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사내가 다시 손을 뻗자 헤레이스가 도망치듯 몸을 젖혔다. 하지만 입술만 떨어졌을 뿐,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남편의 손 안이었다. 헤레이스가 파들파들 떨며 놓아 달라 애걸하듯 신음했다.
“싫, 싫어요. 제발…….”
“……입 벌려, 헤레이스.”
지난 몇 달 그와의 관계에 많은 변화가 생겼음을 누구보다 헤레이스 그녀가 잘 알았다. 냉랭해진 그였다. 눈에 띄지 말라 일갈하던 사내였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단 말인가.
열기로 들끓는 눈이 두려웠다. 헤레이스는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쓰며 발버둥 쳤다. 흰 발이 화장대에 부딪치고 작은 주먹이 이즈카엘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그 미미한 반항마저 오래가지 못했다.
“아악!”
허리가 끊어질 듯 격렬한 고통이 몰려왔다. 누군가 내장을 검으로 베고 헤집는 듯한 통증이었다.
이즈카엘도 무언가 이상을 느낀 듯 손을 놓고 헤레이스를 살폈다. 헤레이스는 정신이 어지러워졌는데도 불구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무언가 축축한 것이 앉은 자리가 불길했다.
흰 의자가 붉은 피로 천천히 물들고 있었다. 어둑한 피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 비릿한 냄새가 훅 올라왔다. 푸른 눈이 끝없는 두려움으로 사정없이 떨렸다.
“헤레이스! 밖에 누구 없나? 헤레이스!”
사내의 고함이 귓가에 윙윙거렸다. 이즈카엘이 헤레이스를 들어 올림과 동시에 여러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가…….’
하지만 헤레이스는 파랗게 질린 남편의 얼굴을 끝으로 가물가물한 시야를 놓치고 말았다.
2장. 아이
조산이었다. 헤레이스는 9개월이 채 못 된 사내아이를 낳았다.
개월 수를 못 채운 아이는 조막만 한 크기만큼 울음조차 희미했다. 켁켁 밭은 숨을 뱉으며 당장에라도 떠날 듯 몸을 늘어뜨린 아이는 의원이 숨을 불어 넣은 후에야 제대로 숨을 쉬었다.
‘아…… 아기…… 내 아기…….’
거의 혼절한 상태로 아이를 낳은 헤레이스는 아이가 태어남을 인지함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그녀가 다시 눈을 뜬 건 아이를 낳고도 사흘이 지난 후였다.
안나는 며칠 새 얼마나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는지 척 보기에도 살이 빠져 홀쭉해 있었다. 엉엉 울음을 터뜨린 그녀는 흘러나온 눈물도, 콧물도 닦지 않은 채 헤레이스의 손을 꼭 잡고만 있었다.
“안나, 울지 말고…… 아이를 보여 줘. 아이…… 내 아이는 건강한 거지?”
헤레이스가 낳은 아이는 빈말로라도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안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그녀가 산파에게 다가가 아이를 조심스레 받았다. 흰 강보에 싸인 아이가 다가오자 헤레이스가 고개를 쭉 빼곤 단 1초라도 빨리 아이를 보려 했다.
“아가…….”
쌕쌕이며 자고 있던 아이가 미미하게나마 옹알거렸다. 어눌한 자세로 안아 들었건만 아이는 본능적으로 어미를 알아챈 모양인지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를 처음 본 헤레이스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달을 채우지는 못했으나 오랜 시간 그녀의 배 속에서 머물렀던 아이였다. 헤레이스는 아이의 작은 손조차 제 탓인 거 같아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작아. 너무 작아……. 흐윽.”
혹여나 아이에게 나쁜 것이 닿을까 눈물조차 쏟을 수 없었다. 헤레이스가 안나에게 아이를 내밀었다. 하지만 안나는 아이를 받아 드는 대신 깨끗한 손수건으로 헤레이스의 눈물을 닦아 주며 그녀가 좀 더 편히 아이를 볼 수 있게 자세를 고쳐 줬다.
