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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21화 (21/108)

21화.

느슨해진 남편의 태도에 헤레이스가 주춤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이즈카엘이 턱짓으로 어서 말해 보라 재촉했다.

헤레이스는 눈꺼풀을 내리깐 채 최대한 차분히 답하려 애썼다. 그러나 울음기는 쉬이 가시지 않아 말 속에는 서러움이 가득했다.

“당, 당신은 더는 날 사랑하지 않잖아요. 아끼지도, 전처럼 대해 주지도 않으니까…… 계속 이리 불편할 거라면 차라리 그만하고…….”

“…….”

“……내가 떠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그게 피차 편할 거예요. 어차피 당신에게 난 별 도움도 안 되잖아요.”

“…….”

“조용히 나갈게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그저 에르젠과 떠날 정도의…… 그 정도의 경비만 주면 그다음에는 알아서 할 수 있…… 아!”

헤레이스의 말이 이어질수록 이즈카엘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졌다. 결국 그는 다시 아내의 턱을 쥐어 잡았다. 그가 아내의 얼굴을 가까이 당기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래. 맞아. 난 전처럼 당신을 아껴 줄 수 없어.”

“아…….”

“당신 말마따나 빌어먹을 마음이 변했거든. 하지만 헤레이스, 당신이 뭔가 크게 착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언제 당신보고 여길 떠나라 명했던가?”

“…….”

“……혹 핑계를 대며 아이 아비에게 가려는 건 아니고?”

이야기가 제자리를 돌았다. 이제는 정말 헷갈렸다.

그는 그 여자와 아이를 위해 자신을 모함하는 걸까. 아니면 진정으로 자신이 부정을 저질렀다 믿는 걸까. 어느 쪽이든 헤레이스는 숨이 막혀 미칠 것 같았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란 말이…….”

미워! 당신이란 사람이 너무 미워!

헤레이스가 손톱을 세웠다. 잡힌 고개를 어떻게든 저으며 그녀가 제 얼굴을 잡은 손을 긁어내렸다. 사내의 손등에 붉은 줄이 그이며 핏방울이 맺혔다.

그럼에도 이즈카엘은 끄떡하지 않았다. 그가 헤레이스를 옆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풀썩 쓰러진 그녀가 고개를 들고 몸을 가누기도 전에 이즈카엘이 헤레이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내의 뺨에 가져다 댄 손등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헤레이스, 당신이 이리 아름다운 이상, 난 당신을 버리지 않아. 내가 왜 비싼 값 치르고 데려온 당신을 쉬이 포기하겠어? 아직 쓸 만한 구석이 얼마나 많은데.”

이즈카엘이 두려웠다. 그는 그녀를 한낱 자신의 욕정받이로 생각하듯 일말의 배려도 베풀지 않았다.

“내 태도가 전만 못하다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데 착각 마. 내가 변했든 말든 그건 당신과는 하등 상관없어. 내가 당신을 아끼든, 사랑하든, 미워하든 버리겠다 먼저 선언하지 않는 이상 당신은 여기 있어야 한다고.”

“난…….”

“물론 당신이 부정을 저질렀다 해도 마찬가지야. 당신은 내 명이 있기 전에는 어디도 못 가. 알아들어?”

말이 통하지 않았다. 헤레이스는 이제 부정하는 것조차 포기했다.

그녀가 몸을 늘어뜨린 채 죽죽 눈물만 흘리자 이즈카엘의 눈에서 누르지 못한 분노가 튀었다. 그가 아내의 뒤통수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긴 머리채를 잡아 꽉 쥐었다.

“아……!”

“……왜 그런 얼굴을 해? 억울하기라도 한가?”

반응 않는 아내가 거슬렸다. 차라리 반항한다면 이처럼 분노가 일지는 않을 텐데.

그의 아내는 매사 이랬다. 그가 정부를 데려와서 대놓고 무시해도 항상 처연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도를 지나친 언사가 행해진 후에도 겨우 울기만 할 뿐.

