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처음엔 일이 뜻대로 잘 흘렀다. 이즈카엘은 이 일이 이상하다는 걸 대번에 눈치챘으나 그는 제 아내에게 큰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소란을 일으켰다. 사랑을 상징하는 반지를 잃어버렸다는 게 밑바닥 감정을 자극했겠지.
‘에르젠! 에르젠!’
복도에서 들리는 비명에 얼마나 웃었는지. 샬럿은 그렇게 두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할 작정이었다. 화내고 울다 보면 아무리 깊은 사랑이어도 식기 마련이니.
하지만 그 뒤, 일은 이상하게 꼬였다. 이즈카엘은 아내의 방에서 밤새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뜻하는 바는 뻔했다.
‘미겔을 가진 후에는 나와 한 번도 자지 않았어.’
샬럿의 표정이 굳어졌다. 초조함을 숨기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가 품 안 아들을 보며 자신에게 다짐하듯 속삭였다.
“걱정 마렴. 이 어미는 꼭 그 자리를 차지할 거란다.”
샬럿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가 눈을 떴다. 어미의 얼굴을 본 아이가 눈을 예쁘게 접어 웃었다.
“아…….”
“부인! 괜찮으세요?”
아이의 금안을 본 순간 머리가 어질했다. 샬럿이 저를 부축하는 하녀들을 손짓으로 물린 채 홀린 듯 아들의 눈을 바라봤다.
“그래, 미겔……. 너만 있으면…….”
멍한 가운데도 기이한 충족감이 샬럿을 안정시켰다. 그녀가 고개를 숙여 아들의 이마에 경건히 입 맞췄다.
아이가 꺄르르 높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 * *
이즈카엘은 그날 이후 꾸준히 헤레이스를 찾았다. 헤레이스는 그가 올 때마다 눈을 내리깐 채 입술을 앙다물었지만 별달리 무어라 하지 않았다. 그저 가운을 벗고 조용히 침대에 오르는 일이 그녀의 일상 중 일부가 됐다.
하루걸러 이틀에 한 번꼴로 들이닥치는 그는 헤레이스에게서 모든 걸 앗아 갔다. 체력은 물론이요, 잠도 시간도 부족해졌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에르젠을 안고 어르던 헤레이스는 늦은 새벽에 잠들어 오후까지 혼절하듯 수마에 빠졌다. 에르젠은 사라진 어미의 품을 찾느라 옹알거렸지만 죽은 듯 잠든 어미를 깨우기란 쉽지 않았다.
헤레이스는 늦은 오후 저를 보며 반가운 듯 방긋거리는 아이에게 미안한 얼굴을 한 채 젖을 물리려 했다. 그러나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가슴이 떨어질 듯 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젖조차 전처럼 나오질 않아 에르젠은 어미에게서 양껏 배를 채우지 못했다. 유모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에르젠은 홀쭉한 배를 하고 배고픔에 허덕였으리라.
남편이 그녀를 찾은 이후로 생겨난 좋은 점이라면 딱 하나였다. 그가 다녀간 이후로 앓고 있던 젖몸살이 어느 정도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헤레이스에게 있어 아들과의 시간을 강제로 빼앗긴 것은 그 무엇보다 큰 상실이었기에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울적함이 내내 감돌았다.
헤레이스의 파리한 얼굴을 보다 못한 안나가 나섰다. 안나는 무력해 보이는 그녀에게 더 쉬라고 말하는 대신 체력을 키우자 제안하며 밝게 웃어 보였다. 멍한 정신으로 잠든 아들만 쳐다보던 헤레이스가 안나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차라리 에르젠을 보는 게…….”
“도련님은 잠드셨잖아요. 곁에 계신 것도 좋지만 도련님을 제대로 돌보려면 지금보다 건강해지셔야 해요.”
“…….”
“도련님이 걷게 되면 같이 산책도 나오셔야 하잖아요. 짧은 산책도 힘들어하시면 나중에 이리저리 뛰어놀 도련님이 답답해하실 거예요.”