아이의 머리카락은 헤레이스를 닮은 검은색이었다. 아직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유독 흰 피부에 전체적인 얼굴선도 그녀를 닮은 것 같았다. 감고 있는 눈은 어떨까. 헤레이스는 아이의 이목구비를 살피며 꾹 다물려 있는 눈꺼풀 뒤 아이의 눈동자 색을 가늠했다.
“도련님이 부인을 꼭 닮으셨어요. 전 부인의 눈이 도련님께 간 줄 알았다니까요.”
유순해 보이는 산파가 헤레이스가 궁금해하는 것을 알아챈 듯 푸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헤레이스는 궁금증을 해결한 것보다 다른 말에 더 놀라 되물었다.
“사내아이야?”
“어머, 내 정신 좀 봐. 아가씨…… 아니, 부인. 사내예요. 어여쁘긴 하지만 도련님이랍니다.”
안나의 말에 헤레이스가 신기한 듯 아이를 살폈다. 너무 곱고 작아 여자아이인 줄 착각했다. 오밀조밀한 코도, 둥근 모양의 입술도 여아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아이를 보고 있자니 감정이 다시 울컥 치솟았다. 헤레이스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오르는 걸 본 의원이 다가왔다. 그도 며칠 새 고생한 모양인지 많이 지친 기색이었다. 그러나 주름진 눈가에는 자신이 모자를 살렸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의원이 헤레이스를 향해 걱정스레 말하며 안나와 산파에게 눈짓했다.
“부인께서도 충분히 쉬셔야 합니다.”
헤레이스에게 아이를 넘겨받은 안나가 산파에게 아이를 건네주었다. 산파가 익숙한 듯 아이를 안더니 침실 바로 옆에 딸린 방으로 아이를 데려갔다.
헤레이스는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움직임을 좇다가 문이 닫히고 난 후에도 한참 동안 응시했다. 안나가 그런 헤레이스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다 짐짓 단호한 손으로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헤레이스가 눕자 의원을 비롯한 하녀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방에서 나갔다. 안나가 커튼을 치고 난로를 한 번 더 살폈다.
안나가 타오르는 장작을 두어 번 뒤섞은 뒤 돌아섰다. 헤레이스는 여전히 애달픈 눈으로 아이가 사라진 문을 보고 있었다. 안나는 한숨을 쉬고 상전에게 다가가 이불을 덮어 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의원님 말씀 못 들으셨어요. 충분히 쉬셔야 한다잖아요. 일단 주무세요. 주무시고 일어나면 도련님을 다시 데려올게요.”
안나의 말에 헤레이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똑바로 편히 뉜 그녀가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 문뜩 무언가 생각난 듯 안나를 봤다.
“응, 그래. 그런데 안나…….”
고민하듯 우물쭈물하는 목소리에는 고심이 가득했다. 안나가 의아한 낯으로 헤레이스를 봤다.
“……그이는?”
헤레이스의 물음에 안나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질문에는 선명한 기대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헤레이스가 재차 안나에게 답을 요구했다.
“언제 갔어? 분명히 옆에 있는 걸 봤는데…….”
헤레이스는 자신의 곁에 있던 이즈카엘을 기억했다. 여러 번 혼절한 탓에 모든 기억이 선명하진 않았으나 기억나는 장면 속엔 그가 분명 있었다. 그는 헤레이스의 식은땀을 닦아 주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헤레이스는 생전 그의 낯이 그렇게 파리한 걸 본 적이 없었다.
“……공작님은 일이 생기셔서 중간에 나가셨어요.”
“일?”
그렇기에 안나의 말에 헤레이스는 조금 실망할지언정 그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자신은 분명 봤다. 그의 눈 안에 담긴 걱정을……. 깨어났을 때 곁에 있어 줬으면 더 기뻤겠지만 그는 바쁜 사람 아닌가. 아직도 오지 않는 걸 보면 필시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이리라.
