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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24화 (24/108)

24화.

샬럿이 멍한 얼굴로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헤레이스가 갑자기 태도가 바뀐 그녀를 이상하게 보다 더 짙어진 그림자에 위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남편은 여전히 불쾌하다 못해 화가 잔뜩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듣고만 있지?”

“……무얼요.”

“방금 저 계집이 한 말 말이야. 왜 듣고만 있었냐고. 그때는 잘도 뺨을 치더니.”

아끼는 정부를 계집이라 말하는 것이 놀라웠지만 이어진 말에 헤레이스는 입을 닫았다.

그때 저 여자의 뺨을 쳐 자신이 어떤 꼴을 당했던가. 이제는 가라앉아 자국조차 남지 않은 뺨이었건만 찌르르 아픔이 몰려왔다. 그녀가 자신의 볼로 손을 가져가려다 말고 고개를 수그려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좋아. 그건 그렇다 쳐. 그럼 나한테는 할 말 없나?”

“…….”

“대단하군! 참으로 대단해!”

“…….”

“하기야 당신이 벙어리에 가까운 건 진즉 알고 있었지. 성안에 있는 당신 아들 말고 당신의 목소리를 양껏 듣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

“아…… 그나마 침대 위에서는 좀 수다스러우신가? 말은 아니어도 목소리는 내시니 말이야.”

헤레이스가 끝없는 모욕에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험악한 손길이 팔로 향한다 싶더니, 몸이 저절로 일으켜 세워졌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이즈카엘에게 이끌려 경황없이 걷던 헤레이스가 헐떡이며 물었다. 보폭이 워낙 차이가 나 그녀는 거의 뛰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즈카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가 심상찮은 표정으로 아내를 끌고 오자 여기저기서 사용인들이 숨을 멈췄다.

한참 만에 이즈카엘이 멈춘 곳은 헤레이스가 타고 온 마차였다. 성인이 여섯이나 탈 수 있는 커다란 마차는 말과 분리된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가 마차 안으로 헤레이스를 억지로 밀어 넣은 채 따라온 기사에게 명했다.

“……돌아간다.”

그의 명에 기사가 물러났다. 문이 닫히고, 이즈카엘은 작은 창에 커튼을 홱 하고 쳤다. 헤레이스는 마차 시트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마차에 몸을 부딪친 그녀가 쓰러진 채 이즈카엘을 봤다.

“밖에서는 도통 말을 않으니 돌아가 당신 목소리나 듣지. 부부 사이에 대화가 좀 부족했잖아?”

겉옷을 대강 벗어 시트에 던진 이즈카엘이 겁박하듯 말했다. 성으로 돌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한 헤레이스가 얼어붙었다. 그 모습에 이즈카엘이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리며 허리를 숙이고는 아내의 얼굴을 쥐었다.

사내의 뜨거운 손을 타고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싶더니 곧이어 입술이 와 닿았다. 헤레이스는 눈을 감은 채 몸에 힘을 풀었다.

에르젠이 백일이 되기까지 며칠이나 남았을까?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한 헤레이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 * *

연회 손님은 지역 내 유지와 가신들뿐이었다. 그러나 연회의 주인공이 성의 주인이 아끼는 아들인 만큼 규모는 작더라도 없는 건 없었다. 오히려 백일밖에 안 된 아이를 위한 연회치고 너무 성대해 몇몇 이들은 이즈카엘이 전대 공작처럼 정부에게 지나치게 빠진 것이 아니냐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러한 말조차 연회의 흥을 꺾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공작의 첫 번째 아이를 축하하며 오랜만에 열린 연회를 즐겼다. 성안이 대부분 들뜬 가운데, 평소보다도 가라앉은 곳은 헤레이스와 에르젠이 기거하는 곳 단 두 군데뿐이었다.

헤레이스는 연회를 위해 조용히 치장 중이었다. 준비를 빌미로 헤레이스의 방을 찾은 안나가 마지막 마무리를 돕고 있었다. 푸른 드레스와 어울리는 진주 여러 개가 헤레이스의 검은 머리를 장식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아가씨는 참 아름다우세요.”

안나가 거울에 비친 상전을 보며 감탄했다. 어릴 적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꾸며 놓고 볼 때면 매번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러니 내려간 후에도 고개 들고 다니셔야 해요. 오늘 주인공이 그 사생아라지만 그 여자가 주인공인 건 아니니까요.”

안나가 헤레이스의 머리를 두어 번 더 정돈한 뒤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경쾌한 목소리의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헤레이스가 진주 귀걸이를 착용하며 거울 속 안나를 차분히 바라봤다.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안나의 얼굴에는 긴장이 한가득하였다.

“그건 걱정 마렴. 그보다 안나…… 내 말 명심해. 우리한테 기회는 이번뿐이야.”

“……네, 아가씨.”

억지로 만들어 낸 장난기조차 사라졌다. 안나는 헤레이스의 말에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몰래 준비한 약병이 소매 주머니 안에서 달랑거릴 때마다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이 선명해졌다.

‘긴장도 안 되시나. 난 이렇게 떨리는데.’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은 오늘 세르펜스 성을 빠져나갈 속셈이었다. 헤레이스는 처음 도망을 생각하고 있다 할 때는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하더니, 얼마 전 크게 앓고 난 후에는 나가겠다 단호히 말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안나는 헤레이스의 결심에 이즈카엘이 한몫했으리라 짐작했다.

