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기를 한 차례 꺾어 둔 이후 아내는 더없이 순종적으로 변했다. 먼저 말을 거는 법은 없었으나 그의 질문에 꼬박꼬박 답을 했고, 행동거지 하나하나 신경 쓰는 게 티가 났다. 침대 위에서도 체력이 달려 힘들어하기는 했으나 그가 내키는 대로 하게끔 몸을 맡기며 투정 한번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즈카엘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아내의 노력에도 자주 심술을 부렸다. 떠나겠다고 말했던 것이 계속 머리에 맴돌아 울컥 치솟는 감정을 이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나마 침실에서 아내를 원하는 대로 마음껏 차지하다 보면 울컥울컥 솟는 화가 좀 가셨다.
‘어디서 감히…….’
그날이 떠오르자 다시 아내에게 벌을 줄 필요가 느껴졌다. 게다가 건방진 그의 부인은 요 며칠 할 일도 하고 있지 않았다.
가장 효과적인 벌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그는 이번에도 아내에게 가장 잘 먹혀드는 패를 집어 들었다. 고약한 짓이라 욕해도 상관없었다. 마음을 바짝 태우는 것보다야 나쁜 놈이 되는 게 나았으니.
창밖 정원에는 어미 개가 하나뿐인 제 새끼와 함께 있었다. 하얀 털 아래 똑같이 흰 제 새끼를 밀어 넣고 젖을 주는 모양새가 제법 애틋했다.
이즈카엘이 강아지를 바라보며 언짢은 눈을 했다. 그가 문밖을 향해 말했다.
“아무나 들어와.”
주인의 말에 항시 밖에서 대기하는 이들 중 하나가 들어왔다. 이즈카엘은 그에게 성의 집사를 불러오라 명했다. 그의 명을 받은 사용인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가 지긋한 집사가 들어왔다. 깊숙이 허리 숙인 그를 향해 이즈카엘이 명했다.
“가서 에르젠을 데려와.”
* * *
명령을 내린 지 10분이 지나기도 전이었다. 급박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하인이 부인께서 오셨다고 전해 왔다. 이즈카엘은 일부러 기다리라 명한 뒤 식은 차를 바꿔 오라 했다.
차를 한 잔 마시며 서류 몇 장을 넘겨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오늘은 일찍 찾아왔군.”
“……왜 이러는 거예요.”
이즈카엘은 가만히 아내를 바라봤다. 한 시간을 내리 기다렸을 여인은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젖은 눈을 한 채 손을 한데 모으고 있었다.
내가 저를 잡아먹나. 이즈카엘은 입매를 비틀며 아내를 보다 표정을 감추고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짐짓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뭘 묻는 거지?”
“에르젠이요! 갑자기 왜…….”
차분한 그와 달리 헤레이스의 목소리는 절박하고 날카로웠다. 그러나 목소리를 높이기 무섭게 그녀에게 날 서린 시선이 박혔다.
결국 헤레이스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작게 말을 끝맺었다.
“……데려가는 거예요.”
“내가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아이한테 매달리지 말고 할 일이나 잘하라고.”
할 일이라는 말에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하지만 사실 아닌가. 그의 아내는 요 며칠 제대로 자신의 일을 하지 않았다.
아들을 노예로 만들어 버리겠단 겁박을 들은 이후 헤레이스는 매일 이즈카엘의 침실을 찾았다. 그것이 그녀의 새로운 일이요, 일상이었다.
남편의 명대로 매일 밤 얇은 네글리제 한 장을 걸친 채 침대에 누워 그를 기다리는 일은 고역이었지만, 그날 남편의 엄포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기에 헤레이스는 꼬박꼬박 그를 찾았다.
“몸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었어요. 그리고 에르젠이 계속 울어서…….”
“그래서?”
“고작 며칠이었어요. 그전에는 잘하고 있었잖아요.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를 제외하고는 매일…… 당신한테 갔어요. 그건 이즈카엘 당신도 알잖아요.”
“그건 당신 생각이고. 내 생각은 다른데.”
