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이즈카엘은 아내에게 더한 수치와 모멸을 주고 싶었다. 사내가 제 아래에서 여전히 무릎을 꿇은 아내를 보며 정부의 허리를 감고 지분거렸다. 대놓고 정부를 희롱하는 모습에 헤레이스가 두려움 뒤 상처받은 얼굴을 뚜렷이 내보였다. 그가 여러 감정으로 젖어 드는 푸른 눈을 응시하며 정부에게 속삭였다.
“샬럿, 네가 벌을 생각해 봐라. 다만 내 아내의 체면이 있으니 불구로 만들거나 죽이는 건 안 돼.”
“하지만 이즈카엘…….”
“마음 넓은 네가 이해해야지. 내 고고하신 부인께서 이리 무릎까지 꿇었잖나.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
“하지만 저대로 두면 저 계집애가 미겔에게도 사생아라며 건방지게 굴 거예요. 이참에 그냥 본보기로…….”
“샬럿.”
저 망할 계집을 이번에 죽여 버려야 하는데. 그래야 저 여자가 더 힘에 부쳐 나가떨어질 텐데. 냉정한 사내의 목소리에 샬럿이 입을 삐죽였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움직였다간 일을 아예 그르칠 것을 알았기에 그녀는 그쯤 제 뜻을 꺾었다.
“치!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일단…… 제 뺨이 부은 대가는 치러야 하니 저 아이 뺨을 열 대만 치게 벌하세요.”
“뜻대로. 뭐 하나 치지 않고.”
이즈카엘의 턱짓에 하녀 하나가 안나의 뺨을 쳤다. 연이어 정확히 열 대를 맞은 안나의 뺨은 헤지고 터져 피가 흘렀다. 그러나 안나는 신음 한번 흘리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신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는 상전을 보며 억지로 괜찮다는 표정을 보였다.
“그리고…….”
샬럿이 헤레이스를 비웃으며 내려다봤다. 정부보다 작아진 공작 부인을 노예 보듯 찬찬히 뜯어본 그녀가 헤레이스의 왼손을 보며 눈을 빛냈다.
녹안이 닿은 왼쪽 약지에는 척 보기에도 귀해 보이는 금반지 하나가 덩그러니 존재를 발하고 있었다. 헤레이스의 드레스 자락을 뭉개듯 구두를 이리저리 튼 그녀가 이즈카엘에게 매달려 애교 섞인 목소리로 앙앙거렸다.
“부인께서 저 아이를 귀하게 여기시니 쫒아내는 건 관두겠어요. 대신 부인께서 다른 것으로 제게 보상해 주셨으면 해요.”
“내 부인이 가진 것 중 네가 원할 만한 게 있나? 내가 네게 준 황금이 훨씬 풍족할 텐데.”
“물론 이즈카엘의 사랑은 충분히 받고 있어요……. 하지만 욕심이 많은 전 아직 부족한걸요.”
“그거 재미있구나.”
“부인께서는 딱 하나만 주시면 돼요. 안타깝게도 그것만은 제게 없어서…….”
“그게 뭐지?”
“전 부인께서 끼고 계시는 저 반지가 가지고 싶어요.”
버석한 낯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헤레이스의 얼굴에 곧 깨질 듯 금이 갔다. 왼손을 쳐다본 그녀가 반지를 숨기듯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쌌다. 그러나 모두의 시선은 이미 헤레이스의 반지에 닿아 있었다.
“아끼는 아이를 용서해 주는 대가니 당연히 주시겠지요?”
새가 지저귀듯 경쾌한 목소리가 얄미웠다. 헤레이스가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을 준 채 샬럿을 쏘아봤다. 저 여자는 알고 있었다. 이 반지가 어떤 반지인지. 어떤 의미인지.
헤레이스는 말려 달라는 듯 이즈카엘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매정했다. 정부 앞에서 모멸을 당하고 있는 아내를 무감하게 보며 그가 명했다.
“들었지? 헤레이스, 반지를 샬럿에게 주도록 해.”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저리 쉽게……. 이 반지가 무엇인가. 이건 세르펜스 공작 부인의 상징이요, 그가 그녀를 감옥에서 꺼내 준 직후 그녀에게 바친 의미 있는 물건이었다.
