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넓게 펼쳐진 아우뉴 호수의 수면이 내리쬐는 햇볕을 받아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였다.
마차에서 내린 헤레이스의 옆에서 하녀가 양산으로 그늘을 만들어 냈다. 그래도 부신 눈에 손차양을 한 헤레이스가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먼저 도착한 이즈카엘이 그의 정부와 다정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흑마 옆에 바짝 붙어 선 두 사람은 함께 말을 타고 온 모양이었다.
“이즈카엘, 너무 무서웠어요. 마차를 타는 것과는 역시 비교할 수가 없네요.”
“곧 익숙해질 거다. 날씨가 좋아져서 많이 나올 참이거든. 너도 자주 데리고 나오마.”
떨어져 있었건만 말소리가 어찌나 선명한지. 헤레이스가 연인처럼 선 두 사람을 보며 씁쓸한 얼굴을 했다.
‘호수까지 나와 함께 말을 달리겠어? 샬럿이 태워 달라 말하긴 했지만 당신한테 먼저 물어보는 거야. 어때?’
‘난 괜찮으니 마음대로 해요. 그녀와 타고 싶다면 눈치 볼 필요 없어요.’
‘하! 눈치? 내가 당신 눈치를 왜 봐?’
‘난 그런 뜻이 아니라…….’
‘……마차를 준비하라 이르지. 도착해서 보도록 해.’
그래도 결정은 옳았던 모양이었다. 출발하기 전 대화를 하다 홱 나가 버린 그 때문에 헤레이스는 조금 걱정하던 차였다.
“아이…… 이즈카엘. 저기 부인도 계시는데 이러면 어떡해요.”
그럼에도 정부를 희롱하는 남편은 여전히 거북했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헤레이스는 눈을 내리깔고 발걸음을 틀었다.
‘……차라리 아프다며 오지 말걸. 이즈카엘이 출타하면 몰래 에르젠을 보러 갈 수도 있었는데.’
에르젠을 생각하면 가슴이 타들어 갔다. 안나를 보내 놓기는 했지만 간간이 에르젠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면 울컥했다. 자신은 침대 위에서 신음이나 흘리고 있는데 아이는 자지러지게 어미를 찾았다.
‘이, 이즈카엘…… 읏! 한 번만…… 한 번만 에르젠한테 가면…….’
‘헤레이스, 입 닫아.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해. 아이가 별채로 가는 걸 보고 싶나? 그래?’
이즈카엘은 고작 울음소리에 과하게 반응하는 것이라 타박했지만 헤레이스는 확신했다. 에르젠은 분명 어미를 찾고 있었다.
아비의 얼굴을 딱 한 번 본 아이는 아비가 저를 냉대하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어미인 헤레이스에게 매달렸다. 방이 떠나가라 울더라도 그녀의 품에 안기면 뚝 그치는 아들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헤레이스는 에르젠만 있다면 세상이 두 쪽 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부인, 더 내려가시면 위험해요.”
에르젠을 생각하며 헤레이스가 정처 없이 호숫가를 걷고 있는데, 뒤따르던 하녀가 막아섰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어느새 호수 어귀였다. 조금 더 걸으면 경사에 미끄러져 물에 빠질지도 몰랐다.
헤레이스가 앉고 싶다 말하자 하녀가 그나마 평평한 땅에 가지고 온 천을 깔았다.
“부인, 무어라도 좀 드릴까요? 날이 따뜻하기는 하지만 바람이 차니 따뜻한 홍차가 좋을 것 같아요.”
그녀가 자리에 앉으니 하녀가 친근히 말을 붙였다. 안나가 저 대신 잠깐만 데리고 있으라며 붙여 준 아이였다. 이름이 헬렌이라고 했던가. 날이 갈수록 헤레이스에게 무뚝뚝해지는 다른 사용인과 달리 하녀는 제법 예의 바르고 상냥했다.
“그럼 고맙겠구나.”
“네! 냉큼 가져올게요.”
하녀 아이가 사라지자 헤레이스의 눈이 호수로 향했다.
