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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11화 (11/108)

11화.

더 나아가 이즈카엘이 아이를 외면한다면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상상조차 하기 싫었지만 그녀의 태에서 난 아이는 죄인의 핏줄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율리스 황녀의 아들이자 헤레이스의 약혼자였던 샤를이 그러했듯이.

반역죄는 그래서 무서웠다. 들키면 본인뿐 아니라 주변 가장 소중한 이들도 연좌되어 지옥으로 처박혔다. 그리하여 누구든 쉽게 꿈꾸지 않았다.

“정말 너무하세요. 흐윽…… 도련님은 보시지도, 안아 주지도 않으시고……. 그따위 사생아가 뭐가 대수라고!”

“……안나, 그런 말은 해서 안 돼.”

헤레이스는 제 무릎에 엎드려 우는 안나를 다독이며 제게 닥친 일을 조용히 감내했다. 이즈카엘이 그렇게 하겠다하면 그리될 터였다. 그녀에게는 그를 막을 힘도, 명분도 없었다.

돌연 아이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배 속에 있던 아이가 세상으로 나왔기에 그런 건지 공허한 기분이었다.

그 작은 몸을 안고 있으면 이 비참함과 외로움이 좀 덜할까. 헤레이스는 아이가 있을 방문을 바라보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이즈카엘은 샬럿에게서 본 제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미겔이라 명했다. 예정된 영광이라는 노골적인 뜻을 가진 이름이었다.

물론 미겔이 후계자로 완전히 지목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는 정부 출신의 어미를 둔 사생아임에도 불구하고 영광된 이름 아래 기사들에게 사열식까지 받았다. 과한 처사에 사람들은 아이를 두고 수군거렸으나 공작의 눈초리와 공작을 꼭 닮은 아이의 생김새에 모두 입을 닫았다.

“어미의 출신이 미천하기는 하나, 공작님을 빼닮은 도련님은 미겔 도련님 쪽이죠.”

“그런 머리색은 드문데…… 이러다 후대에 세르펜스 공작은 적발이 아니라 은발로 굳어지는 거 아닐까 몰라.”

“공작님께서도 역시 자신과 닮은 도련님한테 끌리는 거지. 하기야 나 같아도 하나도 안 닮은 자식보다야 친탁한 자식한테 더 눈이 가지.”

헤레이스가 낳은 아들이 그녀를 빼닮은 것과 달리 미겔은 아비인 이즈카엘과 판박이였다. 이즈카엘의 은실 같은 은발에 황금처럼 빛나는 눈. 이즈카엘이 미겔을 안고 있을 때면 모두 부자가 똑 닮았다 입을 모았다.

“도련님의 이름을 에르젠으로 하시겠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헤레이스의 아이는 에르젠이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지게 됐다. 그조차 태어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 던지듯 받은 것이라 성안 사람들은 동정 어린 시선으로 헤레이스 모자를 봤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그들 모자를 안타까워하지는 않았다.

“이제라도 잘됐지, 반역죄인의 딸이잖아.”

“공작님께 귀여움받는다고 기고만장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역시 정의는 살아 있음이야.”

헤레이스의 몰락을 벼르고 있던 몇몇 이들은 공작의 애정이 식은 참에 그녀를 몰아내자며 눈을 번뜩였다. 그들은 반역으로 몰락한 집안의 핏줄인 그녀가 세르펜스 공작가의 안주인으로는 부적격하다며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전 같았으면 이즈카엘이 앞장서 그들의 혀를 베고 목을 효수할 터였으나 그는 변한 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기라도 하듯 소문에 침묵했다.

나날이 헤레이스에게 공대하는 이가 줄었다. 샬럿은 아이를 낳았음에도 별채로 가지 않고 미겔과 함께 서재 바로 옆방에서 계속 머물렀다. 이즈카엘은 샬럿과 미겔을 위해 방을 증축했다.

샬럿은 거들먹거리며 성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많은 이들이 전과 달리 그녀에게 깍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는 더 이상 미천한 출신의 정부가 아니었다. 그녀는 후계에 가장 가까운 아들을 낳은, 공작이 가장 귀애하는 여인이었다.

