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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19화 (19/108)

19화.

‘……그때 대가로 받아 간 게 뭐지?’

이즈카엘은 그것과 담판을 지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품었던 의심을 드러내자 기다렸다는 듯 아내의 소식이 들어왔다.

‘그게 부인께서…….’

헤레이스의 상태는 평소보다 위중했다. 하인은 부인의 몸이 고열로 끓고 있고, 당최 헛소리만 하시는 게 심상찮다며 조심스레 전했다. 이즈카엘은 그 말에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이, 이즈카엘…….’

그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희미하게나마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이즈카엘은 침대 옆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아내의 손을 잡았다.

몸이 약한 사람인데……. 미친 짓을 해도 단단히 미친 짓이었다. 항상 아닌 척했지만 태생부터 자존심이 강한 이였다. 분명 그날의 일에 크게 충격받아 이리됐겠지.

이즈카엘은 하녀고 하인이고 모두 물린 채 아내의 곁에 온종일 머물렀다. 식은땀을 흘리는 아내는 너무도 창백해 당장 깨지고 부서져도 이상할 거 같지 않았다.

“샤를…….”

자책을 하던 그의 금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질 때였다. 헤레이스의 입에서 그 아닌 다른 사내의 이름이 나왔다. 샤를……. 이복동생의 이름에 아내의 손을 붙잡고 있던 그가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음험한 기운이 후회를 완전히 지웠다.

아내가 출산하던 그날의 새벽이 떠올랐다. 이즈카엘의 심장 어귀에서 가늘고 뾰족한 거스러미가 돋았다. 침대 머리맡에 처박고 있던 고개가 슬그머니 올라왔다. 걱정으로 새하얗던 머릿속에 검은 선이 죽죽 그이더니 아무렇게나 공간을 차지했다.

헤레이스는 눈을 감은 채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저는 모르는 그 공간에서 도대체 제 남동생과 무얼 하는지. 표정 하나하나, 목소리 한 음절마다 모두 애틋했다. 이즈카엘은 흐느적거리며 올라온 가는 손가락을 그대로 꺾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잡아 눌렀다.

그에게 질투는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항시 달라붙는 그림자였다. 기이하게 일렁이던 금안을 거대해진 그림자가 삼켰다. 그는 가만히 아내의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본디 얇고 부드러운 붉은 피부는 고통에 퍼석하게 말라 군데군데 희게 일어나 있었다.

“샤를…… 나는…… 난…….”

듣기 싫었다. 이즈카엘이 뒤틀린 입을 한 채 아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다른 사내의 이름을 외는 숨을 들이 삼켰다. 숨이 틀어막혀 답답한지 아내가 앓는 와중에도 몸을 비트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즈카엘은 멈추기는커녕 헤레이스에게 더 깊이 입을 맞췄다. 그의 혀가 목구멍까지 막자 경련하듯 버둥거리던 손이 어느새 툭 떨어졌다.

아내가 한계에 다다른 다음에야 이즈카엘은 입을 뗐다. 헤레이스가 컥컥 크게 숨을 뱉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아…….”

푸른 눈에는 물기가 아직 그득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가가 마르기에는 때가 아직 멀었다. 진정한 악몽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으니…….

남편을 알아본 헤레이스가 상체를 일으킨 후 그를 부르려다 밭은기침을 터뜨렸다. 침대 바로 옆 탁상에 물과 유리잔이 있었지만 그는 콜록거리는 아내를 가만히 응시할 뿐, 물을 건네거나 다정히 등을 도닥이는 행동 따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내의 숨 하나까지 모조리 마실 듯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지켜봤다.

“이즈카엘…….”

한참 만에 진정한 헤레이스가 그를 마주 봤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삼킬 듯 집념 어린 눈빛에 어딘가 광기가 차 있었다. 제 곁에 있어 준 그를 향해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이려던 헤레이스가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섰으나, 손에 닿는 것은 딱딱한 침대 헤드였다. 도망칠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즈카엘이 물러나려는 그녀를 쫒아 자신의 손을 그녀의 가는 목에 가져다 댔다. 흰 얼굴 아래 드러난 목은 사내의 한 손에 잡힐 만큼 얇았다.

짙은 그림자에 가려진 사내의 윤곽은 반쪽만 뚜렷했다. 그가 그늘진 눈가를 한 채, 고저 없는 목소리로 헤레이스에게 물었다.

“……에르젠의 아비가 누구지?”

사내는 어느새 침대 위에 올라와 있었다. 어둑한 밤 헤레이스의 목에 손을 올린 그는 당장에라도 힘을 줄 것처럼 위압적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위협하는 손길과 형형한 눈빛에도 헤레이스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남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으로 물든 푸른 눈이 사내의 굳건한 입매에 닿았다.

“그게 무슨…… 무슨…….”

간신히 떨어진 입술의 색이 옅었다. 헤레이스는 자신이 들은 말을 상기하며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쥐었다. 그녀가 아연한 기색을 숨기지 않자 이즈카엘이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날카롭게 떨어지는 콧날이 당장에라도 헤레이스를 내리 벨 듯 서늘했다.

“못 알아들을 정도로 어려운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

“말 그대로야. 에르젠의 아비가 누구지? 솔직하게 말해.”

에르젠의 아비……. 헤레이스는 하얗게 질린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그 말을 되뇌었다. 수없이 곱씹어 생각해 봐도 그가 묻는 바는 처음에 느낀 것 그대로였다. 더러운 부정을 의심하는 말.

믿을 수 없었으나 남편은 그녀에게 부정한 짓을 저질렀냐며 감히 묻고 있었다.

헤레이스가 온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이즈카엘의 뺨에 손을 올렸다. 사내는 아내의 손이 제 얼굴로 향하자 슬그머니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 금안이 제 볼에 닿은 아내의 손을 응시하다가 이내 울먹한 푸른 눈과 마주했다.