깊고 푸른 아우뉴 호수는 명성만큼 아름다웠다. 어귀에 자란 물풀과 바위도, 그사이 들꽃도 모두 생명력 넘쳐 보였다. 간혹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은어가 물 위로 튀어 올랐다. 그걸 구경하던 헤레이스의 낯에 오랜만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처량하기 그지없네요.”
그러나 헤레이스의 짧은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하녀인가 했으나,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는 이는 남편의 정부 샬럿이었다.
“이리 날이 좋은데 꼭 비 맞은 강아지 꼴이시니…….”
앉으라 말하지도 않았건만 샬럿은 당연하다는 듯 헤레이스의 곁에 앉았다. 그녀가 무례한 소리를 지껄이며 품 안 무언가를 헤레이스 쪽으로 내보였다. 하얀 강보에 꽁꽁 싸인 채 웃고 있는 아이는 아는 얼굴이었다.
“오, 미겔. 그쪽이 아니라 어미의 얼굴을 봐야지. 옳지. 그렇지. 잘한다.”
에르젠과 같은 날 태어난 아이는 제법 크고, 또 건강해 보였다. 아직도 간혹 숨을 헐떡이는 에르젠과 달리, 샬럿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는 웃으며 팔을 이리저리 뻗고 있었다. 그걸 보니 성안에서 어미도 보지 못한 채 울고 있을 에르젠이 생각났다. 헤레이스가 차마 미겔을 더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 얼굴 굳히실 거 없답니다. 오늘은 저 또한 감사 인사를 드리러 온 거예요.”
아이를 안은 채 거들먹거리던 샬럿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가느다란 녹안에는 악의가 가득했다.
“미겔의 백일 연회에 참석해 주신다 들었어요. 분명 어디가 아프다며 참석 안 하실 줄 알았는데…… 역시, 인간사 끝까지 두고 봐야 알 일인가요. 막상 그날이 되면 배가 아프다면서 앓아누우실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
“뭐…… 사실 오든 말든 별 상관없어요. 어차피 부인 말고도 손님은 많을 테고 누가 뭐래도 그날의 주인공은 우리 미겔이니까요. 부인의 축하가 없어도 분명 많은 이들이 축복해 주겠지요. 어느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다른 아이와 다르게요.”
“내 아들을 욕보이지 마.”
자신을 비꼬는 말에도 잠자코 있던 헤레이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무시하려 했지만 에르젠에 관한 말만은 참기 어려웠다.
노여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경고를 담고 있었으나 샬럿은 헤레이스가 반응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냈다.
“하! 또 귀족 나리입네 유세를 하시려고요? 소용없으세요. 저도 이제 알거든요.”
“…….”
“부인의 집안, 아예 사라졌다면서요. 반역죄라니, 세상에……. 저희 천것들도 그런 천벌 받을 짓은 하지 않는답니다.”
디본의 몰락. 그건 워낙 유명해 성안 사용인들도 대부분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 샬럿이 알게 되었다 한들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남편의 정부에게 가장 아픈 곳 중 하나를 찔린 기분이었다.
“이즈카엘이 말해 줬어요. 부인이나 나나 피차 마찬가지니까 고개 숙일 필요 없다고요. 반역죄를 말하면서 어찌나 치를 떨던지. 전 당장 그이가 부인의 목을 베러 가는 게 아닐까 걱정했답니다. 아시다시피 이즈카엘은 황제 폐하께 충성심이 대단하니까요.”
헤레이스의 낯을 살핀 샬럿이 웃으며 거짓을 보탰다.
이즈카엘은 한 번도 그녀에게 디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하녀 아이를 닦달해 알아낸 사실이긴 했으나 하녀는 끝까지 주인님께서 아시면 목이 떨어진다 발발 떨었다.
‘어찌 보면 나보다 미천한 주제에…….’
하녀의 목이 떨어지건 말건 그건 상관없었다. 지금 샬럿에게 가장 중요한 건 헤레이스의 신경을 긁는 일이었다.