“…….”
“아프다는 핑계가 계속되잖아. 이번 주만 해도 병을 빌미로 3일을 건너뛰었지.”
“하지만…….”
“같잖은 핑계 대지 마. 듣기 싫으니까. 아프다는 사람이 아이는 잘도 돌보더군. 며칠 별말 않고 있었더니 당신은 내가 바보로 보이나?”
이즈카엘의 말은 사실이었기에 그에 대해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몸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파도 에르젠을 돌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녀의 아들은 적어도 아비처럼 그녀를 힘들게 몰아붙이지 않았으니. 하나 남편에게는 그런 말이 통할 리 없었다.
결국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수그린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다 잘못했어요.”
“…….”
“정말이에요. 더 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에르젠을 돌려줘요. 그러잖아도 요즘 함께한 시간이 줄었어요. 한창 내 품에 있어야 할 아이예요.”
무얼 어떻게 더 잘할 수 있다는 걸까. 말을 하면서도 헤레이스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러나 남편에게 비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즈카엘 제발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줘요. 에르젠을 돌려주면 이 이후로 당신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즈카엘의 앞에 무릎을 꿇은 그녀가 메는 목을 간신히 누른 채 절절히 빌었다. 말이 중간에 서린 물기로 느려지긴 했으나 다행히 끊어지지는 않았다.
이즈카엘이 아내를 내려다봤다. 연한 크림색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일까. 아내는 어제보다 더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말간 얼굴 아래 긴 목과, 그 밑으로 곱게 떨어진 선에 사내의 목울대가 한 차례 울렁였다.
그가 헤레이스를 일으켜 세웠다. 나긋한 허리를 껴안은 채 아내의 목과 어깨 사이에 고개를 파묻자 특유의 체취가 코를 간지럽혔다. 그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내가 시킨 일만 잘 해낸다면 아이 문제는 다시 생각해 보지.”
질척한 손길에 가만히 응하고 있던 헤레이스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의문 가득한 얼굴 사이 희망과 불안이 동시에 엿보였다.
이즈카엘은 이를 세워 아내의 목덜미를 살살 빨았다.
“얼마 뒤 미겔의 백일 연회가 열리는 건 알고 있지?”
푸른 눈이 슬픔으로 조금 젖어 들었다. 모를 리 없었다. 성안이 그 연회 준비로 떠들썩했으니.
백일 연회…… 에르젠에게는 없을 기회였다. 그 사실에 헤레이스가 애통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자 이즈카엘의 금안에 뒤틀린 쾌락이 자리했다. 그가 답을 종용하듯 헤레이스의 목에 얼굴을 묻으니 헤레이스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본래라면 당신은 참석시키지 않을 참이었는데 샬럿이 꼭 당신의 축하를 받고 싶다 하더군.”
“…….”
“미겔에게 줄 선물과 축하 인사를 준비해. 내 부인이자 이 성의 안주인으로서 모자람 없게 말이야.”
“…….”
“……내키지 않는 건가? 표정이 좋지 않아.”
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 그런 자리엔 가고 싶지도 않았다.
처음 그가 그날엔 조용히 방에 박혀 있으라 했을 때는 서러웠는데, 지금은 참담함과 서러움이 함께 몰아쳤다. 그러나 싫다고 거부할 권리가 헤레이스에게는 없었다.
그녀가 남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할게요. 할 수 있어요. 그럼 에르젠은…….”
“그 일은 그날 당신이 하는 걸 보고 결정하지. 왜? 불만 있나?”
“……없어요. 대신 내 부탁 한 가지만 들어줄 수 있어요?”
“뭐지?”
“유모 하나로는 에르젠을 돌보기 힘들 거예요. 다른 사용인이 많다지만 얼굴도 익숙지 않아 에르젠이 낯을 가릴 테고…….”
이즈카엘이 불쾌한 낯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에르젠을 외는 아내가 못마땅했다. 사내의 고개가 들리며 날카로운 목소리가 헤레이스의 말을 갈랐다.
