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징그러워.”
“…….”
“이즈카엘, 내 말 듣고 있어요?”
샬럿의 신경질 가득한 말에 이즈카엘이 읽고 있던 책을 덮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샬럿은 침대 위에서 이불을 구기며 이를 갈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은 몇 달 전과 다르게 퀭한 것이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그녀가 이불을 쥐어뜯다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이에 닿는 건 닳아 버린 손톱이 아닌 손가락 끝 붉은 살점이었다.
“이, 이거 대체 뭐예요. 왜…… 안 나오는 거야?”
“…….”
“왜 계속 자라기만 하는 거야! 언제까지 자랄 참이야! 이건 대체 뭐야!”
제 배를 바라보며 비명을 지르는 그녀는 흡사 광인 같았다. 그녀가 주먹을 움켜쥔 채 당장이라도 제 배를 내리칠 것 같아 보이자 이즈카엘이 성가시다는 듯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샬럿.”
가까이서 본 샬럿의 배는 이불 밑에 있어 형태만을 짐작케 했다. 몇 달 전과 크기에 있어서 별 차이가 없었건만 샬럿의 눈에 제 배는 수십 배 거대해진 후였다. 그녀는 이즈카엘이 제 곁으로 다가오자 구원 줄이라도 되는 양 그를 붙잡고 늘어졌다.
“흐읍…… 무, 무서워요. 당신 아이가 무서워 견딜 수가 없어. 이건 뭔가 이상해. 이상하다고.”
“…….”
“말해 주세요, 이즈카엘. 아니, 공작님. 내, 내 몸을 어떻게 한 거야. 이 안에 도대체 뭐가 살고 있는 거야?”
이즈카엘은 그녀를 그대로 뒀다. 쳐 내지도, 그렇다고 안아 주지도 않은 채. 샬럿 또한 그의 태도 정도는 상관없다는 듯 제 할 말만을 했다.
“사실 계속 이상했어요. 생각나는 것도 없고 머릿속이 이상해. 하지만 이 일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 나 무시하지 마. 알고 있다고. 난…… 나는 당신하고…….”
급박하게 말을 쏟아 내면서도 샬럿은 머뭇거렸다. 이걸 말하면 지금껏 바라 왔던 일이 허상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었다. 하지만 알아야 했다. 이상하게 꼬여 가는 기억도, 자신을 먹어 치울 것 같은 배 속 아이도 싫었다. 두려웠다. 이대로면 왠지 죽을 것만 같았다. 황금이 아무리 좋다한들 누릴 목숨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녀가 눈동자를 사정없이 떨며 이즈카엘에게 말했다.
“……잔 적 없잖아.”
이즈카엘을 올려다본 샬럿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녹음 같았던 녹안은 제게 일어난 기괴함에 질려 어둑해져 있었고 붉었던 뺨은 파리해졌다.
“이, 이거 사람 새끼는 맞아? 나랑 당신 아이가 맞냔 말이야!”
“그만.”
샬럿이 발을 차며 주먹으로 이즈카엘을 때리자 그가 곧바로 샬럿의 팔목을 붙잡은 채 그녀를 밀어내듯 놓았다. 침대에 쓰러진 그녀가 벌떡 일어나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뭘 그만해! 그래! 그만해! 이따위 일 그만두면…….”
그만두겠다는 그녀의 말에 이즈카엘이 샬럿의 목을 가볍게 쥐었다. 그가 딱딱하게 명령했다.
“샬럿, 눈을 감아.”
샬럿의 낯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자신을 내려다보는 서늘한 금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가 힘을 풀고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곧 감았다.
“내가 한 말 생각나나?”
“…….”
“내가 뭐라 말했지? 너는…….”
시야가 어두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두려움이 배가 됐다. 그러나 이즈카엘의 목소리는 어딘가 부드러운 것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샬럿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이 아이의…….”
“…….”
“이 아이의 어미 노릇을 할 거라고.”
“잘했다. 그럼 넌 뭘 가지게 되지?”
또다시 눈앞에 무언가 어른거렸다. 내가 가지게 될 것. 조금 전까지 정신을 좀먹던 두려움이 싹 가셨다. 샬럿이 비실비실 웃음을 지으며 가장 원하는 것부터 조르듯 말했다.
