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아이가 뒤에서 무어라 계속 옹알옹알했다. 미겔을 안아 든 유모가 쉬이, 하며 아이를 어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잠깐 아들에게 시선을 준 샬럿이 다시 헤레이스를 노려봤다. 뾰족한 손톱 끝이 헤레이스의 어깨를 툭툭 찔렀다.
“고귀하신 공작 부인, 분명 먼저 내 뺨을 친 건 그쪽이야. 그러니 나 따위 천한 것한테 한 대 맞더라도 억울해하지는 마세요. 어차피 머지않은 미래에는 내가 그 자리에 있을 테니까.”
샬럿은 정말 헤레이스를 한 대 칠 기세였다. 그녀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안나가 눈을 질끔 감은 채 헤레이스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고통은 없었다.
안나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언제 왔는지 모를 사내가 큰 손으로 샬럿의 손목을 움켜쥔 채 비틀고 있었다. 그가 무덤덤한 얼굴로 헤레이스를 보다 제 정부를 내려다봤다. 고압적으로 번뜩이는 금안에 샬럿이 새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 이즈카엘!”
샬럿은 재빨리 태세를 바꿨다. 그녀는 곧바로 눈물을 짜 내며 가여운 얼굴로 울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헤레이스는 갑작스러운 이즈카엘의 등장에 어쩔 줄 몰라 하다 고개를 수그릴 뿐이었다.
“흐윽……. 이즈카엘…… 공작님…….”
“울어도 소용없다, 샬럿. 네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긴 하나?”
금발 미인의 가녀린 목소리와 불그스름한 눈매가 가여웠으나 이즈카엘의 목소리는 냉담했다. 그가 샬럿의 팔을 내친 후 엄히 말했다.
“고작 정부인 네가 공작 부인인 내 아내에게 손찌검하려 한 죄는 죽어도 할 말이 없다.”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챘는지 샬럿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미한 공포가 있었다. 사내가 제 아내에게 가진 감정은 양날의 검이었다. 잘만 조정하면 상대를 벨 검이었지만 까닥 잘못 휘두르면 그대로 제 목이 뚫릴.
샬럿은 재빨리 이즈카엘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푸른 공단 드레스가 바닥에 끌려 더러워졌으나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즈카엘의 손을 붙잡은 그녀가 세상 억울하다는 듯 울먹였다.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어찌 감히 부인께 손찌검하겠어요. 그랬다면 분명 죽어도 할 말 없지요.”
“그럼 내가 본 건 뭐지?”
“잘못 보셨어요. 오해세요. 전 부인께 무례하게 굴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저 건방진 아이를 혼내 주려 한 것뿐이에요. 믿어 주세요, 이즈카엘.”
샬럿의 간악한 거짓에 입을 벌리고 있던 안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저를 향하기 무섭게 아니라 대꾸하려 했다. 그러나 샬럿의 손가락을 좇은 이즈카엘의 눈은 그녀가 감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섬뜩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안나는 알 수 있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랐으나 주인은 자신을 싫어했다. 겁에 질린 그녀가 저도 모르게 몸을 옹송그렸다.
“저 계집이 제게 건방지게 굴더니 부인의 뒤에 숨어 저를 이렇게……. 이즈카엘, 여기 좀 보세요. 저 아이의 이간질 때문에 부인께서 제 뺨을 치…… 치셨어요. 흑…….”
샬럿이 열 오른 뺨을 이즈카엘의 손에 비볐다. 그러자 그가 정부의 얼굴을 유심히 봤다. 붉게 부어오른 뺨이 선명했다. 제법이었다. 이런 짓도 할 줄 알고…….
아내가 제 정부를 때렸다는 말에 이즈카엘이 재미있다는 듯 입매를 올리다가 아내의 손을 곁눈질로 보았다. 고작 한 대 쳤다고 붓다니. 샬럿의 붉어진 뺨보다는 살짝이지만 열기로 부풀어 오른 아내의 손에 더 관심이 갔다.
헤레이스가 손바닥을 쥐었다. 그 모습에 이즈카엘은 샬럿의 뺨을 다정히 두어 번 두드리며 뚫어져라 헤레이스의 얼굴을 봤다. 그녀는 그가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무슨 이유가 됐든 천한 네가 공작 부인의 심기를 거슬렸으니 맞아도 싸다.”
살가운 손짓과 달리 나온 목소리는 여전히 평이했다. 샬럿이 고개 숙여 표독스러운 얼굴을 간신히 가렸다.
천한 네가. 공작 부인.
다른 이도 아니고 이즈카엘, 그가 자신의 신분을 이리 확인시켜 줄 때가 제일 싫었다. 제 아들은 귀히 여기면서 왜 그 어미인 저는 여전히 천한 출신의 정부인가. 샬럿이 자신의 귀에만 들리게 이를 갈았다.
계속 정부의 뺨을 두드리며 이즈카엘이 곁눈질로 헤레이스를 살폈다. 헤레이스는 안나를 자신의 뒤로 이끈 채 이쪽을 경계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시녀 따위의 손을 꼭 잡은 채 새끼처럼 보호하는 꼴을 보니 심사가 뒤틀렸다. 남편 보기는 길가 돌멩이만도 못하게 보는 여자가…….
그가 낮게 웃으며 개를 쓰다듬듯 샬럿의 머리를 쓸더니 그녀를 일으켜 품 깊숙이 안았다.
“하지만 샬럿…… 네 뺨을 보니 네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
품 안의 여인을 바라보는 눈이 다정했다. 샬럿은 갑자기 변한 그의 태도에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사내는 제 아내를 또 못 죽여 안달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일부러 처연하게 입술을 축 내렸다.
“알아주셔서…… 다행이에요. 전 정말 부인께 무례하게 굴려던 건 아니었어요.”
