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을 꺾는 악마여-25화 (25/108)

25화.

“건강히 오래 살기를 기원하마.”

“어머, 부인. 너무 성의 없으신 거 아닌가요. 그래도 공작님의 아드님이신데…….”

샬럿의 타박은 홀에 있는 이들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대꾸 없이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이 붉은 상자를 들고 조심스레 다가왔다.

상자가 열리자 여기저기서 찬탄이 흘렀다. 짧은 축하의 말이 무색하게 상자 안 보석은 모두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무시당했다며 분한 얼굴로 헤레이스를 노려보던 샬럿조차 입을 닫고 탐욕스러운 눈을 했다.

헤레이스가 선물로 내놓은 것은 목걸이였다. 세르펜스 공작가를 상징하는 문양부터, 줄까지 다이아몬드가 줄줄이 박힌 그것은 누가 봐도 귀중한 보물이었다.

묵직한 무게를 느끼며 헤레이스가 샬럿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샬럿이 눈을 반짝이며 냉큼 손을 뻗었다.

“감사합니다, 부인. 이제 보니 미겔을 퍽 위하시는군요.”

헤레이스가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샬럿은 목걸이를 구경하느라 바쁜지 조금 전과 달리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뭐 하는 짓이지?”

그녀가 자리로 돌아오자 옆에 앉은 이즈카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불쾌감이 분명히 담겨 있는 그 말에 헤레이스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시선을 정면에 두었다. 그 모습에 이즈카엘이 재촉하듯 재차 물었다.

“왜 하필 저걸 선물로 준 거냔 말이야. 저건 내가 당신한테…….”

“그러니 준 거예요.”

“뭐?”

헤레이스의 답에 이즈카엘이 무슨 소리냐는 듯 얼굴을 구겼다. 빼앗은 금반지만큼은 아니었지만 목걸이 또한 공작가의 가보로 불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목걸이 줄에 달린 다이아몬드 수백 개도 제법 귀한 것이었으나, 무엇보다 가운데 늑대의 눈을 장식하고 있는 다이아몬드는 제국에 몇 없다는 푸른 다이아몬드였다.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와 결혼하며 세상에 다시없을 목걸이를 만들라며 장인 여럿을 닦달했다. 그가 선물한 대표적인 결혼 예물, 그것이 바로 샬럿의 손에 들린 저 목걸이였다.

그러니 이즈카엘로서는 못마땅할 수밖에. 하지만 헤레이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차분히 답했다.

“공작가의 첫 번째 아이에게 선물하기 딱 맞잖아요.”

“헤레이스, 당신…….”

이즈카엘이 사람들 앞이라는 것도 잊은 채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그제야 제 신경을 긁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내는 이상하리만치 무표정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내를 가늠하려 애썼다. 이이가 왜 이러나.

그러나 그때, 누군가 단상 아래에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헤레이스를 불렀다.

“저…… 저 부인. 저와 함께 한 곡…….”

젊은 청년은 술에 잔뜩 취한 채었다. 그가 몽롱한 얼굴로 헤레이스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제법 멀끔하게 생긴 얼굴과 순진해 보이는 인상은 여인의 호감을 살 법했다. 하지만 당황한 헤레이스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 거친 구둣발이 청년의 손을 짓밟았다.

“아악!”

청년의 비명에 주변 이들의 시선이 단상으로 쏠렸다. 에드가가 급히 달려오더니 청년을 끌어냈다.

사실 청년의 행동은 보통 무례한 것이 아니었다. 감히 자신보다 한참 높은 공작의 부인에게 함부로 손을 뻗은 데다 춤까지 청하다니. 헤레이스가 단상에서 내려와 이즈카엘과 춤을 추지 않는 이상 청년은 함부로 헤레이스를 쳐다봐서도 안 됐다.

“……일어나.”

냉랭한 표정의 이즈카엘이 헤레이스를 일으켜 세우더니 단상 뒤에 준비된 휴게실로 그녀를 끌고 갔다. 문이 닫히고 홀 안 소리가 사라지자 그가 벽 쪽으로 아내를 밀어 넣은 채 음산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처신 똑바로 못 하나?”

