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을 꺾는 악마여-18화 (18/108)

18화.

헤레이스는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다. 그때와 같았다. 집안이 멸문하고 기사들이 그녀를 끌어내 축축하고 음습한 감옥으로 밀어 넣었을 때. 그래. 꼭 그때처럼 그녀는…….

혼자였다.

헤레이스는 두려움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얼굴을 묻었다. 사방에서 무언가 타는 매캐한 냄새가 나더니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귀를 막고 얼굴을 더 깊이 파묻었지만 소용없었다. 무언가 축축하고 질척한 느낌에 흘끔 아래를 보니 핏물이 고여 그녀를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다.

“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를 빙 둘러싼 피 웅덩이는 썩은 늪처럼 그녀의 다리를 묶고 점점 차올랐다. 턱 바로 아래서 출렁이는 액체의 비릿한 냄새에 헤레이스가 벗어나려고 팔을 뻗었다. 그러나 다리와 마찬가지로 몸에 딱 붙어 묶여 버린 팔은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구, 구해 줘요. 날 좀 여기서……. 이즈카엘…… 이즈카엘, 나 좀 도와줘요.”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는 그녀의 남편 이즈카엘이었다.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겁과 공포에 질린 그녀가 남편의 이름을 되뇌었다. 이즈카엘이라면 와 줄 터였다. 그때 그랬듯.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이즈카엘을 부르자마자 바로 앞 어두컴컴한 곳에 희뿌옇긴 했으나 빛이 들었다. 유일무이 밝아진 곳에 애타게 부르던 사내가 나타났다.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을 알아보고 웅덩이에서 손을 꺼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언가에 붙잡혀 있던 손이었거늘 그를 발견하자 기이하게도 자유로워졌다.

“이, 이즈카엘…… 흐윽.”

그러나 이즈카엘은 헤레이스 쪽으로 오지 않았다. 가만, 다시 살피니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서 반짝이는 금발 머리를 틀어 올린 여인, 그리고 여인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 세 사람은 무에 그리 즐거운지 웃고 떠들다 헤레이스를 발견하고 동시에 얼굴을 굳혔다. 남편의 냉랭한 얼굴을 본 헤레이스가 절망 어린 눈을 했다.

웅덩이에서 스멀스멀 핏물이 나오더니 이즈카엘을 향해 뻗은 팔을 감싸 다시 그녀를 늪으로 이끌었다. 철퍽하는 소리와 함께 헤레이스는 다시 결박됐다.

이즈카엘이 등을 돌렸다. 동시에 핏물이 한 단계 더 차올랐다. 왈칵, 입 안으로 닥치는 붉은 피에 헤레이스가 진저리 쳤지만 발악할수록 액체는 꾸역꾸역 더 들이닥쳤다.

“살려 주세요. 누, 누가 도와줘요.”

헤레이스가 고개를 최대한 든 채 간신히 말했다. 그러자 연극이 시작되기라도 하듯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은 빛이 바로 앞을 비췄다. 눈을 내리깐 헤레이스가 힘겹게 앞을 보다 나타난 이를 보고 고함쳤다.

“오라버니!”

감옥에 끌려간 이후 본 적 없던 오라비 크리스였다. 이즈카엘 덕에 그는 목숨만은 건졌으나 헤레이스의 결혼식조차 참석하지 못한 채 제국 밖으로 추방됐다. 고문 때문에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갔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팠지만 당시는 누구에게도 그런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오라비를 부탁한다고 남편에게 작게 웅얼거리는 것만이 그녀의 최선이었다.

‘헤레이스, 너만은 살아! 살아남아야 한다! 알겠지?’

크리스는 마지막으로 봤던 그날과 꼭 같은 모습이었다. 해진 옷에 군데군데 흐르는 피. 그런 와중에도 저만 걱정스레 바라보는 눈과, 제 손을 한 번이라도 더 잡기 위해 뻗은 팔.

