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샬럿은 이즈카엘의 뒤로 다가가 그의 목을 껴안았다. 금반지만 낀 흰 손이 사내의 목과 어깨를 부드러이 쓸더니 침의 아래 감춰진 가슴을 더듬었다. 여인보다는 거친 피부 거죽과, 그 아래 고르지 않게 여기저기 튀어나온 단단한 근육이 얄궂은 감각을 일깨웠다. 사내의 귀에 훅 숨을 불어 넣으며 그녀가 아양을 부렸다.
“내 방 옮겨 주면 안 돼요? 물론 지금도 괜찮지만…… 여긴 햇빛이 적게 들어온단 말이에요. 그 여자가 있는 방…… 거기가 참 좋아 보이던데.”
“…….”
“미겔도 아직 어리잖아요. 많이 나가지도 못하는데 방 안에서라도 햇볕을 많이 쫴야 건강해지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사내는 여인의 야살스러운 행동에도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사내의 냉랭한 태도는 여전했다. 샬럿이 혀로 이즈카엘의 귀를 핥았다.
“이즈카엘, 왜 이리 말이 없어요.”
“…….”
“그런 얼굴 이 샬럿은 싫답니다. 그러지 말고 나랑 놀래요? 우리 미겔이 생긴 이후로는 한 번도 즐긴 적이 없잖아요.”
여인은 몸을 더 가까이 했다. 아이 양육을 전부 유모들에게 맡긴 탓에 출산 후에도 그녀의 아름다운 몸은 여전했다.
“비켜.”
이즈카엘이 거추장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어찌나 무감한지 샬럿이 다 민망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내가 없는 자리에서 연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아무렇게나 손을 휘저어 샬럿을 물렸다.
“그러지 말고요. 어차피 우리 미겔하고 둘밖에 없잖아요. 미겔로도 충분하지만 아이가 더 생기는 것도 좋을 테고…… 애들한테는 형제가 필요한 법이라는데.”
냉담한 이즈카엘의 태도에도 샬럿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사내는 제 부인이 없어지면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잡초 취급 했다.
“아이참…… 너무 그러지 말고…….”
그동안은 임신을 한 터라 사내를 유혹하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샬럿은 오늘에야말로 저 사내를 꼬여 내겠다 마음먹었다. 여인이 나긋나긋한 몸짓으로 그의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이제는 안 돼. 앞으로 계획을 위해서라도 슬슬 꾀어내야…….’
사실 샬럿은 불안했다. 미겔을 낳고 사라졌다 싶었던 불길함이 최근 다시 얼굴을 들었다. 그녀는 가끔 자신이 이 몸의 주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분명 없었던 일인데 기억 속에 있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문득문득 저도 모르게 잠에 들고 깨어날 때면 찝찝함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아직 공작 부인 자리를 차지 못해서…… 그래서 그런 거야. 내 자리가 불안정하니까…….’
그녀는 이유를 불안정한 제 위치에서 찾았다. 정부란 게 뭔가. 저 사내의 의사에 따라 언제든 내쳐질 수 있는 그런 자리 아닌가. 샬럿은 세르펜스 성에서 살며 삶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참하고 추운 전쟁터에서 지내던 때와는 모든 게 달랐다. 그때는 모두 자신에게 침을 뱉었지만 이 성에서는 자신이 대다수에게 침을 뱉었다.
‘절대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어.’
그녀가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사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붉은 혀가 기어 나와 다물린 사내의 입술로 다가갔다. 그러나 이즈카엘의 건조한 표정은 여전했다.
그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샬럿을 밀쳤다. 쿠당탕 소리와 함께 샬럿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지독한 모멸감에 샬럿이 몸을 떨었다.
“……몸이 달았으면 다른 사내를 찾아.”
“뭐, 뭐라고요!”
사내의 금안에는 은근한 살기가 있었다. 그가 주머니를 뒤지더니 시가를 찾아 물었다. 칙, 하고 붙는 불에 연기가 피며 매캐한 향이 방을 채웠다. 아이가 있음에도 담배를 피우는 그의 행동에 샬럿이 눈을 부릅떴다.
“이즈카엘! 미겔 안 보여요?”
아들의 건강이 염려스러웠다. 아무렇게나 구르는 아이들이야 시가 연기를 마시든 말든 별 상관없었지만 미겔은 제게 모든 걸 줄 아이가 아닌가. 그녀가 아들 쪽으로 뛰어가 아들을 껴안으며 소리쳤다.