“급한 일이래? 혹시 또 토벌을 가는 거면 아이를 한번 안아 보고 가라 전해야겠다. 한번 떠나면 금세 못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아니에요.”
헤레이스가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속살거리자 안나가 참지 못하고 상전의 말을 잘랐다. 누군가를 떠올린 듯 원망 가득한 눈동자가 바닥을 향하다 헤레이스를 안쓰럽게 쓸었다. 안나가 어렵게 입을 뗐다.
“……그 계집애가 아이를 낳았어요. 그것도 아가씨랑 같은 날에요.”
쿵.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헤레이스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안나는 눈을 질끈 감은 상태였다. 서서히 눈을 뜬 안나가 충격으로 멍한 헤레이스의 손을 꼭 잡았다.
“……잘됐구나. 그렇게 고생하더니.”
오랜 정적 후에 헤레이스가 입을 열었다. 억지로 짓는 웃음에는 미처 가리지 못한 슬픔이 가득했다.
예상했던 일 아닌가. 언젠가는 닥칠 일이었다. 헤레이스보다 훨씬 더 배가 부풀었던 여자가 먼저 아이를 낳는 것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시기가 좀 기이하긴 했으나 여자를 탓할 수 없었다. 그 여자라고 그녀와 같은 날 아이를 낳고 싶어 그러한 것은 아닐 테니.
“잘되긴 무슨! 아가씨가 혼절해 있는 와중에 아이를 낳는다며 주인님을 데려갔는데!”
“…….”
“주인님도 너무하세요. 아가씨는 정신도 못 차리고 있는데……. 그렇게 바로 그 계집한테 가시고.”
진실을 알게 되자 서글픔이 몰려왔다. 그랬구나. 그녀에게 간 거구나.
사라진 남편은 저 대신 그의 연인에게로 간 거였다. 하기야 몸이 두 개가 아니라면 자신에게 좀 더 중한 이에게 가는 게 맞겠지. 하지만 이해했음에도 가라앉은 기분은 좀처럼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사랑이 떠났음을 또다시 확인받은 것 같아 가슴이 저렸다.
“정말 얄미운 여자예요. 대체 아가씨랑 무슨 원한을 맺었다고! 그 여자 때문에 도련님도…….”
“내 아이가 왜? 무슨 일이야?”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던 헤레이스가 아이라는 말에 빠르게 반문했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 일에는 신경이 곤두섰다. 헤레이스가 이불을 내리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안나가 재빨리 그녀를 저지했다.
“진정하세요, 아가씨.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에요. 다만…….”
“다만?”
“그 여자의 아이가 몇 시간 먼저 태어났어요. 그리고 주인님께서…….”
“…….”
“……그 여자의 아이가 자신의 첫 번째 아이다 사람들 앞에서 공표하셨고요.”
저절로 힘이 빠졌다. 첫아이. 그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제법 컸다.
귀족가에서는 사생아를 쉬이 인정하지 않았다. 혹 사생아를 귀애해 인정한다 해도 후계가 끊어지지 않는 이상 사생아에게 가문의 성을 물려주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이즈카엘은 정부의 태에서 난 사생아를 정식으로 공표했다. 그건 그가 그 아이를 자식으로 인정하는 셈이었으며, 성 또한 물려주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한 거였다. 게다가 첫아이라니. 귀족 가문에서는 장자 승계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이즈카엘의 말은 후계 경쟁에서 특정 아이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과 같았다.
이는 이즈카엘이 헤레이스를 단단히 무시하다 못해 없는 사람 취급하는 처사였다. 그의 적법한 아내인 헤레이스는 불임도 아니었고, 심지어 아이를, 그것도 사내아이를 낳았다. 보통의 가문이었다면 부인 쪽에서 억울하다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감히 그를 상대로 소송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자신을 도와줄 친정 가문도, 지인도 남지 않았다. 게다가 세르펜스 공작 부인이라는, 순전히 이즈카엘의 손에 달린 위태로운 직위가 사라지면 그녀는 귀족조차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소송 자체는 무효였다. 죄인이 대귀족인 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는 없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