이즈카엘은 헤레이스가 이럴 때마다 그날이 생각나 숨이 가빠졌다. 구역질이 올라오고 머릿속이 계속해서 도는 것 같았다.

“억울해할 필요 없어. 그새 또 잊은 모양인데 당신은 내게 주어진 포상이야. 지금껏 본인에게 무언가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착각하면 곤란하지.”

“으…….”

“내가 그때 분명 알량한 지위를 유지하고 싶으면 노력하라 했지. 왜 그랬겠어?”

입은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지만 뇌리에는 계속 그날의 장면이 맴돌았다. 웃고 있는 아내가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지금 당장 제 아래에 있는 얼굴이 그와 대조되었다. 그걸 보고 있으면 이성은 통제를 벗어났다.

왜 내 앞에서는 항상 이따위 얼굴이야? 왜 당신은 나를 보지 않아?

“당신을 그걸 쫒겨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소리로 알아들은 모양인데 그건 큰 착각이야. 그 말은 내 기분 여하에 따라 처지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었어.”

“…….”

“난 수틀리면 당신을 정부, 아니 노예로라도 부릴 참이야. 하지만 어떤 신분으로 있든 헤레이스 그대가 자의로 이 성을 나가는 일은 없어. 그러니 한 번만 더 그만하겠다느니 그따위 건방진 소리를 늘어놓으면 그때는 정말 당신과 당신 애새끼를 노예로 내쳐 버릴 거야.”

“그, 그러지 말아요. 내가…….”

아이를 인질로 잡자 헤레이스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눈동자를 잘게 떨며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상대의 약점을 알아챈 이즈카엘이 입매를 간악하게 끌어 올렸다.

“내 말 허투루 듣지 말고 똑똑히 새겨 놔. 이 이상 내 심기를 거스르면…… 당신 모자는 곧장 노예로 떨어지는 거야. 그 후에 당신 아들이야 어찌 되든 관심 없으니 적당한 곳에 팔아 버리면 될 노릇이고…….”

당장 자신이 처한 상황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헤레이스는 아들을 팔아 버린다는 무도한 말에 감히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공포로 질린 눈이 애걸하듯 남편을 바라봤다.

“……헤레이스 당신은 내 침실에 가둬 두면 편하겠어. 하기야 사실 내가 당신에게 받아 갈 거라곤 이것뿐이니 당장 행해도 내게 나쁠 건 없지. 어때? 정말 그리해 줘?”

헤레이스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신이라도 되는 양 벌을 내리지 말라 애원하는 미물처럼 그렇게.

이즈카엘은 그런 아내가 퍽 마음에 찼다. 그가 이번에는 아내의 침의를 걷어 올렸다.

창백하다 느껴질 정도로 흰 살결이 드러나자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마음이 진정됐다. 그가 조금 전보다 차분히 말을 이었다.

“싫어? 그러면 알아서 행동거지 똑바로 해. 처지 파악 못 하고 날뛰는 건 이번 한 번으로 족하니까.”

헤레이스가 울음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즈카엘은 아내에게 상이라도 내리듯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녀를 제 위로 안아 올렸다. 순식간에 남편을 내려다보게 된 헤레이스가 의아한 낯으로 그를 보며 붉어진 눈가를 훔쳤다.

“……알아들었으면 당신이 내게 먼저 애교라도 부려 봐. 아양이라도 떨며 잘 처신하란 말이야. 당장 더러워진 내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남편의 치욕스러운 타박에 헤레이스의 몸이 일순 티가 나게 굳었다. 그녀가 덜덜 떨리는 손을 어떻게든 뻗어 남편의 가슴 위에 놓았다.

“주제에 어디 감히 멋대로 그만하겠다느니 나가겠다느니 말을 늘어놓아? 정말이지 더러운 기분이야. 기가 차는군.”

