는 어두컴컴한 것이 앞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아우뉴 호수에서 평생을 산 이 노어부가 아니라면 감히 이 저녁에 조각배를 띄울 생각도 못 했으리라.

“말을 그렇게 두셔도 될까요? 혹여나 기사들이 발견하면 금세 추적할 텐데.”

안나는 시커먼 물을 바라보다 두려움에 고개를 들고 헤레이스에게 물었다. 그녀의 바로 앞에 앉아 에르젠을 어르고 있던 헤레이스는 괜찮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브륀튈트는 똑똑해. 아마 지금쯤이면 성에 도착했겠지.”

“예?”

호수 어귀에 두고 왔는데 말이 어떻게 성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안나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했지만 헤레이스는 답해 주지 않았다. 배에 탄 후 얼마 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난 아들을 달래느라 그녀는 정신이 없었다.

“에르젠, 그래. 우리 아들. 엄마야.”

오랜만에 아들의 눈을 보자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아들에게 말을 거는 헤레이스를 안쓰럽게 보던 어부가 한마디 했다.

“거참…… 얼마나 떨어져 있었으면 그리 애틋하게 구는가. 남편이 애를 앗아 가기라도 했소?”

어부의 말에 헤레이스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녀가 가까스로 표정을 추스른 채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무슨. 옷을 그리 차려입고 있어도 내 눈은 못 속인다오, 부인. 기사님의 아내가 아니요?”

이즈카엘은 공작이기 이전에 기사였으니 맞는 말이었다. 이번에는 안나가 놀란 눈으로 어부를 바라봤다.

헤레이스에게 입힌 옷은 누가 보더라도 평민의 것이었다. 적절히 잘 변장했다 생각했는데 이런 늙은이의 눈조차 속이지 못하다니. 안나가 입을 딱 벌리자 어부가 껄껄 웃었다.

“거보시오. 내 눈은 정확하다니까. 하여간 기사라고 나불거리는 것들이 더 문제야. 이 촌부보다도 아내를 아낄 줄 몰라.”

“그런 게 아니라…….”

“하기야 부인 얼굴을 보니 알 만하구려. 아이를 그리 껴안고 있는 걸 보면 기사님의 병이 아주 심했나 보오. 아이도 못 보게 했나?”

노어부가 말한 병이란 속된 말로 의처증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민망해진 헤레이스가 고개를 숙였다. 어부 또한 더 이상 헤레이스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노를 저었다. 그가 아득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적당한 시일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시오. 세상 사람들 인심이 아무리 나쁘지 않다지만 여인 두 사람과 갓난애 하나만으로는 세상 살기가 어렵거든.”

* * *

연회는 한순간에 파투가 났다. 손님들은 쫓겨나다시피 돌아가거나 숙소로 몰렸으며, 기사들과 병사를 비롯해 사용인들은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했다.

에드가는 이즈카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앉아 있었다. 땀에 절어 있는 그는 강인한 체력의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부인께서 타고 가신 것으로 추정되는 말을 찾았습니다.”

아내의 흔적을 찾았다는 말에 누구 하나 죽일 것 같던 흉포한 기세가 정돈되어 날카로워졌다. 이즈카엘이 꼭 몇 년 동안 잡지 못한 적의 수괴를 쫓을 때와 같은 얼굴로 물었다.

“어디 있었나.”

“그것이…….”

주군이 원한 답이 아님을 알았기에 에드가가 그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그 뒤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있던 이들도 고개를 떨궜다. 이즈카엘이 인상을 구기며 발을 구르자 에드가가 겨우 입을 열었다.

“마구간 앞에…….”

“하!”

와장창 소리와 함께 무언가 날아가 문에 부딪쳐 깨졌다. 아마 홀 안에 있던 잔 중 하나였겠지. 에드가가 긴장에 주먹을 세게 쥐고 침을 삼켰다. 무어라도 설명해야 했다. 아니면 당장 뒤에 있는 부하들의 목숨이 위험했다.

