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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9화 (9/108)

9화.

“몸이 불편해 그런지 요새 도통 잠을 못 자더군. 덕분에 나도 잠이 다 깼어.”

아…… 그 여자 때문에 피곤한 거구나. 말을 하며 길게 한숨을 내뱉는 사내는 그녀와 달리 편안해 보였다. 헤레이스는 갑갑한 마음을 내리누른 채 간신히 답했다.

“……안타까운 일이에요.”

헤레이스의 말에 이즈카엘이 눈을 떴다. 그의 미간은 주름진 채 조금 좁혀져 있었다. 그가 거울 속 헤레이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두운 실내 안이라 안 그래도 사내치고 붉은 입술이 두드러져 보였다.

“뭐가?”

“…….”

“뭐가 안타깝다는 거지? 편히 쉬지 못하는 당신 남편이 안타까운 건가, 아니면 임신으로 힘든 남편의 정부가 안타까운 건가.”

사내의 큰 손이 헤레이스의 허리를 감았다. 둥근 배 위에 처음으로 남편의 손이 닿자 헤레이스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얼핏 보면 다정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헤레이스는 이상하게 겁이 났다. 그가 당장에라도 자신과 아이를 해칠 것만 같았다.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헤레이스가 눈을 내리깔며 기계적으로 말했다.

“비명을 자주 지르던데…… 곁에 자주 있어 줘요. 임신해서 불편할 때는 남편이…….”

하지만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남편이라는 단어는 도저히 뱉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남편이었다. 그 여자의 남편이 아니라.

헤레이스가 말을 하다 말자 이즈카엘이 그녀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긴 손가락이 축축한 입술 안쪽과 이를 살짝 건드렸다.

“왜 말을 하다 말아?”

“…….”

“당신은 참 대단해.”

“…….”

“남편에게 정부의 곁에 자주 있으라 부탁하는 부인은 꼬장꼬장한 동부 촌구석에서도 드문데 말이야. 내가 부인 하나는 정말 잘 뒀지. 안 그런가?”

고저 없는 말투가 건조했으나 그 속에는 비아냥이 가득했다. 헤레이스가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거울을 통해 남편을 훔쳐봤다. 그는 여전히 헤레이스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한쪽은 말이 너무 많아 신경이 쓰이는데 다른 쪽은 말이 없어도 너무 없군.”

“…….”

“당신은 나한테 할 말이 그렇게 없나?”

야릇한 감각이 수치스러웠으나 헤레이스는 잠시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다 무언가 결심한 듯 사내의 손을 잡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용기 내 거울 속 그를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있어요.”

“…….”

“당신한테 할 말 있어요.”

이즈카엘이 헤레이스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헤레이스가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이…… 그러니까 우, 우리 아이 말이에요. 곧 태어나요. 그건 알고 있나요?”

아이. 몇 달간 감히 말조차 떼지 못한 주제였다. 그가 정부의 아이를 후계자로 삼겠다 공포한 날 이후로 헤레이스는 이 주제를 감히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다시 그에게 똑같은 답을 들을까 두려웠고, 제 아이에게 관심 없는 그가 막막했다.

“……내가 머저리로 보이나. 당신 배 속 애가 8개월이 넘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어.”

일부러 우리라는 말을 썼건만 돌아온 건 그녀만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삭막했던 현실이 절실히 체감되자 헤레이스의 표정이 무너질 듯 애처로워졌다. 그녀가 사내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애원하듯 이름을 불렀다.

“이즈카엘.”

“…….”

“정말 그 여자의 아이에게 후계 자리를 줄 거예요?”

정부의 아이도 그의 자식이니 헤레이스로서는 이즈카엘에게 무어라 할 계제가 못 됐다. 평범한 결혼이었으면 달랐을지 모르나, 그의 말대로 그녀의 처지는 황제가 내린 하사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의 한 시절 사랑으로 지금의 자리에 있지만 그의 말 한마디면 당장에라도 내쳐져 차디찬 겨울의 낙엽처럼 바스러질지도 몰랐다.

잔인한 현실이었으나 지난 몇 달간 헤레이스는 제 상황을 곱씹으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돼요? 당신 말대로 내가…… 내가 부족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난 당신의 적법한 부인이에요.”

물론 내린 결론은 암담했다. 아이를 위해 이즈카엘에게 비는 것 외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었다. 그녀는 노예처럼 그의 발치에 엎드려 아이의 미래를 쟁취해야 했다. 그의 사랑을 받았을 때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부인이긴 하나 정부만도 못하지 않나.

“당신이 이 아이를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는 나 때문에 힘들 거예요. 알잖아요. 난…….”

“그대가 뭐?”

“……당신 말대로예요. 죄인의 여식이자 애매한 신분을 가진 난 아이의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아이의 아버지인 당신이 이 아이를 도와줘야 해요.”

이즈카엘의 손에 헤레이스의 창백한 뺨이 닿았다. 그녀가 그의 손에 자신의 볼을 비비며 일말의 정을 호소했다. 제발…….

“이즈카엘, 우리 아이를 지켜 주세요. 부탁이에요.”

“…….”

“우리 아이에게 명예로운 미래만 준다면 더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을게요. 당신이 시키는 건 뭐든 할게요. 조용히 있으라면 그럴 수 있어요. 방에서 나오지 말라 하면 그것도 좋아요. 당신이나 그녀의 눈에 띄지 않겠다 맹세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아이는 죄가 없잖아요. 나 때문에 이 아이가 손가락질받는다면 난 견디기 힘들 거예요.”

눈물 몇 방울이 이즈카엘의 손을 적셨다. 아이를 위하는 어미의 흐느낌이 간절했다. 하지만 매정한 사내는 헤레이스를 털어 내듯 손을 빼냈다. 그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참 이기적이야.”