“…….”

“아무 사내한테나 얼굴은 왜 들이미는 거지?”

“……그런 적 없어요. 그 사람이 먼저 다가왔을 뿐이에요.”

“당신이 행동거지를 똑바로 했으면 그놈이 그랬겠나? 눈길이라도 한 번 주고 웃어도 줬겠지. 안 그래?”

이것이 억지임을 그도 모를 리 없었다. 헤레이스는 대답 없이 이즈카엘을 마주 보다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즈카엘.”

작은 목소리였건만 이즈카엘은 고함을 들은 듯 몸을 움찔거렸다. 그가 자신의 손에서 힘을 뺐다. 강한 악력에서 자유로워진 헤레이스가 조금 전까지 붙잡혔던 팔을 쓸었다. 욱신거리는 것이 분명 여기도 멍이 들리라.

“……나한테 뭐가 그리 불만이에요.”

“뭐?”

“당신도 알잖아요. 난 그 자리에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이리 날 괴롭히는 거예요.”

“……당신은 전적이 있으니까.”

더 이상 무어라 말해야 할까. 헤레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영영 듣지 않을 말이었다.

그녀가 전처럼 울음을 터뜨리거나 화를 내지 않자 이즈카엘이 다시금 그녀의 팔을 붙잡아 흔들었다. 이유 모를 기이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그를 잠식했다.

“이제 부정도 하지 않는군.”

“…….”

“좋아. 지금은 이쯤 하지. 연회가 끝나지 않았으니 말이야.”

오랜 대치 끝에 결국 먼저 물러난 건 이즈카엘이었다. 그도 알았다. 아내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억지스러운지.

그가 조금 진정된 목소리로, 그러나 여전히 강압적으로 아내에게 명했다.

“얼굴은 이쯤 보였으면 됐어. 당신은 방으로 돌아가.”

사실 아내의 태도보다 더 그의 신경을 긁는 건 아내를 보는 홀 안 사내들의 시선이었다. 이즈카엘은 그게 미치도록 거슬렸다. 왜 연회에 참석하라 했을까 후회할 정도로. 그가 의아한 얼굴의 아내에게 이어 말했다.

“내 생각이 짧았어. 당신이 미겔을 축복해 줄 리 없는데 말이야. 분위기 망치지 말고 먼저 올라가 있어. 자정쯤에는 갈 테니 기다리고.”

잘못을 인지했음에도 끝까지 말은 곱게 나가지 않았다. 그가 냉랭한 시선과 지독한 말로 애써 자괴감을 숨겼다.

서러울 법도 하건만 헤레이스의 푸른 눈에는 슬픔 대신 애틋한 감정이 일렁였다. 그녀가 이즈카엘의 뺨으로 손을 가져갔다. 흰 손이 천천히 그의 얼굴을 쓸었다.

“……피곤해요. 자고 싶어요.”

아내가 먼저 손을 내밀자 솟구쳤던 감정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즈카엘이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가린 채 아내의 손을 거칠게 뗐다. 탁 내쳐진 손에 헤레이스가 제 손등을 쓸다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막상 손이 떨어지자 아쉬움에 목이 말랐다. 이즈카엘이 속으로 스스로를 욕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알았어. 먼저 자고 있어.”

* * *

침대에 누운 뒤 자고 싶다 이르자 하녀가 물러갔다. 헤레이스는 하녀의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방에서 연회가 열리는 홀까지 꽤 거리가 있었지만 소음은 창문을 넘어 제법 크게 들려왔다.

똑똑.

헤레이스가 화장대 앞 벽을 두드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없었다. 긴장된 얼굴로 잠시 벽에 귀를 댄 그녀가 심호흡했다.

똑똑.

조금 전보다 큰 소리가 방에 울렸다. 곧이어 똑똑똑, 벽을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건너편 방에서 들렸다.

답을 들은 헤레이스가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연회 탓인지 복도는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그녀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다 옆방으로 향했다.

“아가씨!”

“쉿!”