흑흑 소리와 함께 몸을 가늘게 떠는 금발 미인의 얼굴이 애처로웠다. 이즈카엘이 보란 듯이 샬럿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그녀의 뺨을 쓸며 뒤에 있던 기사들에게 명했다.
“내 아이의 어미를 때린 저 계집을 매질하고 감히 내 아내와 이이를 이간질한 혀를 잘라라. 그리고 성 밖으로 쫒아내 버려.”
잔악무도한 명에 안나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러나 당사자보다 더 파리해진 이가 있었으니, 헤레이스였다. 그녀는 주춤주춤 다가오려는 기사들에게서 안나를 숨긴 채 이즈카엘에게 고함쳤다.
“말도 안 돼! 이즈카엘, 미쳤어요!”
“비켜. 당신이 무르게 구니 저 계집이 계속해서 입을 놀리지. 분명 전에 한번 말했을 텐데. 아랫사람…… 특히 저 계집아이 간수 잘하라고.”
“안나는 잘못한 게 없어요. 시작은 당신 품에 있는 그 여자가 했다고요! 내게 먼저 무례하게 군 건 저 여자예요. 당신 눈으로 직접 봤잖아요! 그 여자가 내게 손 올린 거.”
“하지만 오해라 하지 않나. 그렇지?”
“부인…… 정말 오해세요. 전 그저…….”
샬럿이 이즈카엘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사내가 제 정부의 등을 도닥이며 헤레이스를 향해 여유로운 얼굴을 했다.
“게다가 샬럿이 다치지 않았나. 샬럿은 미겔의 어미야. 아무리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지만 아들 앞에서 뺨을 때리다니……. 당신의 시녀가 한 이간질이 내 아들한테도 영향을 끼치는군.”
“안나는 더 심하게 다쳤어요. 이걸 봐요. 얼굴에 피가…….”
“우습지도 않아.”
헤레이스는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이즈카엘이 비소를 흘리며 말을 끊은 탓이었다. 그가 샬럿을 껴안은 채 헤레이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있는 안나를 곧 처분할 물건 보듯 훑었다.
“헤레이스, 내가 계속 말해 줘야 하나? 내 아들의 어미가 다쳤다고. 당신이 데리고 있는 그 아이 때문에.”
어절마다 끊는 말이 단호했다. 헤레이스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당장에라도 안나를 도살할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그걸 막을 힘이 없었다.
세게 내리 물은 입술에서 피가 샜다. 헤레이스가 아무 말 없이 제 시녀를 감추려 필사적으로 애썼다. 그러나 작은 체구의 그녀였다. 그녀는 시녀 하나를 온전히 숨겨 줄 수 없었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
“당신이 데리고 있는 시녀의 목숨 따위를 샬럿과 비교할 수는 없어. 무게가 다르잖나. 뭣들 해. 당장 저 계집을 끌어내.”
주군이 명하자 기사들의 움직임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들은 헤레이스의 뒤에 있던 안나를 끌어냈다. 안나가 울부짖으며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아가씨!”
“안나! 안나를 놔줘! 당장!”
헤레이스가 안나를 돌려받으려 기사의 몸에 손을 뻗었다. 그걸 본 이즈카엘이 샬럿을 아무렇게나 놓았다. 그가 빠른 움직임으로 헤레이스의 어깨를 우악스레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다 놨다. 눈이 마주치자 헤레이스는 호소했다.
“이즈카엘, 이러지 말아요.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안나를 잘 가르칠게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안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헤레이스는 발발 떨며 울고 있었다. 그녀가 이즈카엘에게 매달렸다. 그녀는 남편에게 잡힌 몸을 어떻게든 숙였다. 한데 묶어 잘 정돈돼 있던 검은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흐트러지며 이즈카엘의 발치에 쏟아졌다.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의 구두를 향해 머리를 몇 번이고 조아리며 그의 손이 구원이라도 되는 듯 붙잡았다. 공포에 질린 손이 흥분에 휩싸여 냉랭해진 이즈카엘의 체온을 식혔다.
“당……, 당신 여자한테 사과하라고 하면 하겠어요. 벌이라면 내가 받을게요. 그러니 안나는 건드리지 마세요. 내게는 친동생 같은 아이예요. 겨우 내게 남…… 남은…… 흑…….”
아이처럼 울며 떼쓰듯 매달리는 아내는 처음이었다. 오롯이 저를 향해. 이즈카엘은 이것이 최선이라는 양 떨리는 헤레이스의 눈동자를 보자 고양되었다.
이즈카엘이 고개를 든 채 저만을 보는 헤레이스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그가 자비를 베풀겠다는 듯 아내의 눈물을 닦아 줬다.
“……내 부인께서 이렇게까지 나오시니 차마 외면하기 힘들군.”
“이즈카엘!”
샬럿이 날카롭게 외쳤다. 그녀가 이즈카엘의 발치에 앉아 있는 헤레이스의 드레스 자락을 짓밟으며 그의 팔에 몸을 가져다 댔다. 조르듯 영롱하게 빛나는 눈에는 교태가 가득했다.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와 샬럿을 번갈아 보다 잔인한 미소를 물었다.
무릇 사냥감은 쫓을 듯 말듯 줄다리기를 잘해야 했다. 공포와 불안에 떨게 만든 뒤 체력을 서서히 빼야만 온전히 손에 들어왔다.
이즈카엘은 샬럿에게 시선을 주며 그녀의 부푼 뺨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자비에 겨우 한숨 돌리고 있던 헤레이스가 그 장면에 숨을 들이쉬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피해자를 억울하게 둘 수는 없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헤레이스가 절망 어린 눈을 했다. 손 가는 대로 짓이겨지는 아내가 제법 마음에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