“당장 꺼요! 당신 아드님이 몸이라도 상하면 어쩌려고!”
“……당장 목을 베고 싶은 걸 참고 있으니 네 어미 좀 어떻게 해 봐.”
샬럿의 고함에 이즈카엘이 뜻 모를 소리를 했다. 네 어미라니. 꼭 아들한테 하는 말 같지 않은가. 섬뜩하고 불길한 예감이 샬럿의 머리채를 잡았다. 등 뒤 척추를 따라 오소소 소름이 돋음과 동시에 그녀가 제 아들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게 무슨 말…… 아…….”
빨려 들어갈 듯 빛나는 금안이 샬럿의 머리를 강타했다. 멍하니 눈에 주었던 힘을 푼 그녀가 아들을 다시 요람에 내려놓고 옷을 정돈했다. 어딘가 기괴한 장면에 눈이 갈 법도 했건만 이즈카엘은 샬럿 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샬럿이 이즈카엘을 스쳐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 그녀가 흐려진 녹안으로 침대 옆에 섰다. 곧 여인의 몸이 줄 끊어진 인형처럼 픽 침대 위에 허물어졌다. 동시에 이즈카엘이 신경질적으로 읊조렸다.
“……아이의 탈을 쓰고 있다 한들 말을 못 하는 건 아닐 텐데.”
은발 사이 금빛 눈동자가 요람 쪽으로 돌아갔다. 미겔이 아비의 말에 꺄아 하고 옹알거리는 소리를 냈다. 꼭 대답을 하는 모양새였다.
이즈카엘이 굳은 얼굴로 일어나더니 시가를 던져 버린 채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가 요람을 내려다보자마자 방 안 분위기가 어둑해졌다. 촛불이 꺼질 듯 말 듯 일렁이며 기이한 속삼임이 이즈카엘의 귓가에 울렸다.
「재미없기는…… 좀 기다려 봐. 이 껍데기는 아직은 제대로 소리를 못 내잖아. 아들이 천재인 건 좋지만 태어난 지 석 달도 안 돼 말을 한다 하면 악마에 쓰였다 소문이 돌걸?」
“틀린 말은 아니지.”
「네 뜻대로 시건방진 계집도 재워 줬는데 뭐가 그리 불만이야?」
사내인지 여인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목소리였다. 높은 것은 아이 같기도 했고 어딘가 꺼끌꺼끌한 것이 노인 같기도 했다.
이즈카엘이 내키는 대로 강보를 헤쳤다. 그를 똑 닮은 아이가 그와 같은 눈을 한 채 방긋방긋 웃으며 고사리 같은 손을 앞으로 뻗어 한참 큰 아비의 손가락을 쥐었다. 이즈카엘은 인상을 팍 쓰며 아이의 손을 뿌리쳤다.
“……그때 대가로 받아 간 게 뭐지?”
「대가?」
목소리가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이즈카엘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그가 입매를 말아 문 채 요람을 세게 쥐었다. 터질 듯 튀어나온 핏줄과 함께 나무로 만든 요람 일부가 부스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말 안 했던가?」
“…….”
「그때 한 계약은 분명…… 대가를 비밀로 하겠다 했지.」
“시끄러워. 당장 말해. 네 놈이 앗아 간 대가가 뭐였지?”
「지금껏 가만있었잖아. 이제 와 그게 왜 궁금한데?」
빙글거리며 놀리는 목소리였다. 얕잡아 보는 듯한 말투에 이즈카엘이 요람을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요람이 앞뒤로 빠르게 움직였다. 끼익끼익, 매끄럽지 못한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당장 말해!”
이즈카엘은 당장에라도 아이를 꺼내 내동댕이칠 기세였다. 목소리는 그런 이즈카엘을 비웃듯 잔잔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맞춰 아기의 금안도 예쁘게 접히며 반달을 그렸다.
「오…… 이즈카엘, 나를 죽이기라도 하게? 할 수 있겠어?」
아무리 용맹한 기사도 전쟁 중에 이즈카엘을 만나면 더럭 겁을 먹었다. 전쟁터에서 신에 가까웠던 그는 표정만으로도 상대를 오금 저리게 만드는 사내였다. 그러나 방 안을 떠도는 목소리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긴장도 느껴지지 않았다. 목소리가 대수롭지 않게 이즈카엘의 겁박을 넘기며 수다스럽게 말을 이었다.
