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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20화 (20/108)

20화.

헤레이스가 몸을 떨었다. 남편의 억설과 무도함에 이제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그녀가 씨근덕거리며 이즈카엘을 노려봤다.

“고작 그런 거로 나와 에르젠을 의심하는 거라면…….”

“물론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야. 사실 당신 아들의 생김새 따위야 뭐가 됐든 내 알 바 아니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태도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헤레이스가 입을 다물었다. 말문이 막히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 것. 당신 아들…….

그는 진정으로 에르젠이 본인의 아들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다.

헤레이스의 서글픈 울음에도 이즈카엘의 낯은 변함없었다. 그는 제 아래 있는 아내에게 집중하며 말을 이었다.

“……내 의심은 오롯이 당신 탓이야, 헤레이스.”

아내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쓸고, 무엇보다 소중한 것인 양 뺨을 매만지는 모습은 영락없는 애처가였다. 하나 이즈카엘의 입에서 나오는 숨결은 전설 속 용의 피로 만들어졌다는 독보다 독했다. 그가 독기를 감추지 않은 채 비수 같은 이빨을 드러내 헤레이스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헤레이스, 내 아름다운 아내……. 당신은 어쩜 이리 아름다운지.”

사내의 손가락이 헤레이스의 쇄골을 훑었다. 이따위 상황에서도 멋대로 지분거리는 손길에 헤레이스가 신경질적으로 버둥거렸다. 이즈카엘이 반항하는 아내의 여린 몸을 강제로 찍어 누른 채 비죽 웃었다.

“저 아래 죄인의 핏줄로 떨어졌어도 이 얼굴과 몸만은 참 어여쁘단 말이야. 어느 누가 당신을 아이 딸린 여자로 볼까?”

“비, 비켜요!”

“그래서 그런가 계속 생각하게 된단 말이지. 천하디천해진 당신은 여기까지 천해지다 못해 타락해서…….”

“저리 비켜!”

“……다른 사내와 밤을 보내진 않았을까, 그 새끼와 눈을 마주하고 입을 맞추지는 않았을까 하고 말이야.”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의 접촉에 당황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잖아도 아픈 몸이었다. 당장 움직이기도 힘든데 온갖 모욕에 이런 취급까지 받으니 당장에라도 혼절할 듯 몸이 떨려 왔다.

그러나 아내의 표정을 구경하듯 살피는 사내는 여전히 느긋했다. 그가 겁에 질려 창백해진 헤레이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당신은 이 얼굴로 웃어 줬겠지. 그런 다음 이 손으로 그놈의 뺨을 쓸었을 테고…….”

“…….”

“……이리 입을 맞췄을 거야.”

나한테 했던 것처럼 말이야.

사내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헤레이스가 일순 몸을 굳히며 눈동자만 굴려 남편의 의중을 살폈다. 그는 지나치게 평온해 보였다. 그녀와 꼭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다정하고 여린 당신이라면 울었을지도 모르겠군. 그 입으로 작은 새처럼 속살거리면서 젖은 눈을 하겠지. 더없이 애처롭게. 그리고 그다음은 자연히…….”

말을 하다 말고 무언가를 떠올린 이즈카엘의 금안이 서서히 깊어졌다. 그러더니 종국에는 완전히 가라앉았다. 그는 이지가 없는 짐승의 것처럼 빛을 잃은 눈으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내의 손이 꽉 묶인 리본을 툭 건드렸다.

“……항상 생각해. 당신에게서 태어난 그게 과연 내 씨일까? 아니면 당신과 밤을 보낸 그 새끼 씨일…….”

짝!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나른한 목소리가 매서운 소리와 함께 멈췄다. 헤레이스는 멋대로 침의를 풀어 헤치는 손에 경악할 틈도 없이 손을 올려붙였다. 불편한 자세였지만 어떻게든 남편을 쳐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어, 어디서 그따위 말을!”

“…….”

“다른 여자를 끌어들인 건 이즈카엘 당신이잖아! 그런데 뭐? 밤…… 밤을 보내?”

“…….”