샬럿 모자에 대한 이즈카엘의 편애를 확인시켜 주듯 미겔의 양육을 도울 유모가 셋이나 붙었다. 그러나 에르젠에게는 한 명의 유모뿐이었다. 헤레이스는 아이를 직접 돌볼 시간이 많다고 기뻐했지만 주변의 시선은 달랐다. 사람들은 이즈카엘이 헤레이스 모자를 홀대한다 여기며 주인의 뜻을 따르려는 듯 서서히 매정해졌다.

그래도 헤레이스는 괜찮았다. 제 방에 닿지 않는 남편의 발길도, 사람들의 무시도 그녀에게서 웃음을 앗아 갈 수는 없었다. 악화된 상황을 모르는 듯 그녀는 전보다 훨씬 많이 미소 지었다. 모두 그녀의 아들 에르젠의 존재 덕분이었다.

“에르젠, 우리 아가…….”

“아가씨도 참…… 도련님이 그렇게 좋으세요?”

“응, 너무 예뻐. 어쩜 나한테 이런 아이가 나왔지?”

“아가씨를 닮았으니 인물 하나는 걱정 없다고 봐야겠지요. 눈도 이렇게 큼지막하시고 피부도 하얗고 깨끗하셔서……. 옆구리 요 별 모양 점만 아니면 정말 결점 없는 피부를 타고나신 건데.”

“이것도 예쁘기만 한데, 뭘. 우리 에르젠은 별도 타고났어요. 쪽.”

“별거 아니겠지만 살펴봐야 해요. 정원사 루터 할아범이 그랬어요. 특이한 모양의 점 중에는 해가 되는 것도 있다고.”

“정말? 그러고 보니 안나, 나 이런 모양의 점 말이야 어디서 봤는데…….”

“이런 모양을요? 어디서요?”

“글쎄…… 생각이 안 나. 일단 괜찮은 건지 이따가 의원을 불러봐야겠어. 방에 들르라고 네가 좀 전해 줄래?”

“예. 제가 한번 들르라 전할게요.”

헤레이스는 아들에게 온 정성을 쏟았다. 에르젠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그저 좋았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뚝 끊긴 방 안, 헤레이스는 아들과 온종일을 함께 보내며 유모에게 여러 가지를 배웠다. 아이 기저귀를 가는 법부터 편히 안아 주는 자세까지. 배움 하나하나가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우리 아가, 에르젠. 난 너만 있으면 된단다.”

헤레이스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출산 후 더 약해진 몸도 견딜 만했다. 아침저녁이 모두 행복했으니……. 그러나 아이가 주는 기쁨에 너무 만취한 나머지 헤레이스는 자신의 향해 다가오는 위협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부, 부인…….”

에르젠이 태어난 지 딱 두 달이 되던 날이었다. 평온한 오후 아들에게 젖을 물리던 그녀를 누군가 찾았다.

쾅.

부서질 듯 열린 문에 놀란 헤레이스가 내려간 상의를 올릴 생각도 못 한 채 에르젠을 품 안에 숨기며 경계 어린 눈을 했다. 갑작스러운 어미의 행동에 에르젠이 울음을 터뜨렸다.

찾아온 이는 애써 잊고 있던 그녀의 남편이었다. 사내는 무에 그리 화가 났는지 수틀린 낯을 하고 있었다. 그가 헤레이스를 노려보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주변에 명했다.

“모두 나가.”

사용인들을 내보낸 이즈카엘이 방 안을 훑었다.

오래간만에 들어온 아내의 방은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 성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이 방은 본래 주인인 헤레이스의 성격처럼 아늑했으나 어딘가 단조로운 구석이 있었다.

따뜻하고 깔끔한 느낌.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의 방에 들어올 때면 항상 그런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아내의 방은 그가 익숙히 알던 모양새가 아니었다.

방은 깔끔히 정돈돼 있던 때와 달리 너저분했다. 여기저기 아기용품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어지럽혀져 있었으며 바닥에는 자잘한 장난감이 굴러다녔다.

