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이리 내! 내 아들을 달란 말이에요!”
높게 올라간 목소리가 흡사 비명과도 같았다. 헤레이스는 에르젠의 울음에 정신이 나갔다. 흔들리는 아이가 걱정돼 미칠 것 같았다. 그러잖아도 약한 아이였다. 의원은 잘 먹이고 잘 재우면 된다 했지만 어미의 마음이란 게 그리 쉽게 잠잠해질 리 없었다.
에르젠이 인상만 찡그려도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이가 울면 가슴이 저미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그녀의 가장 소중한 심장을 남편이란 이가 아무렇게나 뒤흔들고 있었다.
“이즈카엘! 이러지 말아요. 왜 이러는 거예요!”
남편의 힘을 이기지 못한 그녀가 사내의 팔에 매달렸다. 흰 손이 계속해서 아이에게 닿으려 애썼다. 하지만 손끝에 닿는 건 사내의 팔이나 빈 공간뿐이었다.
“이즈카엘, 말로 해요. 에르젠을 내려놓고 일단…… 악!”
헤레이스를 단호히 쳐 낸 이즈카엘이 아이를 든 채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헤레이스는 벽에 부딪힌 몸을 어떻게든 추스르며 일어나 이즈카엘에게 달려들려 했다. 하나 역부족이었다. 그가 한 손으로 헤레이스를 쉽사리 제지한 채 벌컥 문을 열었다.
“데려가.”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놀란 눈을 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섬뜩한 주인의 낯에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 있던 하녀 하나가 에르젠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아이는 여전히 세상이 떠나가라 우는 중이었다. 성안 복도가 온통 아이 울음으로 가득 찼다.
“에르젠! 에르젠!”
억지로 아들과 떨어진 어미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아이의 아비이자 여인의 남편인 사내는 매정했다. 그가 뒤돌아 헤레이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에르젠…… 흐으.”
이즈카엘은 헤레이스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가 돼서야 손을 놓았다. 그에게 붙들린 채 벽으로 밀쳐져 있던 그녀는 거의 혼절할 때까지 울며 발버둥 치다 벽에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졌다.
“당신하고 대화 한번 하기 어렵군.”
헤레이스를 억지로 일으킨 이즈카엘이 그녀를 카우치에 내동댕이치듯 앉혔다. 몸을 추스르지 못한 채 축 늘어뜨린 헤레이스는 독기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어. 아이를 내보낸 건 당신과 단둘이 이야기하기 위해서야. 일이 끝나면 아이를 데리러 가건 말건 마음대로 해.”
“에르젠은 어린 아기일 뿐이에요. 대화가 필요했다면 그렇게 내보낼 필요 없었어요. 위험하잖아요! 아기는 그렇게 대해서는 안 돼요. 그런데 이즈카엘 당신은…… 당신은 정말…….”
에르젠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서러워진 헤레이스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나 이즈카엘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헤레이스 쪽으로 던졌다. 반짝하고 반사된 작은 물건이 앉아 있는 헤레이스의 드레스 위로 떨어졌다.
“이게 뭔지 알아보겠어?”
이즈카엘이 던진 물건은 작은 금반지였다. 반지를 알아본 헤레이스가 서러움도 잊은 채 이즈카엘을 올려다봤다. 이게 왜 거기 있냐는 듯한 그녀의 얼굴에 이즈카엘이 비소를 흘렸다.
“다행히 알아보는 모양이야.”