“이 미친놈! 이즈카엘 당신은 미쳤어! 미쳤다고!”

그게 헤레이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분노 표출이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쉴 새 없이 미쳤다며 소리쳤다. 분노에 휩싸인 그녀는 평소와 달리 제법 매서웠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약한 체력이 문제였다.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의 뺨을 한 대 친 것만으로 거의 모든 힘을 소진했다. 그녀의 몸이 두어 번 흐느적거리다 결국 축 처졌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나한테…… 에르젠한테…… 당신이 어, 어떻게…… 흑.”

“…….”

“……내가 싫어졌어도…… 이제 그 여자를 사, 사랑한대도 이건 아니야. 내가 당신을…… 이즈카엘 당신을 어떻게…… 생, 생각했는데…….”

그나마 자유롭게 움직이는 건 입뿐이었다. 헤레이스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남편에게 더듬더듬 겨우, 그러나 차근히 말을 이었다.

순간 이성을 잃고 욕을 하면서도 생각해 봤다. 그가 왜 이렇게까지 지독히 굴까? 왜 그런 악랄한 말을 하며 저와 아이를 벼랑 끝으로 몰까?

“날 이렇게 모욕할 거라면…… 이렇게까지 해서 날 물러나게 할 심산이라면 힘 뺄 필요 없어요.”

“…….”

“당신이 끼고 온 그 여자한테 옆자리를 주고 싶으면 그리해요! 당신을 닮은 그 아이한테 후계 자리를 줘! 줘 버리라고! 다 당신 마음대로 하란 말이야!”

생각해 볼수록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즈카엘은 그 여자와 그 여자의 아들을 위해 이렇게 행동할 가능성이 컸다. 그가 데려온 여자는 신분이 처졌다. 죄인으로 떨어진 헤레이스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즈카엘이 그 아들을 밀어주고는 있으나 미천한 출신인 정부의 배에서 태어난 핏줄을 후계로 내세운다면 나중에 말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그는 걸림돌이 될 헤레이스와 그녀의 아들을 부정한 말로 미리 제거하려 드는 것이리라. 부정을 저지른 간악한 부인의 불안정한 후계보다야 창부 출신의 확실한 후계가 나으니 말이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헤레이스는 인정했다. 그의 검 끝이 자신을 향했다는 것을. 그러니 더 다치기 전에 버림받은 이는 스스로 물러나야 했다.

만사에 친절한 이즈카엘이었지만 그는 적에게만은 냉정해 조금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그나마 일말의 자비를 베풀어 줄 때 떠나야지, 아니면 언젠가 사내의 손에 그의 적이 그랬던 것처럼 잔인하게 도륙당할 터였다.

“어차피 이제 나한테도 당신은…… 흐으.”

“…….”

“……나랑 에르젠한테도 당신 같은 인간은 필요 없, 없어요. 그러니까…….”

억지로 거짓을 담은 흐느낌이 길게 이어졌다. 헤레이스는 말을 매듭짓지 못한 채 뭐가 그리 서러운지 몇 번이고 새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 그러니까…… 흑.”

다음 말을 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헤레이스에게 그는 아직 사랑이었다. 그 지독한 지하 감옥에서 저를 꺼내 준 구원자. 초라한 자신을 끝내 보듬어 줬던 사람이자 하나뿐인 아들의 아버지. 그런 그를 마음에서 떼어 놓기란 목숨을 잃는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제 끝내야 했다. 그녀에 대한 모독이라면 참을 수 있었으나 사랑이 식어 버린 남편은 매정함은 그들의 아들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아이는 빠르게 자라 언젠가는 저런 말을 알아듣게 될 터였다. 그때가 되면 가여운 아이에게 뭐라 설명할 건가.

헤레이스는 최악의 형태로 스러져 버린 그들의 사랑을 억지로 놨다. 이 이상 상처받는 것도, 자신에게 쏟아졌던 비수가 에르젠을 향하는 것도 두려웠다. 더는 견디고 싶지도, 견딜 자신도 없었다.