“분명 방금 말했을 텐데. 당신 아이 일은 미겔의 연회가 끝난 후에 결정하겠다고. 못 들었나? 아니면 고집을 피우는 건가?”
허리를 쥔 힘이 조금 강해지자 헤레이스가 몸을 움츠렸다. 그녀가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내가 곁에 있겠다는 게 아니에요. 대신 안나를 에르젠 곁에 보내 달라 청하려 했어요. 나와 함께 에르젠을 돌본 아이예요. 안나가 간다면 유모도 그렇고, 에르젠도 좀 더 편할 거예요.”
이유를 들은 이즈카엘의 얼굴이 한결 좋아졌다. 그러잖아도 그는 아내의 곁을 거의 매시간 머무는 시녀가 싫었다. 어릴 적부터 아내와 함께했다며 얼마나 유세인지. 보기 싫은 아이와 함께 그 거슬리는 낯짝이 사라진다면 분명 한결 편안하리라.
이즈카엘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건 허락하지.”
“……고마워요.”
“기대하고 있어. 비록 미겔이 당신 태에서 난 자식은 아니지만 누구와 다르게 확실한 내 아이잖아? 내 아내인 당신이 여러모로 신경 쓰는 게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좋을 거야.”
물론 그렇다 해서 그가 아내를 괴롭히는 걸 멈춘 건 아니었다. 이즈카엘은 제 뜻대로 일이 끝났음에도 심술을 부렸다.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헤레이스가 왼손으로 오른손을 꾹 쥐었다.
잘게 떠는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질 낮은 도취감을 선사했다. 이즈카엘이 아내의 턱을 손가락으로 살짝 들어 올렸다. 모멸과 슬픔으로 가득 찬 푸른 눈이 한겨울 아우뉴 호수 같았다.
“……내일은 외출할 준비를 하도록 해.”
계속 들여다봐도 질리지 않는 눈이었다. 아내는 어느 한구석 어여쁘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특히 눈이 아름다웠다. 웃고 있어도 울고 있어도 저만 가지고 싶게.
이즈카엘은 충동적으로 아내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만 겹친 가볍지만,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갑작스러운 일임에도 헤레이스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놀란 듯 눈을 크게 뜰 뿐. 그녀는 힘을 빼고 남편이 뜻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아우뉴 호수에 갈 거야. 오랜만에 당신도 동행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알았어요.”
한참 만에 입술을 뗀 이즈카엘이 퉁명스레 명했다. 뭐든 순순히 따르는 아내가 만족스러워야 하는데 이상하리만치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빤히 아내를 바라봤다.
“이만 가 볼게요.”
긴 시간 그가 말이 없자 헤레이스가 조심스레 그의 품을 벗어났다. 크림색 부드러운 천이 손에서 빠져나가자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의 손을 낚아챘다.
몸을 돌리려던 헤레이스가 그를 봤다. 심장을 불쾌하게 하던 초조함이 아주 약간은 가셨다. 이즈카엘이 헤레이스를 다시 자신의 품으로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날이 어두워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잖아.”
“…….”
“번거롭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그냥 여기 있어. 어차피 곧 와야 하잖아. 당신은 저녁도 이미 먹은 거로 아는데.”
“하지만 안나를 에르젠에게 보내야 하고 아직은…….”
아이……. 또 아이였다. 이즈카엘이 짜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건 사용인을 보내 전달해도 되잖아. 그보다 난 당신이 먼저 침실에 가 있었으면 해.”
사내의 일방적인 명에 마지막으로 아이를 보려던 얕은수가 사라졌다. 간신히 쥐고 있던 희망이 사라지자 헤레이스가 허무한 얼굴을 했다.
‘당분간 보기 힘들 텐데…….’
아직 밝은 밖을 바라보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해는 반쯤 지평선에 걸쳐 있었다. 사내가 답을 종용하듯 그녀의 몸을 세게 껴안았다.
헤레이스가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사내가 원하는 답을 말했다.
“……뜻대로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