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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13화 (13/108)

13화.

흰 침대 위 넓게 퍼진 검은 머리카락이 여인의 얼굴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이즈카엘이 굳은살 베인 손으로 말간 얼굴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울지 마.”

말을 마친 이즈카엘이 천천히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붉은 눈가를 스친 입술이 뺨으로, 곧이어 짓이겨 붉어진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사내가 욕망에 젖은 탁한 눈을 했다. 그가 아내의 둥근 어깨를 쓸더니 시선을 목 아래로 내렸다. 희고 매끄러운 곡선이 아름다웠다.

분명 그의 소유인데 억울하게도 거의 1년을 훔쳐보기만 했다. 그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서로간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아내가 더없이 어여뻐 보였다. 이즈카엘이 준비하라는 듯 몇 번 더 입맞춤했다.

그 다정한 손길에 헤레이스가 예전을 떠올렸다. 세르펜스 성에 온 지 이제 막 1년이 조금 넘었던 그 시기. 이즈카엘의 마음을 처음 받아 줬던 그날, 헤레이스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괴로움에 처음 그에게 서러움을 토로했다.

당시의 이즈카엘은 그녀를 살살 달래며 부드러이 입맞춤해 줬다. 입술은 물론이고, 눈과 코, 어디든 그의 온기가 닿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레이스는 내리 나흘을 앓아누웠다.

‘미안해, 헤레이스.’

아파하는 헤레이스를 본 뒤 이즈카엘은 매번 그녀를 배려했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나. 정중하게 시작된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야만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헤레이스의 늦잠은 늘어만 갔다.

정오가 훌쩍 넘어 일어날 때면 안나를 비롯한 사용인들의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후에도 헤레이스는 남편과 함께 침대에 눕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간혹 남편과의 밤을 기다렸다. 정숙해야 할 귀족 부인으로서 이래도 되나 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긴 했으나 처음 알게 된 즐거움은 충만히 넘쳤다.

‘안 하던 일이 어려우면 전처럼 당신 남편 침대 위라도 올라. 올라서 그 알량한 지위를 유지하란 말이야. 알았나?’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이번은 여러모로 전과 달랐다. 은밀한 기다림은 자취를 감췄다. 대신 남은 것이라고는 두려움과 서글픔뿐이었다.

그녀를 잡아먹을 듯 구는 사내의 얼굴에 헤레이스의 눈은 점차 빛을 잃었다. 헤레이스는 괴로움에 입술을 물었다. 하지만 괴로움만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야릇한 감각은 분명한 쾌락이었다. 헤레이스는 그게 못내 괴로웠다. 스스로가 천하디천한 여자 같아 수치스러웠다.

손목이 눌린 탓에 남편의 목을 끌어안지도 못한 채 헤레이스가 소리를 냈다. 머리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데 감각만은 뚜렷해 계속 눈앞이 번뜩였다. 그렇게 헤레이스의 정신은 서서히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어떻게든 쾌감에서 벗어나려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달뜬 얼굴에 한 줄기 눈물이 그였다.

“울지…… 하…… 말라 했어.”

그녀의 눈물을 본 모양인지 이즈카엘이 손을 뻗어 왔다. 그가 투박한 손길로 헤레이스의 얼굴을 문지르며 이를 악물었다.

사내의 긴 한숨이 길었던 시간이 끝났음을 알렸다. 손을 내려 헤레이스의 뺨을 붙잡은 그가 그녀에게 짙은 입맞춤을 선사했다. 힘을 모조리 소진한 헤레이스가 눈조차 끔뻑이지 못한 채 몸에 힘을 풀었다.

“……당신은 정말 말이 없어.”

까슬한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렸다. 이즈카엘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눈물로 짓눌린 눈가가 엉망이었다. 푸른 눈은 그를 외면한 채 멍하니 천장을 봤다.

헤레이스는 흡사 사냥당한 작은 짐승의 꼴이었다. 그러나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가 그새 다시 아내의 둥근 어깨를 잡았다.

“아…….”

끝이 아님을 예감한 헤레이스가 작게 신음했다. 그녀가 흰 천의 구겨진 주름을 따라 시선을 들어 올렸다.

푸른 눈에 아무렇게나 구겨진 아이의 요가 들어왔다. 그녀가 그리로 손을 뻗자, 사내가 다시 몸을 붙여 왔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요를 향해 가다 사내의 손에 얽혀 떨어졌다.

밤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 * *

“이즈카엘이 어제 그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네.”

“왜?”

샬럿의 물음에 하녀가 우물쭈물했다. 답하지 못하겠다는 듯 더듬거리는 하녀를 향해 샬럿이 눈썹을 세웠다.

“벙어리야? 똑바로 답 못 해!”

“아가씨, 그, 그게 아무래도…… 아악!”

샬럿의 손에 있던 찻잔이 거칠게 움직였다. 뜨거운 찻물을 뒤집어쓴 하녀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아가씨? 내가 아직도 아가씨니?”

그러거나 말거나 샬럿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하녀의 바로 옆 바닥으로 찻잔을 던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장인이 만든 귀한 잔이 박살 났다.

“잘, 잘못했……습니다, 부, 부인.”

부인이라는 단어에 표독스러웠던 녹안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샬럿은 미겔을 낳은 이후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에 날을 세웠다.

“내 아들이 미래의 공작이야! 그런데 내가 아가씨라니! 말이 돼? 난 공작을 낳은 여자인데!”

본래 그녀의 행동은 경을 칠 일이었다. 후계에 가까운 아들을 낳았다고는 하나 그녀는 세르펜스 아래의 귀족 성 하나조차 받지 못했다. 그런데 부인이라니.