“이, 이즈카엘, 장난치지 말아요. 에르젠의 아비라니 그 무슨 무도한…….”

“…….”

“어디서 그런…… 그런 말도 안 되는…….”

뺨을 더듬거리는 손이 입에서 나오는 말 만큼이나 떨렸다. 그녀의 푸르스름한 눈동자처럼 질린 얼굴이 어두운 방 안에서도 선명했다.

“당신이 무슨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말을 물려요.”

“…….”

“실, 실수했다고……. 실수라고 말하란 말이에요! 당장!”

목소리 끝은 날카로웠으나 절박함을 담고 있었다. 사내의 뺨을 맴돌던 하얀 손이 내려가더니 흰 상의 셔츠를 잡았다. 귀한 은사로 가장자리를 넝쿨 모양으로 수놓은 상의가 와락 구겨졌다.

헤레이스의 거친 행동에도 사내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무너질 것 같은 아내의 얼굴에도, 잔뜩 구겨진 제 옷자락에도 표정이 없었다. 한참 무감한 얼굴로 아내를 들여다본 그가 덤덤히 말을 내뱉었다.

“……내가 왜?”

무도한 반문에 헤레이스가 고함지르듯 말했다.

“무슨……! 에르젠은 우리 아이예요.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우리가 함께 가진, 신께서 주신 하나밖에 없는 우리 아이라고요!”

얼핏 보면 화를 내는 모양새였으나 어찌 보면 애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헤레이스가 그의 옷깃을 쥔 채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굳건히 고정된 사내의 몸은 단단했다.

결국 온 힘을 다한 손짓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건 헤레이스뿐이었다. 부질없는 손길이 점점 약해지더니 어느 순간 멈췄다.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서러움을 쏟아 냈다.

사실 헤레이스는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남편의 그따위 말을 했다는 걸.

“어, 어떻게 그런 말을…….”

헤레이스가 잘게 떨며 눈물을 떨구자 이즈카엘이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그리 강한 힘도 아니었건만 지친 헤레이스는 제대로 반항조차 못 한 채 그에게 끌려갔다.

“헤레이스, 나를 믿게 하려면…….”

어느 틈인가 헤레이스는 다시 누워 있었다. 사내가 그녀의 젖은 뺨을 쓸고 매만졌다. 흩어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자그마한 귀가 드러났다. 그를 향해 몸을 숙인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리 울 게 아니라 날 닮은 애새끼를 낳았어야지. 그런 뒤에 당신 결벽을 주장했어야지. 이렇게 허술히 나를 속이려 들면 아무리 당신한테 미쳐 있던 나라도 심사가 뒤틀리지 않겠어?”

어린아이에게 처음 숫자를 가르치듯 조곤조곤한 어투였다. 하지만 내용은 신랄한 비판에 가까웠다. 에르젠을 욕지거리로 비유한 것도 모자라 더러운 부정을 확실시하는 말에 헤레이스가 붙잡힌 몸을 비틀며 소리를 높였다.

“아니라고 하잖아요! 왜…… 대체 왜 그런 오해를 하는 거예요! 이즈카엘, 제발…….”

갑갑했다. 아니, 그런 말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을 감정이 온몸을 지배했다. 숨구멍뿐 아니라 폐마저 굳어 가는 기분이었다. 가뭄이 들어 말라 버린 호수에 갇힌 은어처럼 헤레이스가 헐떡였다.

아까처럼 목을 쥐고 있는 것도 아닌데……. 흐릿한 시야 속에 헤레이스가 겨우 숨을 쉬며 남편을 바라보다 그를 밀쳤다. 그러잖아도 답답한 몸에 바짝 붙은 그를 견디기 힘들었다.

1년 전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 햇볕을 받은 눈처럼 반짝이는 은발과, 황금처럼 반짝이는 눈은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남편의 숨이 닿으면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고, 저와 다른 큰 손이 닿으면 그 부근부터 시작해 온몸이 따뜻해졌다.

‘왜 이렇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지금은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헤레이스는 자신을 누르는 이 끔찍한 압박감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 버둥거렸다.

이즈카엘은 애써 저를 밀어내는 아내에게 몸을 더 가까이 했다. 헤레이스가 도리질을 치며 떨어지라고 그를 두드렸으나 무용한 몸짓이었다.

“억울한 얼굴 마. 당신 아들 말이야. 미겔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한구석 날 닮은 부분이 있나?”

갑작스레 떨어진 말에 답이 막혔다. 비수가 심장에 꽂힌 듯 몸이 굳었다. 에르젠은 확실히 아비인 이즈카엘과 닮은 부분이 많지 않았다. 그를 꼭 닮은 그 여자의 아들과 다르게.

에르젠은 누가 봐도 헤레이스와 닮았다. 검푸르게 타고난 색도, 전체적인 윤곽도, 유순한 눈매도 모두 그녀가 준 것이었다.

헤레이스는 아들을 볼 때면 그 사실이 미안했다. 별 도움 못 되는 자신이 아닌, 아비인 이즈카엘을 닮았으면 그가 에르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홀로 눈물을 흘린 것도 여러 번이었다.

“머리색이나 눈알 하나라도 나와 같은 구석이 있어야지. 그래야 내 의심이 사라졌을 거 아니야. 하지만 헤레이스, 당신 태에서 난 그건 신기할 정도로 당신만 빼닮았잖아?”

그렇다 해서 부정의 산물로 의심받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에르젠은 아직 제대로 자라지 못한 아기였다. 아이가 나중에 어찌 클지는 아무도 몰랐다. 게다가 이즈카엘의 말대로라면 부모와 닮지 않은 자식은 모조리 부정의 결과물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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