‘살아. 살기만 해. 나머지는 모두 내가 감당할 테니.’
사내는 그리 말하며 헤레이스에게 청혼했다. 황제 폐하의 허락 아래 결혼이 결정되었으니 당신이 걱정할 건 이제 없다며 사내는 단단한 얼굴을 했다. 삶의 모든 것을 놓았을 때도 사내의 표정이 너무도 믿음직스러워 헤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더랬다.
그런데 그런 물건을……. 헤레이스가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발악하듯 날카로운 음성이 튀었다.
“싫어요!”
“…….”
“줄 수 없어요. 이게 뭔지 이즈카엘 당신도 알잖아요!”
“그럼 원래대로 당신 시녀를 벌할까?”
이즈카엘이 퇴로를 막았다. 헤레이스가 눈을 끔뻑였다. 후두둑 쉴 새 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기사에게 잡혀 있는 안나가 뒤에서 무어라 소리쳤으나 헤레이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당신은 한 번 이걸 잃어버리지 않았나. 신경도 쓰지 않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이러는 것도 우습군.”
“그건!”
이즈카엘이 샬럿을 떼어 낸 뒤 헤레이스 쪽으로 짜증스레 몸을 굽혔다. 그가 아내의 얼굴 바로 앞에 손바닥을 보였다. 당장 내놓으라는 겁박과 다름없었다.
“반지 이리 내, 헤레이스.”
“싫, 싫어요. 이건 줄 수 없, 없어요. 이건…….”
“손 펴.”
이즈카엘이 아내의 손을 잡아챘다. 그녀가 그에게서 벗어나려 발악했다. 피가 쏠려 빨개진 주먹이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다물린 채 실랑이를 벌였다. 아내의 손가락을 억지로 펼까 하던 이즈카엘이 문뜩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제 머리를 한 번 쓸었다. 올라갔다 떨어진 은발 뒤엔 지독히 냉한 눈이 남았다.
“……한 번만 더 말하지. 손 펴, 헤레이스. 펴고 반지를 넘겨.”
“안 돼요. 안 된다고요. 약속했잖아요. 할 일을 하면…….”
빼앗기면 이 자리를 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 내 아들은? 에르젠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즈카엘의 정부라는 여자는 분명 그녀의 아들을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이 반지는…….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에게서 반지를 받았을 때를 계속 떠올리며 그녀답지 않게 고집을 부렸다.
“하아…… 끝내 이러는군.”
“이즈카엘, 제발…… 이건 당신이 내게…….”
짝!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단 한 사람, 아내의 뺨을 쳐올린 사내를 제외하고.
“내 부인께서는 끝까지 건방져. 뭐든 제멋대로군.”
헤레이스의 뺨을 친 힘은 세지 않았다. 가볍게 정신을 차리라는 듯, 딱 그 정도의 힘이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사내의 것이었다. 그것도 전쟁에서 구르던, 전신이라 불리는 사내의 손.
피부가 곧바로 붉어졌다. 헤레이스가 돌아간 고개를 바로 할 생각도 못 한 채 신음을 흘렸다. 얼얼한 뺨보다 충격이 더 컸다.
“아…….”
뺨을 맞은 건 처음이었다. 죄인의 딸이라 감옥으로 끌려갈 때조차 뺨을 맞아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남편의 정부 앞에서 남편에게. 그것도 공작 부인의 상징을 잃지 않으려다 뺨을 맞다니……. 순식간에 시간도 공간도, 사라지며 현실감이 아득해졌다. 그녀가 아찔한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은 채 덜덜 몸을 떨기 시작했다.
“당신이 공작 부인이라고는 하나 이 성의 주인이자 세르펜스가의 가주인 날 무시하는 태도는 용서 못 해.”