하녀는 잘못한 것이 없었지만 고개를 숙였다. 성의 주인이 아끼는 여인이자 주인의 아들을 낳은 여자였다. 그녀가 전에 어떤 신분이었든 지금은 뜻에 따라야 하는 권력자였다.

“다시 또 이런 실수를 하면 네 혀를 잘라 버릴 테니 각오해.”

샬럿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하녀를 쏘아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녀의 목적지는 아들이 있는 바로 옆방이었다. 그녀가 옆방과 연결된 문을 열자 미겔을 돌보고 있던 유모 셋과 하녀들이 그녀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큼지막한 미겔의 방은 온갖 것으로 꾸며져 있었다. 세르펜스의 상징인 푸른 바탕 벽지에는 금박으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은으로 만들어진 요람과 갖가지 보석들로 장식된 모빌은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왔다.

“미겔은?”

“도련님께서는 방금 막 잠이 드셨습니다.”

“어디 봐.”

샬럿이 요람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 두 달이 된 그녀의 아들은 또래보다 조금 컸다. 아무래도 배 속에 오래 있어서겠지. 샬럿은 부채를 펄럭이며 건강한 혈색의 아들을 보다가 손을 뻗었다. 긴 손톱과 여러 개의 화려한 반지에 유모 하나가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다른 이의 제지에 고개 숙이고 말았다.

“우리 아드님…….”

통통한 뺨을 누른 샬럿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 은발도 그렇고, 감겨 있어 보이지는 않았으나 금색의 눈도 그렇고. 누가 보더라도 아들은 공작의 피였다.

‘그래. 이 아이만 있으면…….’

아이를 낳기 전에는 이상하리만치 불길해 그저 아이를 떼고 싶었는데 막상 출산하니 모든 게 괜찮아졌다.

이즈카엘은 그녀의 아들을 후계로 만들 생각인지 공작 부인에게서 난 아들과 미겔을 대놓고 차별했다. 샬럿은 아들이 공작의 품에 안겨 그 대단하다는 기사들에게 사열식을 받은 날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내 아들을 안아야겠어.”

“하지만 방금 잠이 드셨는데…….”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샬럿이 잠든 미겔을 품에 안으려 하자 유모 둘이 불안한 얼굴로 다가와 그녀를 도왔다. 품 안에 아들을 안은 샬럿이 미겔의 얼굴을 바라보며 쾌감에 휩싸였다.

귀족의 고귀한 태에서 나면 뭐 하는가. 그따위 취급인데. 그날 공작 부인이라는 여자한테서 난 아이는 사내임에도 불구하고 이즈카엘에게 안겨 보지도 못한 채 어느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고 했다. 샬럿은 그게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내 아들, 미겔에게 문제는 없지?”

“예. 도련님은 매우 건강하십니다.”

아이가 곧 그녀의 힘이었다. 지금도 보라지. 예전에는 그녀를 천하다 손가락질하던 이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지 않는가. 샬럿이 미겔을 앞뒤로 살살 흔들며 그녀에게 모든 걸 가져다준 아이의 무게를 느꼈다. 두 달밖에 안 된 아이였건만 아들은 제법 무거웠다.

‘하지만 아직…….’

샬럿은 아들로 인해 성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다. 이즈카엘은 그녀에게 펑펑 쓸 금화와 시중을 들어 줄 여러 하인들, 심지어 호위할 기사까지 쥐여 줬다. 그러나 샬럿은 부족했다. 그녀는 가지지 못한 한 가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명예. 샬럿은 공작 부인이, 귀족이 되고 싶었다. 이즈카엘의 곁에서 적법한 아내로, 공작이 될 미겔의 고귀한 어미로 완전무결해지고 싶었다. 성안 이들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면 뭐 하는가. 온갖 요리를 대접받고 사고 싶은 걸 모조리 가지면 뭐 하는가.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와 손가락질은 계속될 텐데.

‘그 자리는 내 거야.’

이즈카엘은 그녀에게 공작 부인 자리를 줄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그가 주지 않는다면 직접 쟁취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이즈카엘이 공작 부인에게 보이는 태도가 조금 걸리긴 했다. 그는 그녀에게 못되게 굴고 있긴 했으나 분명 자신의 아내를 여자로 보고 있었다. 이즈카엘은 샬럿이 은근하게 맨살을 보여도 공작 부인의 얼굴만 쳐다보는 사내였다.

샬럿은 공작 부인을 보는 이즈카엘의 눈빛을 보며 당분간 자신에게 저 시선이 올 리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억울하고 분했으나 어쩌겠나. 그는 그 자신의 아내에게 미쳐 있는 사내인데.

그러나 샬럿은 이즈카엘의 아내를 향한 애정이 영원하다 믿지는 않았다. 감정만큼 순간적이고 빠르게 변하는 건 없었다. 애정은 한순간에 미움이 되곤 했다. 지금도 보라지. 사내는 제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영문 모를 이유로 미워하고 있었다.

그 양가적인 감정의 이유까지야 알 수 없었지만 샬럿은 이즈카엘의 옆에서 그 누구보다 빠르게 그 사실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건 그녀에게 기회였다.

샬럿은 이런 일에 제법 자신이 있었다. 이간질. 그건 그녀가 살기 위해 자연히 터득한 기술 중 하나였다. 그녀는 이즈카엘의 애정은 자신에게, 미움은 공작 부인에게 돌릴 생각이었다.

‘……이 참에 완전히 치워 버렸어야 했는데. 차라리 사내가 있다 소문을 내야 했나.’

반지는 그 시작이었다. 샬럿은 세르펜스 공작가 내 반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헤레이스의 방을 드나드는 이 중 하나를 은밀히 매수해 반지를 훔쳐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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