뿐만 아니라 부부가 사용하던 침대 옆에는 작은 요람이 있었고, 그가 누웠던 침대 왼편에는 작은 요가 펼쳐져 있었다. 뒤바뀐 분위기만 해도 신경을 긁는 와중에 감히 제 자리를 차지한 물건을 보자 이즈카엘의 심사가 뒤틀렸다.

요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성인에게는 턱없는 크기의 천은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이즈카엘의 시선이 헤레이스의 품 안 아이에게 향했다. 아내의 가슴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안겨 있는 아이는 많이 놀란 모양인지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아내는 그에게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여념이 없었다.

헤레이스가 에르젠의 등을 도닥이며 쉴 새 없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느다란 목소리로 부드럽게 아이를 타이르고 이마에 입을 맞추는 모습이 다정했다. 그러나 그 모습에 이즈카엘은 섬뜩한 얼굴을 했다.

“헤레이스.”

이즈카엘이 음울히 아내를 불렀다. 헤레이스의 시선이 잠깐 닿았다 사라졌다. 그녀는 저를 부르는 남편보다 아이가 중한 듯 아이에게 집중했다. 에르젠이 어미의 구슬림에 히끅거리며 천천히 울음을 멈췄다.

그녀가 에르젠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 줄 때였다. 그새를 참지 못한 이즈카엘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이 위로 지는 그림자에 헤레이스가 눈을 치켜뜨며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에르젠이 놀랐잖아요.”

냉랭한 어투에도 이즈카엘의 눈길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집요하게 헤레이스를 내려다봤다. 진득한 시선이 이어지자 헤레이스는 그제야 자신의 상의가 흐트러져 있음을 눈치챘다. 그녀가 에르젠을 한쪽 팔로 지탱한 채 힘겹게 옷가지를 정돈했다.

“……약한 아이예요. 울면 좋지 않단 말이에요.”

민망함에 헤레이스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조심스레 남편을 살피다 아이를 싸고 있는 강보를 조금 들췄다.

처음으로 아비를 본 에르젠이 눈을 두어 번 끔뻑였다. 헤레이스와 꼭 닮은 푸른 눈에 이즈카엘이 또렷이 담겼다. 얌전해진 아들을 향해 헤레이스가 잘게 웃으며 아이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꺄르르 웃는 모자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미소를 지을 만큼 포근했다.

“잘 오셨어요. 에르젠도 아버지를 보고 싶었을 텐데…….”

몇 번 에르젠과 손장난 친 헤레이스가 한껏 풀린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는 약간의 섭섭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헤레이스로서는 당연했다.

이즈카엘은 첫째인 미겔은 제법 자주 찾았지만 에르젠은 발길은커녕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서 미겔이 이즈카엘에게 안겨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헤레이스는 내심 많이 서운했다. 귀애의 크기가 다르다지만 에르젠도 그의 아이 아닌가. 헤레이스가 요구하듯 이즈카엘 쪽으로 에르젠을 들이밀었다.

“한번 안아 보세요. 에르젠은 착한 아이니까 당신 품에서도 얌전할 거예요.”

“치워.”

차가운 말이 헤레이스의 기대를 배반했다. 이즈카엘은 에르젠이 쓸모없는 물건이나 되는 양 아무렇게나 밀쳤다. 아비에게 거부당한 아이가 입을 씰룩이며 울먹이다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경악한 헤레이스가 아들을 품 안으로 추스르며 화가 난 얼굴을 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올라간 눈썹과 구겨진 미간이 어색했다. 그만큼 헤레이스는 화를 내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아이의 아비는 무도한 짓을 하고도 무표정했다. 그가 덤덤히 말하며 아내를 보다 에르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래서? 헤레이스 당신이 뭘 착각한 모양인데 난 아이를 보러 온 게 아니야.”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의 품 안에서 낚아채듯 에르젠을 빼앗아 갔다. 번거로운 것을 다루는 것처럼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는 조금의 애정도 배려도 없었다.

“뭐, 뭐 하는 짓이에요!”

혼비백산한 헤레이스가 아들을 돌려받으려 팔을 뻗었으나 이즈카엘은 손쉽게 그녀를 피했다. 아비의 품에서 이리저리 흔들린 에르젠이 빽빽 온 힘을 다해 울었다. 아이의 울음에 헤레이스의 낯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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