이즈카엘의 핀잔에 헤레이스가 영문 모를 낯을 했다. 그가 헤레이스를 내려다보며 지겹다는 듯 더욱 깊이 미간을 구겼다.

“그럼 샬럿의 아이는? 그 아이에게는 명예가 없어도 되나?”

이즈카엘의 말에 헤레이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여자의 아이……. 생각해 보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하지 않았다.

이기적이라 해도 좋았다. 하지만 당연한 것 아닌가. 헤레이스에게는 남편의 정부가 낳은 아이보다 당연히 배 속에 있는 그녀의 아이가 중했다. 하지만 남편의 구겨진 얼굴을 보자 이유 모를 부끄러움이 들었다.

그녀의 남편 이즈카엘은 사생아였다. 때문에 그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어린 시절 샤를과 함께 이 성에서 놀 때면 그는 먼발치서 그녀와 샤를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에게만은 천사나 다름없었던 공작 부인이 이즈카엘에게는 어찌나 무서운지 헤레이스는 아무것도 모를 나이에 자신보다 세 살이나 많은 그를 가엾다 생각했다.

‘……괴로운 거야.’

그는 겪어 봤기에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이리라. 사랑하는 여인의 태에서 난 자식이 자신처럼 사생아로 태어나 쓰라린 것이리라.

“당신의 아이는 후계가 아니어도 충분하다 보는데. 문제가 있긴 하나 어미인 당신이 공작 부인으로 있는 한 그 아이는 세르펜스의 적법한 혈통으로 별 탈 없이 자랄 거야. 하지만 샬럿은 당신이 그 자리를 차지한 덕에 정부로 지탄받고 있지. 그러니 후계자 자리는 당신과 당신 배 속 아이가 양보하는 게 옳지 않나?”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으나 울컥 올라오는 자괴감에 몸서리만 칠 뿐 어떤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이즈카엘의 말 하나하나가 그녀를 상처 입혔다. 특히 그가 그녀더러 공작 부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때 헤레이스는 마음속 어딘가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말이 함의하고 있는 바는 분명했다.

이미 과분한 것을 쥐여 줬으니 이 이상 어떤 것도 바라지 말라.

헤레이스가 고개를 숙였다. 흐르는 눈물이 온 얼굴을 적셨다. 그의 옆자리를 포기하면 아이에게 자비를 베풀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쉽사리 공작 부인 자리를 포기하겠다 말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이 자리를 내려놓는다고 해서 이즈카엘이 제 아이에게 후계 자리를 준다는 보장도 없었을뿐더러 그것만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말을 꺼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데 입이 도통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이즈카엘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에게 당신의 옆자리를 포기하겠다는 말을 죽어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헤레이스는 계속해서 눈물만 떨궜다. 풍성한 검은 머리가 가는 목선을 따라 흐트러졌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줄기가 가슴과 부푼 배 부위의 침의를 적셨다.

이즈카엘은 가만히 서 흐느끼는 아내를 바라보기만 했다. 언젠가부터 그의 아내는 그의 앞에서 항상 눈물만 흘렸다.

더없이 처연하고 애처롭게. 그리하여 건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그렇게 울었다.

이즈카엘이 작은 얼굴을 쥐고 들어 올렸다. 그에게 힘없는 아내를 뜻대로 다루는 일은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빼앗는 것보다 쉬웠다. 울음에 뭉개져 붉어진 눈가가 그를 자극했다. 그가 아이를 어르듯 아내의 뺨을 살짝 쓸었다.

헤레이스는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잔뜩 들린 고개에 목이 아플 만한데도 그녀는 눈꺼풀을 내리깐 채 최대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즈카엘은 그게 언짢아 견디기 힘들었다. 그가 흉포한 성질을 간신히 누른 채 짓무른 아내의 눈언저리를 비비며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포기하긴 일러.”

“…….”

“헤레이스, 당신 처지가 바닥인 건 사실이지만…….”

“…….”

“내 부인께서는 여전히 사내를 동하게 하는 재주가 있거든.”

이 자리에 고귀한 세르펜스의 공작은 없었다. 욕망에 어둑히 젖은 그의 눈이 헤레이스를 당장에라도 발라먹을 듯 샅샅이 파헤쳤다.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다면 그대 스스로 움직여. 움직여서 내 마음을 돌려. 그럼 혹시 모르잖나. 내가 또다시 당신한테 넘어가 원하는 건 뭐든 갖다 바칠지.”

그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눈만 봐도 알았다. 헤레이스가 파르르 떨다 고개를 저었다. 싫다. 그런 관계는 싫었다. 몸으로 그를 유혹하라니 끔찍한 말이었다.

“왜? 그것조차 못 하겠나?”

헤레이스가 도리질 치자 사내의 손아귀 힘이 한층 강해졌다. 양 뺨이 눌리며 자연히 입이 벌어졌다.

흰 치아가 드러나자마자 이즈카엘이 달려들었다. 헤레이스가 고개를 좌우로 세게 저었지만 덫에 걸린 듯 그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싫어요! 싫…… 읍!”

이즈카엘이 억지로 헤레이스를 끌어 제 쪽으로 당겼다. 깊게 허리를 숙인 그가 내리찍듯 그녀에게 입술을 맞추고 혀를 얽었다. 난폭하고 거친 입맞춤에 헤레이스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이를 세웠다.

그러자 사내의 입술에 피가 비쳤다. 물어뜯은 건 헤레이스였건만 붉은 피에 경기하듯 놀란 이 또한 그녀였다. 헤레이스가 거친 숨을 내쉬며 경계하듯 남편을 살폈다. 손등으로 대강 피를 닦은 그가 흉흉한 낯으로 헤레이스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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