공기 좋은 정원에서 뛰놀 아들을 생각하자 마음이 푸근해졌다. 헤레이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잘 가꾸어진 관목을 쓸었다. 날이 따뜻해서 그런지 온통 푸릇한 기색이 사방을 메웠다. 방 안과는 비교도 안 될 상쾌한 공기에 헤레이스가 조금 풀어진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내리쬐는 해를 한참 받자 숨이 조금 찼다. 헤레이스가 걷다 말고 앉을 곳을 찾았다. 장미 덩굴이 감긴 둥근 아치 앞에, 평평한 긴 대리석 의자가 그녀를 반겼다. 헤레이스가 자리를 잡자 안나가 바로 곁에 앉아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아직도 햇볕이 좀 세게 내리쬐네요.”
걱정 가득한 손이 상전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꾹꾹 내리 닦으며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나 턱 아래까지 닿은 손수건은 그 이상 내려갈 수 없었다.
헤레이스는 옷깃이 거의 목 끝까지 오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가는 목을 잔뜩 죈 드레스는 꼭 신전에서 일하는 여사제들이 입는 것처럼 답답해 보였다. 약한 목 피부가 천 끝 자수에 쓸려 발갛게 일어나 있었다. 속상한 눈으로 그걸 보던 안나가 결국 한마디 했다.
“그러니까 그냥 편한 드레스로 입으시고 목가에 살짝 뭘 두르시라니까.”
헤레이스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손가락을 목에 가져다 댔다. 가려진 목덜미가 엉망이었다. 그녀의 남편 이즈카엘의 작품이었다.
덕분에 안나는 하루 세 번 상전에게 꼼꼼히 약을 발라 주는 수고를 해야 했다. 하지만 아물면 다시 번지는 꽃물은 도통 가라앉을 낌새가 없었다.
“혹여나 남들에게 보이면 민망하잖니. 사실 네게 보이는 것도 부끄러운데…….”
“하여간 주인님이 문제예요. 어떻게 매번 이 꼴로……. 들어가면 약을 한 번 더 발라 드릴게요.”
까슬까슬해진 피부를 한 번 더 쓰다듬은 헤레이스가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일어났다. 정원에는 아직 구경할 곳이 많았다. 그러나 몇 걸음 걷기도 전 누군가 그들을 불렀다.
“오랜만이에요, 부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샬럿. 이즈카엘의 정부이자, 헤레이스와 같은 날 남편의 아이를 낳은 여인……. 눈부신 금발의 주인을 알아본 안나가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떨떠름한 분위기를 무시한 채 샬럿은 천천히 헤레이스에게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샬럿의 뒤에 서 있던 이들이 헤레이스에게 급히 허리를 숙였다. 헤레이스의 푸른 눈에 유모로 추정되는 이가 안고 있는 강보가 들어왔다. 꽁꽁 싸매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미겔이라는 아이가 분명했다. 언뜻 보이는 은발이 남편과 꼭 같은 색이었다.
“둘만 보는 건 처음이죠?”
잠깐 아이를 본 헤레이스가 제게 말을 걸어온 샬럿을 곤혹스러운 얼굴로 마주 봤다. 언젠가 마주칠지 모른다 생각은 했지만 그게 지금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가 얼떨떨한 낯으로 입매를 굳히고만 있자 샬럿이 발랄하게 다시 한번 말했다.
“진작 시간을 냈어야 했는데…….”
꼭 아랫사람에게 하대라도 하는 듯한 어투에 헤레이스의 얼굴이 미미하게나마 굳어졌다. 고개를 뻣뻣이 든 샬럿은 처음 헤레이스를 불렀을 때도, 지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녀는 꼭 자신이 헤레이스의 상전인 것처럼 고고하게 굴고 있었다.
“뭐, 지금이라도 이렇게 만났으니 된 거지요.”
모르는 이가 본다면 샬럿이 공작 부인처럼 보였다. 푸른 공단 드레스에 여러 보석으로 치장한 그녀는 화려했지만 값싸 보이지는 않았다. 어깨와 가슴 부근이 날씨에 비해 좀 과하게 드러나 있었으나 실크로 짠 레이스가 적당히 가려 주고 있어 자연스러운 느낌을 줬다.
그에 비해 헤레이스는 편한 아이보리색 드레스에 작은 진주 귀걸이와 금반지 하나를 했을 뿐이었다. 단조로운 헤레이스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본 샬럿의 입꼬리가 엷게 올라갔다.