반지는 겉보기에도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세공 하나하나가 어찌나 세밀한지 반지는 그 흔한 보석 하나 없이 금으로 만들어졌을 뿐이었건만 그것만으로도 사람을 감탄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예술품 같은 세공 때문에 반지가 귀한 것만은 아니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이 아름다운 금반지는 세르펜스 공작가의 보물이었다. 대대로 세르펜스 공작이 된 이들은 제 부인에게 이 반지를 선물했다. 덕분에 세르펜스 공작가에서는 이 반지를 가져야만 진정한 공작 부인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럼 이게 왜 성 밖으로 나갔는지 설명할 수 있나?”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헤레이스가 후다닥 일어나 화장대로 다가갔다. 반지는 본래라면 매일 끼던 것이었다. 에르젠을 돌보느라 잠깐 빼놨지만 관리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화장대 가장 깊숙한 곳 자물쇠로 단단히 채워진 보석함을 꺼낸 그녀가 화장대 거울 뒤 숨겨진 공간에 손을 넣었다. 곧 작은 열쇠가 헤레이스의 손에 잡혔다.
“대답이 없으니 다시 묻지. 당신 손에 있어야 할 반지가 왜 다른 놈 손에 있는 거지? 그것도 악명 높은 사채꾼한테 말이야.”
사채꾼이라니……. 열쇠를 쥔 헤레이스가 떨리는 손으로 보석함을 열었다. 귀중한 것들만 모여 있는 함에는 갖가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석들이 빛나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반지는 없었다.
“그게 왜…… 그건 분명히…….”
“말 더듬지 말고 제대로 설명해. 이게 왜 성 밖에 있냔 말이야.”
“모, 모르겠어요. 분명 저 안에 뒀는데…….”
“모른다니 질문을 바꾸지. 당신, 이걸 손에서 뺐나?”
“…….”
“빼긴 뺀 모양이야. 왜 뺐지? 이게 무슨 반지인지 잊었나?”
가문의 보물이 밖으로 빠져나가다니. 이즈카엘의 힐난에는 당위가 있었다. 입술을 꾹 내리 물은 헤레이스는 차마 이즈카엘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반지를 부여잡았다. 그녀는 지금껏 이 반지가 사라진 사실조차 몰랐다. 가까스로 입을 연 그녀가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에르젠을 돌보는데 반지 같은 걸 끼면 아이가 다칠 수도 있다 했어요. 그리고 에르젠이 차가운 걸 싫어해서……. 하지만 분명 잘 뒀어요. 나흘 전까지만 해도 분명 있었는데…….”
“그러게 왜 당신이 직접 아이를 돌봐?”
질책의 방향이 아이에게로 튀었다. 어떤 힐난이라도 달게 받으려 했던 헤레이스가 영문 모를 낯을 했다. 이즈카엘이 그녀에게 한 발 다가오며 입매를 뒤틀었다.
“헤레이스, 당신 말대로면 아이 때문에 반지를 빼놨고 그사이 반지가 사라졌다는 말 아닌가. 게다가 당신은 반지가 사라진 걸 알아채지도 못했고 말이야. 아이에게 정신이 팔려 공작 부인이라는 이가 가보를 빼놓은 데다가 잃어버리기까지 하다니.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갔군.”
무언가 이상했다. 가보를 잃어버린 건 공작 부인이라 한들 쉬이 용납 받을 수 없는 중죄였으니 질책이야 당연했다. 하지만 책임은 물건을 잃어버린 그녀 혹은 물건을 훔쳐 간 이에게 있는 것 아닌가. 여기서 에르젠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헤레이스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변명은 관둬. 아이를 낳은 다른 가문 여인들은 당신처럼 행동하지 않으니까.”
헤레이스가 반박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즈카엘은 그녀의 말을 자르고서 내리찍듯 강압적으로 제 말만 내뱉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히는군. 왜 처신을 그따위로 하지? 아이를 돌보는 유모나 하녀가 없는 것도 아니잖나. 당신 아들을 돌보는 일은 그치들 일인데 왜 당신이 나서지 못해 안달이지? 왜 혼자 유별나게 구느냐 이 말이야.”
도를 지나친 질책보다 유별나다는 말이 더 아팠다. 헤레이스는 자신이 남다르게 아이를 아낀다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어미라면 누구라도 그녀처럼 하고 싶을 터였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유별나다 한들 그게 저런 말을 들을 만큼의 죄인가.