그녀가 아들을 내려다봤다. 제 아비와 똑같은 금안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아아……. 자랑스러운 아들을 고쳐 안은 샬럿이 더 모진 말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경고하는데 내 앞에서 그런 얼굴로 고고한 척 마.”
“…….”
“죄인의 여식 주제에 그 얼굴과 몸으로 사내를 홀려서 그 자리를 차지한 거잖아? 비슷한 입장인데 피해자인 척 구는 거 구차하다 생각 안 해? 아니지. 그래도 내 부모란 작자들은 죄인은 아니었으니 내가 좀 더 고귀한가?”
아무리 위세가 대단하다고는 하나 정부가 꺼낼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샬럿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품 안의 아들을 꼭 안은 채 정신 나간 말을 이었다.
“이번 연회가 끝나고 미겔이 후계자로 낙점만 돼 봐. 내가 네까짓 거 어떻게든 쫒아내 줄 테니. 물론 곱게 내쫒길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 반지뿐 아니라 네가 가진 모든 걸 빼앗은 후, 홀딱 벗겨 알몸 상태로 성 밖으로 내칠 거니까.”
흰 손가락에 꽂힌 금반지가 요요히 빛났다. 헤레이스가 끝내 반응하지 않자 샬럿의 눈이 더욱 표독스러워졌다. 그녀가 헤레이스를 위아래로 살피더니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아름답다고는 하나 곧 쫓겨날 이였다. 모욕과 분풀이를 하며 가지고 놀기 딱 알맞았다.
“가는 길 심심찮게 사내도 몇 붙여 주지. 얼굴만은 쓸 만하니 버려지지는 않을 거야. 혹 모르지. 다들 널 차지하겠다 싸울지도.”
샬럿의 말에 헤레이스는 구역질을 억지로 참았다. 당장에라도 모든 걸 게워 내고팠지만 남편의 정부에게 뒤틀린 심사를 내보이긴 싫었다.
“아니면 일할 곳을 소개해 줄까? 내가 전에 알던 곳인데 꽤 벌이는 괜찮아. 뺨 몇 대쯤 맞는 걸 각오만 한다면야…….”
샬럿의 망발은 계속됐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긴 그림자가 그들의 위로 졌다. 놀란 샬럿이 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림자의 주인공을 알아차린 샬럿이 어색히 웃었다. 흉흉한 금안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 베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냉랭하고 흉포하게.
“이, 이즈카엘. 언제 왔어요? 난 부인과 이야기를 좀 하려고…….”
“……그 목을 날려 버리기 전에 꺼져.”
사내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긴 검이 눈에 들어왔다. 샬럿이 간신히 두려움을 억누른 채 제 품에 안긴 미겔을 방어막이라도 되는 양 꼭 껴안았다.
“무, 무슨…….”
“못 들었나? 죽고 싶지 않으면 꺼지라고. 당장 성으로 돌아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거예요. 나 아직 좀 더 여기…… 악!”
아이가 있건 없건 상관없었다. 이즈카엘이 샬럿의 어깨를 잡고 아무렇게나 끌어냈다. 아이를 안은 채 뒤로 내쳐진 샬럿이 벌떡 일어서서 소리를 높였다.
“미겔이 떨어질 뻔했잖아요!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나는…….”
이즈카엘은 샬럿의 얼굴 대신 그녀의 품 안을 노려봤다. 꺄아, 하고 미겔이 소리를 냈다. 헤레이스는 혹여나 남편의 분노가 아이에게 향할까 조마조마한 얼굴을 했다.
“……알았어요. 먼저 들어갈게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부인.”
하지만 어쩐지 일은 쉽게 끝났다.
독기 서린 눈매가 그대로 누그러지나 싶더니 샬럿이 꼿꼿이 허리를 폈다. 그녀가 차분히 이즈카엘에게 고개를 숙이고, 뒤이어 헤레이스에게도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깊이 숙인 몸 사이, 아이의 큰 눈이 또렷했다. 헤레이스는 일순 오싹한 소름이 등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