가느다란 손가락이 저를 감질나게 더듬자 이즈카엘의 목소리가 한껏 나른해졌다. 그러나 담겨 있는 말은 여전히 지독해 결국 헤레이스는 다시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간신히 닿았던 손이 돌아갔다. 헤레이스가 연신 눈물을 닦으며 잘못했다는 말만 반복했다. 남편의 말이 너무도 두려웠다. 정말 그가 그리할까 봐 손이 벌벌 떨렸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던 이즈카엘이 길게 한숨을 쉬다 혀를 찼다. 그가 울음에 엉겨 있는 작은 손을 다시 자신에게로 끌어 놓으며 말했다.

“……내 아내는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군.”

* * *

방 안은 남은 열기가 자욱했다. 하지만 그 온기는 따뜻하다기보다 불쾌해 방 분위기를 어둡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이제부터 저녁때면 당신이 먼저 나를 찾아. 일이 있으면 올 필요 없다고 사람을 보내지.”

이즈카엘이 일어서서 상의를 정돈하며 말했다. 헤레이스와 달리 그는 어느새 멀끔해져 있었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헤레이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약하긴 했으나 움직임을 분명 보았을 텐데 이즈카엘은 아내의 태도가 불만인지 다시 침대에 앉았다.

이즈카엘이 손을 뻗어 아내의 드러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적당히 열기 있는 큰 손은 따뜻했으나 헤레이스는 남편의 손길에 바짝 움츠러들었다. 이즈카엘이 잘게 떠는 아내를 보며 인상을 구기다 나지막이 읊조렸다.

“헤레이스, 똑바로 대답해야지.”

“……네.”

쉬어 버린 목소리에는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대답을 한 뒤 두어 번 기침하는 아내를 보며 이즈카엘이 손을 거뒀다.

“그럼 이만 쉬어.”

거친 발소리가 나더니 곧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이즈카엘이 나갔음을 짐작한 헤레이스가 몸을 둥글게 말며 꾹 눌러 왔던 감정을 터트렸다.

“싫어. 나갈 거야. 나, 나갈 거야…… 흑.”

* * *

“아내가 오늘은 네게 뭘 물었지?”

“평소와 별다를 게 없으셨습니다. 에르젠 도련님이 어떠하신지 물으셨고 그 외는 다른 질문은…… 아!”

의원은 허리를 깊이 숙이며 답하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허리를 폈다. 그 앞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이즈카엘이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응시하는 금안에 의원이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도련님께서 언제부터 외출해도 되는지 물으셨습니다. 그, 아우뉴 호수에 도련님을 데리고 가고 싶으시다면서요.”

“그래서 뭐라 답했나.”

“에르젠 도련님께서는 몸이 약해 아직은 짧은 산책 정도가 적당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이가 약하다는 말에 분명 또 침울한 얼굴을 했겠지.

이즈카엘은 아이에게 집중하고 있을 아내를 떠올렸다. 푸른 눈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아이를 살펴보고 있을 것이고, 작은 손은 아이를 안타까워하며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제게는 꽉 다물려 있는 입이 쉴 새 없이 열리겠지. 미안하다. 사랑한다. 그따위 말과 함께.

그저 그랬던 기분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뚝 소리를 내자 의원이 흠칫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즈카엘이 나가 보라며 짜증스레 손짓했다.

혼자 남겨진 이즈카엘은 창가에 서서 밖을 봤다. 아우뉴 호수…… 보는 것만으로 아내의 눈을 그리게 하는 장소였다.

‘같이 다녀온 지가 꽤…….’

그러고 보니 함께 가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

두 사람은 1년 전까지만 해도 날씨가 아주 나쁘지 않은 이상 거의 매주 호수에 들렀다. 헤레이스는 깊은 호수를 무서워하면서도 좋아해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몇 시간이고 호수를 바라봤다.

물론 이즈카엘의 눈에는 시퍼런 호수 따위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호수를 닮은 아내의 푸른 눈을 감상했다.

‘호수에 가고 싶다라…….’

별로 특이할 것 없는 말이었으나 이유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이즈카엘은 멀리 보이는 호수를 노려보다 다시 자리에 앉아 고개를 젖혔다. 눈을 감으니 불편했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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