헤레이스가 생각하기에 이상한 건 오히려 이즈카엘이었다. 그는 그녀를 안았다.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아이를 가지게 했다. 사랑한다며 아이가 생겨 기쁘다 했다. 분명 그래 놓고 왜…….
“아이를 가질 때도 그러더니 낳고서도……. 아이! 아이! 지겹지도 않나?”
지겹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는 제 아이를 왜 저리 싫어하나. 왜 저렇게 거추장스러워하나.
이즈카엘의 발에 차여 구석에 박힌 장난감이 헤레이스의 눈에 들어왔다. 아무렇게나 다뤄진 장난감이 꼭 자신과 아들 에르젠의 처지 같아 서글펐다. 헤레이스의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 갔다.
헤레이스가 당장에라도 울 것 같아 보이자 이즈카엘이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가 고개를 모로 돌린 채 내뱉듯 한숨을 쉬고는 헤레이스에게 다가왔다.
“아이를 돌보는 일에서 손 떼. 그보다는 당신 일에 집중하라고.”
그가 화장대 앞에 꿇어앉은 헤레이스를 일으킨 후 그녀를 푹신한 침대에 앉혔다.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에는 약간의 자책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에 상처를 입을 대로 입은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을 외면했다. 그녀가 침대 위 에르젠의 요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즈카엘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금안이 일렁이며 잔인한 빛을 띠었다.
“……공작 부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군.”
“…….”
“하기야 지금껏 당신은 세르펜스를 위해 한 일이 없지. 굳이 당신이 한 일을 따지자면……. 그래. 몇 달간 내 잠자리를 데우고 쓸모없는 아이 하나를 낳은 게 다인가? 참 대단하군.”
후두둑, 헤레이스가 눈물을 쏟았다. 듣지 않으려 했지만 귀에 박히는 말 하나하나가 너무 날카로워 무시할 수 없었다.
잠자리를 데운다니. 헤레이스는 그와의 사랑이 그렇게 표현될 수 있음에 놀랐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픈 말은 역시 아들과 관련된 말이었다. 쓸모없는 아이……. 에르젠의 푸른 눈이 떠올랐다. 만약 그 여자의 아들처럼 아비의 눈을 타고났으면 좀 더 사랑받았을까? 내가 아닌 그 여자의 태에서 태어났다면 저런 말을 듣지 않았을까?
헤레이스가 기어이 소리를 죽여 끅끅 대자 이즈카엘이 그녀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가 억지로 자신을 보게 하며 헤레이스의 상의 가슴께에 검지를 걸었다.
“지금까지 했던 게 내 침대를 오르는 것뿐인 공작 부인이라……. 하지만 헤레이스, 당신은 최근에 그 일마저 손 놓았잖아?”
“흐윽…….”
“이대로면 곤란해. 저번에는 당신을 공작 부인으로 두겠다고 말했지만 난 무능력하고 쓸모없는 건 딱 질색이야. 그러니 쫓겨나기 싫으면 아이 돌보기 같은 소꿉장난은 그만하고 당신 할 일을 해.”
“흡…….”
“안 하던 일이 어려우면 전처럼 당신 남편 침대 위라도 올라. 올라서 그 알량한 지위를 유지하란 말이야. 알았나?”
알량한 지위. 우는 와중에도 헤레이스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에게는 주고 빼앗는 것이 쉬울지도 몰랐으나 헤레이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알아들은 거로 하지. 그럼 지금 당장…….”
이즈카엘이 말끝을 흐리며 손에 힘을 줬다.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흐트러진 드레스가 쉽사리 흘러내렸다.
“……당신 할 일을 해.”
그가 눈물이 흐르는 헤레이스의 눈에 수없이 입을 맞추며 그녀를 서서히 뒤로 넘어뜨렸다. 헤레이스의 눈에 잠시 암담함이 비쳤으나 곧 체념과 함께 그녀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드레스가 툭, 허물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