오라비는 어릴 적부터 그랬다. 여동생에게 기이하게 구는 아비를 대신해 헤레이스의 아비 역할까지 한 그는 항상 제 안위보다 여동생을 먼저 생각했다.

코와 입으로 핏물이 들이치는 것도 잊은 채 헤레이스가 오라비의 손을 잡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녀가 몇 번 발을 휘젓기도 전에 오라비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어릴 적 아픈 어미를 대신해 그녀를 돌봐 줬던 중년 여인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아가씨, 이걸로 명예를 지키셔야 합니다. 후작님께서도 그걸 바라셨을 거예요.’

안나와 닮은 눈가에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여인이 엄지손톱만 한 주머니를 꺼냈다. 갈색 가죽 구두가 헤레이스의 눈앞에 다가오더니 푸르스름한 가루가 그녀의 얼굴로 우수수 떨어졌다. 그러자 어두운 와중에도 빛무리가 선명히 형성됐다.

“유모…….”

푸른 가루가 얼굴에 닿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무언가 숨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헤레이스가 겨우 숨을 내쉬며 컥컥거리자 중년 여인이 안쓰러운 얼굴로 한 번 더 눈가를 찍더니 곧 스르르 사라졌다.

“하으…….”

어질한 시야를 간신히 견딜 때였다. 흰 손 두 개가 나타나더니 헤레이스의 양 뺨을 세게 쥐었다. 번쩍 정신이 듦과 동시에 고고해 보이는 귀부인의 젖은 얼굴이 보였다.

‘헤레이스, 샤를을 버리지 말아다오. 샤를 그 아이는 너밖에 없어. 내가 죽으면 네가 샤를을 챙겨 줘야 한다. 그 가여운 아이를 부탁하마.’

울고 있는 귀부인은 황족 특유의 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헤레이스보다 조금 밝은 색의 푸른 눈동자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공포로 인해 이리저리 떨리고 있었다.

‘황녀님…….’

귀부인은 샤를의 어미인 율리스 황녀였다. 세르펜스 공작 부인이기도 했던 그녀는 반역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완전히 밝혀지기 직전 헤레이스를 찾아왔더랬다. 그때와 같이 비에 흠뻑 젖은 옷과 표정, 그리고 말이 서글펐다. 간절한 어미의 애원에 헤레이스가 울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황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일이 이렇게 됐지만 너를 이해해. 나라도 그랬을 거야.’ 황녀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가 헤레이스의 사죄를 받았다. 눈을 끔뻑이자 율리스 황녀가 그녀와 꼭 닮은 화사한 외모의 사내로 스르르 변했다. 예쁜 눈웃음과 다정한 얼굴이 주변을 밝혔다.

헤레이스의 약혼자이자 소꿉친구였던 사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뺨을 쓸었다. 적당히 긴 붉은 머리가 살랑이며 헤레이스의 뺨을 건드렸다. 헤레이스가 애처롭게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샤를…….”

‘형님은 좋은 사람이야. 형님은 나와 달리 널 지켜 줄 힘이 있어. 그러니 헤레이스…… 내게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샤를이 헤레이스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정돈한 뒤 어릴 적 습관대로 이마에 길게 입맞춤했다.

‘헤레이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떨렸다. 샤를이 고개를 떨구는가 싶더니 헤리이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간신히 웃고 있었으나 그의 따뜻한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미안. 헤레이스 너한테 너무 미안한데…… 말 안 하고는 못 배기겠어.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샤를은 매사 제 감정에 솔직했다. 반역이라는 어미의 죄가 드러나기 전까지만 해도 세르펜스 공작의 후계이자 황제의 조카였던 그였다. 자리에 걸맞게 구김살 없이 자란 그는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않았다. 덕분에 눈치 없다는 소리를 좀 듣기는 했으나 태생적으로 밝았던 그는 대부분의 이들에게 환영받았다.