끅끅, 힘겹게 울음을 참은 헤레이스가 잠시 숨을 멈춘 채 이즈카엘을 올려다봤다. 사내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긴 했으나 헤레이스와 비교한다면 거의 무표정에 가까웠다.

헤레이스가 파르르 떨리는 입가를 간신히 진정시킨 뒤 힘겹게, 그러나 선명히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해요.”

3장. 구속

그 말을 하고 헤레이스는 눈을 내리깔았다. 어떤 대답이 돌아오든 온전히 들을 자신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도 상대는 반응이 없었다. 헤레이스는 무어라 할 법한 남편이 작은 미동조차 없자 잔뜩 긴장한 상태임에도 힐끔 눈을 떠 위를 봤다. 그녀가 곧 제 결정을 후회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호박색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쥐가 뱀을 마주하듯 저절로 몸이 굳었다. 아무 반응도 없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 이즈카엘의 무감한 표정은 아까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얼핏 보기에는 구겨져 있던 미간이 펴져 짜증이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가면처럼 무심한 얼굴 위 묻어 나오는 기세는 흉흉했다. 당장에라도 사람을 여럿 죽일 것 같은 살기가 사내의 얼굴에 넘실거렸다.

전쟁터에서 일평생 구른 기사라도 섬뜩함을 느끼고 물러나 도망칠 법했다. 헤레이스는 당장에라도 목을 쳐 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기운이 저를 향하자 바람 맞은 나무처럼 벌벌 떨었다.

“헤레이스.”

이즈카엘이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아내를 불렀다. 목소리를 듣고 헤레이스는 확신했다. 그는 겨우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단단히 당겨진 턱과 상의 아래 움직이는 근육의 모양새가 당장에라도 튀어나갈 듯 흉포했다.

기뻐하지는 않더라도 알았다고 쉬이 수긍할 줄 알았는데……. 어찌할 바 모른 채 헤레이스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하얀 얼굴만큼이나 희게 질린 입술에 사내의 시선이 닿았다.

“뭘 그만하고 싶은데.”

스산한 목소리와 함께 여린 어깨가 단단히 붙들린다 싶더니, 누워 있던 몸이 순식간에 일으켜 세워졌다. 곧이어 사내가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채듯 잡았다.

“난…… 악!”

거의 내동댕이쳐지듯 앞으로 끌어당겨진 헤레이스가 비명을 질렀다. 강제로 꿇게 된 무릎 밑으로 이불이 아무렇게나 구겨졌다.

“머저리처럼 떨지 말고 제대로 말해. 뭘 그만하고 싶다는 거지?”

헤레이스를 붙든 이즈카엘은 거인 같았다. 그가 아내의 턱을 세게 쥔 채 들어 올렸다. 목이 뽑힐 것 같은 아픔에 헤레이스가 신음하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울며 화를 내던 기세는 어느새 완전히 사라져 자취를 감췄다.

“나…… 나는 에르젠만 있으면 돼요. 그러니까 내 말은…….”

“그래서 당신 애새끼랑 여길 떠나기라도 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에 헤레이스가 눈짓으로 긍정을 표했다. 눈물을 가득 매단 채였지만 결연한 표정만은 확고한 뜻을 밝히고 있었다.

“……우습지도 않아.”

이즈카엘이 비소를 흘렸다. 그가 아내의 말간 얼굴을 쥔 채 비스듬히 비틀었다. 사냥당한 노루처럼 길게 늘어진 목이 애달팠다.

제 얼굴을 쥔 손을 떼어 내려 애쓰며 헤레이스가 몸부림쳤다.

그녀는 도통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번거롭게 모함 따위 하지 않아도 제 발로 나갈 텐데……. 나가 준다는데도 왜 이러는 건가. 울컥 솟은 억울함에 공포심이 잠깐이나마 사라졌다.

“어차피 나랑 함께하는 거 싫어하잖아요!”

헤레이스가 그를 노려보며 소리 지르자 이즈카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가 손아귀 힘을 살짝 풀며 헤레이스에게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

“왜 내가 당신과 함께하길 싫어한다 생각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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