물론 에르젠이 아직 지나치게 어린 데다 시간이 촉박한 탓에 걱정이 크긴 했다. 하지만 안나는 헤레이스의 몸이 온통 붉어진 것을 본 뒤로 불안감을 억지로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이유가 어찌 됐건 무조건 나가야 했다. 헤레이스의 삶은 지난 몇 달 새 바라보기만 해도 괴로운 것이 되었으니까.

‘에르젠 도련님을 다른 방으로 모시라는 주인님의 명이십니다.’

불안을 삼키고 다짐을 했다고 계획이 순순히 잘 풀린 것은 아니었다. 에르젠을 빼앗길 적에는 틀렸구나 좌절하기도 했다.

‘안나, 난 당분간 에르젠을 못 봐. 그러니 네가 잘해야 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에르젠 곁에서 떨어지지 마. 알았지?’

하지만 어떻게 한 모양인지 헤레이스는 안나를 에르젠 옆에 붙여 놓고 탈출 준비를 계속했다. 여전히 눈물을 많이 흘리기는 했지만 포기하지 않는 모습에 안나는 깨달았다. 제 아가씨에게 생각 외로 강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하기야 그동안의 모욕을 생각한다면 당연했다.

안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헤레이스의 목에 목걸이를 걸고 향수를 뿌렸다. 몇 시간이 지나면……. 적어도 오늘이 가기 전에 일은 끝날 것이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가씨. 제시간에 꼭 오셔야 해요.”

헤레이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시간에 맞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부인, 내려가실 시간입니다.”

* * *

헤레이스는 연회장 상석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홀에 자리한 단상 위, 성주의 권좌 바로 오른편이 그녀의 자리였다. 건너편 권좌의 왼쪽에는 오늘 주인공인 미겔을 안고 있는 샬럿이 보였다. 붉은색을 좋아하는 모양인지 저번보다도 눈에 띄는 장밋빛 드레스가 쟁쟁한 색을 자랑했다.

성주인 이즈카엘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가 없는 틈에 사람들이 샬럿에게 아부하기 위해 부지런히 단상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샬럿이 내보이는 미겔을 보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았다.

“도련님께서 공작님을 참으로 닮으셨습니다. 특히 두 눈이 공작님처럼 또렷하시군요. 자라나면 여러 여인을 울리겠습니다.”

“예끼, 이 사람. 그런 말부터 하면 안 되지. 도련님께서 참으로 영리하고 늠름하십니다. 전신이라 불리는 공작님을 따라 훌륭한 기사로 자라시겠지요.”

저를 향한 칭찬도 아닌데 샬럿의 입꼬리가 찢어져라 올라갔다. 요람이 준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겔을 품에 안고 자랑하듯 사람들에게 보인 그녀는 어찌나 당당한지, 정부가 아니라 꼭 공작 부인 같았다.

그녀가 헤레이스를 힐끔 살피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다들 그리 보시는군요. 하기야 공작님께서도 그러셨답니다. 미겔이 원체 아비를 닮아 가히 기쁘시다고요. 게다가 나이에 답지 않게 총명하고 힘이 대단한 것이 자신의 뒤를 이어 가문을 이끌기에도 충분하다고요.”

말을 마치고 샬럿이 꺄르르 웃었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그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웃지 못했다. 당연했다. 아무리 후계로 낙점될 가능성이 큰 아이라지만 바로 옆자리에는 이즈카엘의 정식 부인인 헤레이스가 있었다. 일개 정부가 자식을 자랑하며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무도했다.

헤레이스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는 것이 느껴지자 일부러 앞이 아닌 조금 비켜난 곳을 바라보았다. 남들의 동정 어린 눈 따위 싫었다.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아름답군. 몇 년 전과 달라진 게 없어.”

“왜, 예전에 수도 청년들 반 이상이 디본의 요정한테…….”

“쉿! 조용히 하게. 아무리 그래도 그 단어는 입에 올리는 게 아니야. 잘못하다간 목이 떨어져.”

헤레이스의 생각과 달리 사람들은 다른 의문을 품고 있었다. 저리 아름다운 부인을 박대하다니. 아무리 정부가 좋다지만 사내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샬럿도 소문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헤레이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몇몇 젊은 기사들이 연회라고 평소보다 화려하게 꾸민 헤레이스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공작 각하 드십니다!”

두 여인을 보며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성주가 도착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즈카엘은 저를 향하는 시선들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앞만 보며 걸었다. 아끼는 아들을 위한 연회라 들었건만 그의 얼굴에는 어쩐지 짜증과 무료함이 있었다.

단상에 올라 자리에 앉은 이즈카엘이 헤레이스를 한 번 훑어보고는 손을 들었다. 일어서 있던 사람들이 앉자 그가 말했다.

“시작하라.”

그 말 이후부터 헤레이스에게는 지루한 시간이 계속됐다. 연회를 위해 초대된 사제의 축하 인사를 시작으로 길고 긴 행사가 진행됐다. 누가 올라왔다가 내려갔고, 샬럿이 호들갑을 떨기도 했으며, 이즈카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어라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헤레이스는 멍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부, 부인의 차례십니다.”

생각에 잠겨 있다 문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두의 이목이 그녀에게 쏠린 후였다. 부끄러울 법도 했지만 헤레이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에 편히 앉은 샬럿이 승리감에 도취된 채 히죽 웃어 보였다. 그를 무시한 헤레이스가 고개를 숙여 미겔을 바라보자 아이가 눈을 예쁘게 접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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