이즈카엘의 말에 지금까지의 실랑이가 우습다는 듯 헤레이스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가 주먹을 펴자 기다렸다는 듯 이즈카엘이 그녀의 손에서 반지를 빼더니 볼일이 끝난 사람처럼 그녀의 손을 쳐 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일어남과 동시에 헤레이스의 푸른 눈에 그렁그렁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왔다. 반짝이는 눈물이 붉은 뺨과 대조되어 서럽고 또 서러웠다.
“손을 이리 다오.”
멍한 헤레이스를 향해 비웃음을 흘린 샬럿이 제자리에서 기쁘다는 듯 방방 뛰었다. 그녀가 이즈카엘에게 반지 낀 자신의 손을 이리저리 보여 줬다. 화려한 반지들 속에서도 금반지는 대번에 들어왔다. 금반지 주제에 이리 아름답다니. 주제넘은 것을 가진 샬럿이 기쁜 낯을 했다.
“어머! 딱 맞아요.”
“그거 잘됐군.”
“원래부터 제 거였던 물건 같아요. 어쩜 이렇게 잘 맞을 수가…….”
정부의 오두방정은 길게 이어졌다. 곧 금안에 성가심이 드러났다. 이즈카엘이 시선을 내려 아내 쪽을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무릎 꿇은 채였다.
헤레이스의 꼴은 참혹했다. 드레스 여기저기는 바닥에 끌려 지저분해져 있었고 머리카락 또한 엉망이었다. 게다가 창백한 얼굴에 부푼 뺨이 워낙 도드라져 얻어맞은 티가 선명했다.
붉은 뺨에 흐르는 눈물을 본 이즈카엘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다 못마땅한 듯 주먹을 쥐었다. 그가 아내에게서 시선을 떼고 빠르게 몸을 돌렸다. 꼭 도망치는 모양새였다.
“……미겔이 추위를 타겠다. 그만 들어가자.”
“더 있어도 되는데…….”
“들어가서 네 뺨도 살펴봐야지. 부은 곳을 오래 두면 좋지 못해.”
“생각해 주시는 거예요? 부인 앞인데 이즈카엘도 참……. 뭣들 해. 돌아가자.”
샬럿이 몸을 크게 돌린 탓에 펄럭인 드레스 끝자락이 헤레이스의 뺨을 다시 한번 때렸다. 부드러운 천이라 아프지는 않았으나 헤레이스는 멍청한 얼굴로 제 볼을 쓸었다. 홧홧한 열감은 거의 없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아팠다. 아프고 괴로워 죽고만 싶었다. 그녀가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피가 날 때까지 물었다.
“흐으…….”
억눌린 신음이 울음소리에 섞여 들었다. 안나가 거의 기다시피 다가오더니 헤레이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가씨. 제가…… 저 때문에…….”
머리를 찍으려는 안나를 헤레이스가 막았다. 그녀가 우는 안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나, 우리 그냥…….”
“…….”
“……나랑 너랑 에르젠, 이렇게 우리 셋만…….”
“…….”
“떠날래?”
* * *
반지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났다. 공작 부인의 상징까지 빼앗기자 헤레이스를 동정하는 이들은 눈에 띄게 줄었다. 대신 그녀를 험담하며 샬럿에게 아부하는 무리가 여기저기서 비 온 뒤 잡초처럼 솟아났다.
그러한 사용인들의 태도에 지대한 공을 세운 건 이즈카엘이었다. 그는 헤레이스에게서 반지를 빼앗은 이후 아내의 방으로 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샬럿, 정확히는 미겔이 누워 있는 방에 자주 머물렀다. 반지 일에 더불어, 잠시나마 부인을 찾았었던 그가 공작 부인의 방에 발걸음을 딱 끊자 샬럿은 보란 듯이 반지를 끼고 다니며 성안을 헤집고 다녔다.
목표를 눈앞에 둔 그녀는 두려울 게 없었다. 빼앗고 싶어. 그 여자가 가진 건 모조리! 지위도, 부도, 명예도 내 거야. 그리고…….
‘……저 사내도.’
샬럿의 시선 끝이 고고한 사내에게 닿았다. 일렁이는 촛불 아래 편안한 침의 차림의 사내는 은발을 흐트러뜨린 채 편히 의자에 기대앉아 요람 속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