그런 샤를에게 제 약혼녀인 헤레이스는 특별했다. 그가 유일하게 눈치를 보는 이가 헤레이스였다. 그는 진솔한 가운데도 그녀를 향한 배려를 한 번도 거둔 적이 없었다. 가끔은 너무 저돌적인 그의 고백이 부담스러웠지만 헤레이스 또한 그 바탕이 선함을 알고 있었기에 불쾌하지는 않았다.

‘헤레이스, 내가 널 많이 사랑해. 항상 좋아하고 있었어.’

그렇기에 헤레이스는 샤를에게 그저 미안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해 지난 세월 억지로 그를 지웠다. 헤레이스가 죄책감에 눈물을 보이자 샤를이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줬다.

‘마지막까지 이런 말로 부담 줘서 미안해. 내가 못난 놈이야. 그러니…….’

“샤를…… 나는…… 난…….”

‘……형님과 꼭 행복하게 살아야 해.’

목소리가 흩어지며 샤를은 잔상이 되었고 빛과 함께 스러져 갔다. 당장에라도 사라질 것 같은 그를 보며 헤레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가지 않았으면 했다. 모든 걸 잊고 그와 어울렸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샤를…… 읍!”

헤레이스를 단단히 붙잡고 있던 웅덩이가 더욱 그녀를 조여 왔다. 당황한 헤레이스가 고개를 저으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으나 모든 구멍이 틀어막아지며 머리끝까지 핏물이 차올랐다.

눈을 감으나 뜨나 온통 붉은색뿐이었다. 온몸을 잠식한 피비린내가 공포감을 한층 부각했다. 헤레이스가 신음조차 흘리지 못한 채 마지막 숨을 뱉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숨 방울마저 무언가가 울컥 집어 삼켜 버렸다.

* * *

헤레이스는 본래 몸이 약했다. 날씨가 추워지거나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그녀는 앓아누웠다.

출산처럼 건강한 이들도 힘들어하는 일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즈카엘은 반지를 빼앗은 이후 헤레이스가 당연히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헤레이스는 며칠 동안 잠잠했다. 방 안에 틀어박히긴 했으나 제 아들과 함께 잘 지내고 있다는 말에 이즈카엘은 기이한 배신감마저 느꼈다.

‘……왜 괜찮아?’

분명 저만의 쓸데없는 감정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제 미친 짓에도 멀쩡한 아내를 보는 건 전쟁에서 홀로 수십을 상대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못난 행동인 줄 알았지만 이즈카엘은 일부러 샬럿과 미겔을 자주 찾았다. 하는 짓 하나하나 번잡스러운 여자와, 보고만 있어도 경멸이 이는 인간 아닌 무언가를 매일같이 보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기대라는 것은 무서워서 이즈카엘은 아내가 작은 반응이라도 해 주기를 바라며 그 시간을 견디고 또 견뎠다.

‘헤레이스.’

언젠가부터 아내를 생각하면 이상하리만치 갈증이 나고 광기가 솟구쳤다. 특히 아내의 푸른 눈과 마주하면 꼭 전쟁에서 상대의 목을 베기 직전 같았다. 그 불길하고 긴장된 찰나의 순간이 길게 늘어져 그의 모든 시간을 지배했다.

‘이건 꼭 그 사람과…….’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제 행동에 대한 자괴감이 서서히 의문으로 바뀔 때였다. 이즈카엘은 문뜩 죽은 아비를 떠올렸다.

황제에게 맡겨져 수도에서 살게 된 이후 그는 멀쩡한 아비를 본 적이 없었다. 성인이 돼서 다시 마주한 아비는 삐쩍 곯은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숨만 붙은 시체와 마주했을 때의 기분이란……. 충격을 받지는 않았으나 기이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계속 뇌리에 어리는 건 어릴 적 아비의 모습이었다. 아비는 지금의 그처럼 어미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어미에게 도망이라는 죄가 있었다지만 그걸 감안해도 아비는 분명 지나치게 어미에게 집착했다.

의심은 당연하게도 아이의 인두겁을 뒤집어쓴 존재에게 향했다. 그것의 존재는 불길하고 더러운 것이었으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