“……가자, 안나.”
“예, 부인.”
샬럿을 상대하고 싶지 않은 헤레이스가 몸을 돌렸다. 안나가 냉큼 그녀의 뒤를 따랐다. 상대에게 적의라도 없으면 모를까, 샬럿의 웃음 뒤에는 노골적인 적대감이 있었다.
“부인께서는 지금 저와 제 아들을 무시하는 건가요?”
헤레이스의 의중은 뚜렷했건만 샬럿은 긴 드레스를 끌며 끝까지 따라왔다. 그녀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헤레이스에게 손을 가져다 댔다. 샬럿의 손이 헤레이스의 어깨에 막 닿으려 하자 안나가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무슨 짓이에요!”
잘 가꾸어진 손이 탁 내쳐졌다. 헤레이스는 안나에게 그만하면 되었다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상황을 끝내고 싶은 헤레이스와 달리 샬럿은 손에 힘을 쥔 채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가 반지 가득한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더니 그대로 휘저었다.
짝!
“아악!”
“안나!”
가는 팔이 어찌나 매서운지. 안나는 바로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놀란 헤레이스가 넘어진 안나 쪽으로 몸을 숙였다. 뺨은 붉어지다 못해 상처가 나 피가 보이고 있었다. 무언가에 파인 상처가 선명했다.
헤레이스가 샬럿의 손을 바라봤다. 샬럿은 자신의 아래에 주저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반지를 제자리로 돌렸다. 검지에 자리한 굵은 사파이어에는 붉은 피가 조금 묻어 있었다.
“어디서 시중드는 시녀 따위가 세르펜스의 후계를 낳은 나한테……. 이만하길 다행으로 여기렴.”
“시녀 따위? 그러는 넌! 넌 그 시녀 따위도 못 되는 더러운 계집이잖아! 정부 주제에 아이를 낳았다 유세 떠는 모양인데, 그래 봤자 넌 정부야! 남의 남자 빼앗는 더러운 정부!”
상처를 입었지만 안나의 기세는 죽지 않았다. 안나는 일어나기가 무섭게 고함을 질렀다. 설마 바로 달려들 거라고는 생각 못 한 모양인지 샬럿이 움찔거리며 물러서려다 얼굴을 붉히고는 자리에서 멈췄다. 저 비리비리한 여자도 아니고 그 여자의 시녀 따위가……. 그녀가 독기 서린 눈을 치켜뜨며 다시 손을 올렸다.
“뭐? 이 건방진 것이!”
짝!
샬럿이 손을 내리치기 직전이었다. 날카로운 파공음이 샬럿의 뺨을 올려붙였다. 설마 자신이 맞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샬럿이 멍한 눈을 한 채 상대를 바라봤다.
“감히…….”
헤레이스가 샬럿을 또렷이 노려보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과 부어오른 손바닥은 연약해 보였으나 푸른 눈만은 매서웠다. 헤레이스가 샬럿에게 분노를 여감 없이 보이며 일갈했다.
“너 따위가 뭔데 내 시녀를 치느냐.”
“너…… 너…….”
“천한 정부 주제에 감히 날 그리 지칭하지 말라.”
남편의 정부와 마주하고 어쩔 줄 몰라 쩔쩔매던 여자는 없었다. 저 같은 것도 귀족이라고……. 진정한 공작 부인이 누군데.
샬럿은 부어오르는 뺨을 쥔 채 헤레이스에게 손가락을 올렸다. 구겨진 눈썹에 삐뚜름한 입매. 샬럿의 얼굴에는 황당함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허…… 껍데기만 남은 주제에 그래도 귀족이라고 이따위 유세를 나한테…….”
샬럿은 제 신분을 잘 알았다. 후계에 가까운 아들을 낳았다고는 하나 그녀는 천민 출신의 정부였다. 귀족 태생의 공작 부인인 헤레이스에게 이랬다간 돌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쯤은 예전에 깨우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자신감이 들었다. 이래도 될 것 같았다. 등 뒤 아들이 자신을 응원하고 있었다. 괜찮아. 어차피 이 여자 자리는 곧 내 것인걸. 조금 앞서 행세한다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