「화풀이하려거든 본인 스스로한테 하도록 해. 네 아내에게 한 행동은 전적으로 네 탓이잖아. 그녀를 울린 것도, 그녀를 때린 것도 이즈카엘 너야. 그런데 날 탓하면 곤란하지.」
붉게 부은 뺨 위로 흘러내리던 아내의 눈물이 떠올랐다. 이즈카엘이 얼굴을 구긴 채 시커먼 낯을 했다. 당장에라도 제 손을 잘라 버리고 싶었다. 때리기는커녕 만지는 것조차 아까운 이였다.
그가 턱을 당긴 채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러자 목소리가 자괴감에 휩싸인 사내를 비웃었다.
「구경만 했는데도 가엾더라. 네 부인 말이야…… 대단한 미인이잖아. 고귀한 디본의 요정. 제국의 미. 설마 그런 여자가 정부 앞에서 남편한테 그런 치욕을 당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
「……네가 아닌 다른 사내였다면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줬을 텐데. 가령…… 네 동생 샤를 같은 사내였다면 말이야.」
샤를이라는 이름에 이즈카엘의 표정이 일순 바뀌었다. 어미의 죄로 쫓겨난 남동생. 헤레이스의 전 약혼자이자, 자신의 밀고가 없었다면 그녀의 남편이 되었을 이. 이즈카엘의 눈에는 일순 죄책감이 어렸지만 곧 섬뜩함에 묻혀 사라졌다.
「그거 알아? 네가 네 아내를 울릴 때 곁에 있던 사내들이 어떤 표정을 하는지. 하인이건 기사건 모두…….」
“…….”
「……네 아내만 쳐다봐. 곱디고운 그녀의 얼굴만 살핀다고.」
이즈카엘은 그 자리에 있던 사내들이 누군지 하나하나 기억해 냈다. 제 휘하에 있는 평기사 셋과 샬럿에게 붙여 준 하인 둘, 그리고 잔심부름하는 사내아이 하나……. 그들이 자신들의 눈에 아내를 담았다 생각하니 삐죽 광기가 치솟았다. 그 눈들을 모조리 파 버리고 싶었다. 감히 제 아내를 품은 그 여러 쌍의 눈들을.
「하지만 어쩌겠어. 이즈카엘 너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잖아. 그래서 일을 이렇게 만들었고.」
“…….”
「너도 못 하는 걸 다른 사내들더러 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안 그래?」
아이가 아비를 올려다봤다. 곧았던 사내의 눈매는 일그러져 있었고, 누굴 보는 건지 모를 눈동자는 분노로 일렁였다. 요람 일부가 또 사내의 손에 떨어져 나갔다. 부서진 탓에 삐져나온 나무 가시가 굳은살 박인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이런, 진정해. 이렇게 화낼 때가 아니야. 이제 곧…….」
목소리가 그를 달래듯 천천히 흩어졌다. 동시에 요람 속 아기가 고개를 틀어 문을 바라봤다. 똑똑, 하고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즈카엘이 아들을 노려본 뒤 문가로 다가가 문고리를 당겼다. 문 뒤에는 급히 왔는지 땀을 흘리는 하인이 있었다.
“주인님, 급히 전해 드릴 말이 있습니다.”
“말해.”
“그게 부인께서…….”
하인에게서 말을 전해 들은 이즈카엘의 낯이 굳어졌다. 그가 하인의 어깨를 치고 그대로 방 안을 빠져나갔다. 급한 발걸음이 금세 사라졌다.
“그리 구박하실 때는 언제고 저리……. 주인어른의 마음은 참 어렵단 말이야.”
달려가는 주인의 뒷모습을 보며 하인이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어깨를 으쓱인 그가 방 안을 힐끗 한 번 살펴보고는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탁.
문이 닫히기 무섭게 요람이 저절로 움직였다. 조금 전과 달리 규칙적인 박자를 탄 물건이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이 흔들렸다. 편안한 움직임에 또렷했던 금안이 서서히 감겼다. 입에 손가락을 문 채 입술을 우물거리던 아이가 쌕쌕 숨을 쉬며 잠들었다. 명화 속 아기천사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아이까지 잠든 조용한 방 안, 촛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만 남았다. 기이한 정적 속 목소리가 미처 끝내지 못한 말을 홀로 이었다.
「……더 미치게 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