문이 열리자마자 헤레이스가 방으로 들어갔다. 곧장 요람으로 가 에르젠을 안아 든 그녀가 안나에게 물었다.

“유모는?”

“잠들었어요.”

안나가 빈 병을 흔들어 보였다. 그제야 요람 너머 침대에 중년의 여인이 누워 있는 게 보였다. 헤레이스가 품 안의 아들을 걱정스레 봤다.

“걱정 마세요. 황자 황녀님들한테도 간혹 쓰는 약이라 했어요. 아주 조금 드셨으니 별문제 없을 거예요.”

“하지만 에르젠은 몸이…….”

“그보다 빨리 옷을 갈아입으셔야 해요. 생각보다 일찍 올라오시긴 했지만 시간은 넉넉할수록 좋으니까요.”

헤레이스가 잠든 아들을 도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가 침대 밑으로 팔을 뻗더니 웬 보따리 하나를 꺼내 풀었다. 그러자 옷가지 두어 개와 주머니가 떨어졌다. 헤레이스가 잠든 에르젠을 요람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채 갈색의 수수한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알았어. 먼저 자고 있어.’

남편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분명 연회가 끝나면 잠든 그녀를 찾아 침실로 돌아오겠지. 제법 오래전 마음을 먹었는데도 왈칵 눈물이 났다. 하지만…….

헤레이스가 소매로 눈가를 문질렀다. 드레스를 갈아입고 다시 아들을 안아 올린 그녀가 창문 너머 아우뉴 호수를 바라봤다.

이제 정말 이 성을 나갈 시간이었다.

* * *

왁자지껄한 연회장 바로 아래를 지날 때는 심장이 덜컥했으나 다행히 제법 자란 관목들은 세 사람을 가려 주기에 충분했다. 경비로 있는 기사들조차 홀 근처를 지키는 것인지 정원에는 몇 없었다. 생각보다 쉽게 정원을 통과한 헤레이스 일행이 긴장으로 들이쉬었던 숨을 내쉬며 마구간으로 들어섰다.

“봐 두신 말이 있으세요?”

안나가 말들 사이를 자연스레 지나는 헤레이스에게 물었다. 거리낌 없이 말을 살피는 헤레이스와 달리 그녀는 말이 익숙지 않은 듯 불안한 얼굴이었다. 말들이 앞발로 바닥을 긁고 푸르르 거칠게 콧김을 뿜을 때마다 안나가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

“아가씨 차라리 걸어가는 게…… 이러다 이 녀석들이 소리라도 내면 마구간 지기 톰이 나타날 거예요.”

“위험하기는 하지만 말을 타지 않는다면 금세 붙잡힐 거야. 선택의 여지가 없어.”

헤레이스는 승마라는 여인으로서는 제법 독특한 특기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연약해 보이는 그녀가 말을 탄다 하면 모두가 놀랐다. 어릴 때부터 그녀를 봤던 이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헤레이스가 말을 탄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

하나 헤레이스에게 승마란 익숙한 것이었다. 그녀는 꽤 어릴 적부터 율리스의 지시 아래 샤를과 함께 승마를 배웠다. 한때는 시도 때도 없이 말을 타고 달렸으니 그녀가 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랜만이라 괜찮을지 모르겠어.”

마침내 마구간 구석, 어느 한 말 앞에 당도한 헤레이스가 준비한 고삐를 걸며 부드러운 갈기를 쓰다듬었다. 연한 회색의 말은 순한 듯 소리 한번 내지 않고 헤레이스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안나가 보기에 헤레이스가 고른 말은 영 탐탁잖았다.

“더 튼튼한 아이로 타고 가요. 이 말은 보기에도 영…….”

말은 척 보기에도 나이 들어 보였다. 다른 말처럼 털에 윤기가 나지도, 근육이 뚜렷하지도 않았다.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이 조금 남아 있기는 했지만 왜 구석 자리에 대강 묶여 있었는지 이해가 갈 정도였다. 말 도둑이 들이치더라도 마지막에 훔쳐 갈 말. 헤레이스가 고른 말은 늙은 암말이었다.

“아니. 이 아이여야만 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