“말이 다시 돌아온 듯싶었습니다. 발굽과 털 사이에는 성에서 볼 수 없는 풀들이 묻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발굽에 붙은 흙이 진 것을 보면 물가를 건넜거나 물 가까이의 땅을 밟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

“빨리 찾겠습니다. 말까지 돌아온 이상 멀리 가시지는 못했을 겁니다.”

이즈카엘은 아무 말 없이 에드가를 내려다보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탁자 위 검을 집어 든 그가 핏줄이 터져 벌겋게 변한 눈을 한 채 물었다.

“……말은 어디 있나?”

에드가가 미처 답을 하기도 전이었다. 이즈카엘은 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권좌를 박차고 내려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에드가를 위시한 기사들 또한 주군의 걸음을 뒤따랐다.

이즈카엘은 금세 마구간에 도착했다. 그가 손짓하자 눈치 빠른 기사가 얼른 말을 내왔다. 늙은 암말이 기사의 손길에 순순히 걸어 나오다 이즈카엘을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 헤레이스. 말을 본 순간 이즈카엘은 알았다. 이 도망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헤레이스 그녀는 진즉 도망을 계획하고 있었다.

‘브륀튈트.’

그녀가 타고 나갔던 말은 보통 말이 아니었다. 브륀튈트. 율리스 황녀의 아들이자 그의 이복동생인 샤를이 열다섯 되던 해 황제로부터 선물받은 이 말은 빠른 데다 대단히 영리했다. 꼭 전서구처럼 집을 찾아올 줄 알았으니.

샤를은 헤레이스를 이 말에 자주 태웠다. 그리고 그녀가 성년이 되던 해 신뢰의 증표로 이 말을 선물하려 했다. 하지만 헤레이스가 브륀튈트를 선물받기 직전, 율리스 황녀의 반란 가담 사실이 밝혀지고 디본이 몰락하며 말은 여전히 세르펜스 성에 머무르게 됐다.

이즈카엘로서는 이 말이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그와 결혼한 후 홀로 말을 탄 적도, 이 말을 찾은 일도 없었기에 그는 말의 존재에 대해 잊고 있었다.

이즈카엘이 이를 악물고 말 가까이로 다가갔다. 영리한 브륀튈트가 저를 향하는 살기를 눈치채고 어떻게든 기사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

“어…… 어?”

갑작스레 말이 발버둥을 치는 덕에 기사가 그만 고삐를 놓쳤다. 브륀튈트가 도망치려 재빨리 땅을 박찼다. 그러나 이즈카엘의 검이 한발 더 빨랐다. 그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히이잉!

한밤중 짐승의 단말마가 울렸다. 단번에 머리가 떨어진 말이 몸을 쓰러뜨리며 사방으로 피를 뿜었다. 이즈카엘이 뜨거운 피를 맞으며 검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챙!

동족이 죽어 가는 소리에 마구간에 있던 다른 말들이 숨을 죽인 채 귀를 바짝 세웠다. 이즈카엘의 곁에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사건 사용인이건 할 것 없이 모두 몸을 굳힌 채 피범벅이 된 주군을 바라봤다.

“……어떻게든 끌고 와. 끌고 오지 못한다면 이처럼 목숨으로 죄를 묻겠다.”

머리가 사라진 말은 바닥에 꼬꾸라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즈카엘의 추상같은 명에 에드가를 비롯한 기사들이 고개를 깊이 숙인 후 다시 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조차 없는 밤이었다. 별빛마저 가리는 희뿌연 구름 아래 이즈카엘이 제 얼굴에 묻은 피를 아무렇게나 닦았다. 그새 식은 피는 비릿한 냄새와 짙은 색을 자랑할 뿐, 바닥에서 식어 가는 몸뚱이처럼 차가웠다.

“헤레이스…….”

아내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광기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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