“이 아이가 공작의 핏줄이니 난 공, 공작 부인이…….”
“아니. 그건 내가 한 약속이 아니야.”
매정한 답이 돌아왔다. 안 돼. 개를 훈련하는 것처럼 단호한 말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샬럿이 속으로 반문했다.
‘왜? 내 아이가 공작의 핏줄이면 난 공작 부인이 되어야 하잖아. 나는 왜 될 수 없어?’
억울했다. 하지만 곧 누군가 그녀를 달래듯 조곤조곤 말해 왔다. 이즈카엘의 목소리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샬럿의 의식이 저절로 목소리를 따랐다.
“울 필요 없어. 그래도 가질 게 있잖아. 자, 생각해 봐. 이 아이가 네게 뭘 준다 약속했지?”
“황, 황금. 황금이요. 이 세상 무엇도 살 수 있는 황금…….”
“맞아. 넌 약속대로 황금을 가지게 될 거야. 네 몸무게의 배는 되는 양이겠지.”
황금. 물론 황금도 좋았다. 금만 있으면 지금까지 살았던 것처럼 살지 않아도 될 터였다. 하지만 가장 가지고 싶은 건 역시…….
공작 부인. 그녀는 이즈카엘의 옆자리를 가지고 싶었다. 그의 옆에 있으면 황금뿐 아니라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내 아이가 후계자가 될 텐데 당연히 내가 공작 부인이어야 하잖아. 이 사내도, 이 성도, 황금도, 모조리 다 내 것이야. 내 것이라고!
“하, 하지만…….”
“그만. 그 이상은 안 돼. 주제를 알아야지.”
샬럿이 한 번 더 요구하려 했지만 엄한 목소리는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그 여자는 되는데 왜 나는 안 돼! 억울함에 샬럿은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계속 떼를 쓰면 황금마저 앗아 가 버릴 것 같았다.
결국 샬럿이 대꾸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누군가가 그녀를 침대에 천천히 눕혔다.
“그만 자도록 해. 네게 황금을 줄 아이가 피곤해하잖나.”
샬럿이 눈을 감았다. 그래. 이만 자야 했다. 아이가 무사히 자라기 위해서라도 충분히 자야지. 모든 것을 잊고……. 스르륵 의식이 흐려지며 아까와 같이 번거롭다는 듯 내쉬는 한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나태의 악마 뮬이 그녀의 눈을 완전히 가렸다. 곧 샬럿이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잠에 빠졌다.
그녀가 잠들자마자 이즈카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여인의 부푼 배를 보며 낯을 일그러뜨렸다. 짓씹듯 내뱉는 말에는 살기가 있었다.
“……도대체 언제 기어 나올 참이지?”
* * *
이제는 혼자 빗질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헤레이스는 긴 머리를 빗으며 거울을 봤다. 웬 파리한 낯을 한 여자 하나가 단향목으로 만들어진 빗을 들고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식사를 물린 것도 아닌데…….’
누가 보더라도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안나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서라도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가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구역질이 어느 순간 멈췄다는 거였다. 아이는 뒤늦게라도 영양분을 보충하듯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했다. 헤레이스는 아이에게 미안해서 끌리는 음식이 있을 때면 마다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덕분에 안나는 주방장이 날아갈 듯 기뻐하고 있다고 몇 번이고 조잘거렸다.
‘이즈카엘…….’
혼자 가만히 앉아 배를 쓰다듬자 자연히 아이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몇 달 전 별채에서의 일 이후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녀가 출입을 자제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 또한 서재나 집무실에 있는 것이 아니면 항상 샬럿과 함께한 탓이 컸다.
‘임신한 지 1년이 넘었다고…….’
샬럿에 대한 흉흉한 소문은 헤레이스도 알고 있었다. 배가 부른 지 1년이 넘었다는 그녀는 잔뜩 예민해진 모양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알아듣지 못할 비명을 지르곤 했다. 헤레이스는 제 방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움찔거리다 샬럿의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에 어깨를 축 내렸다. 듣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 발걸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공향이 사라지면 여인의 비명도 잦아들었다. 그리고 사라졌던 발자국 소리는 몇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들렸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는 어떻게 제 연인을 달래 주는 걸까? 대체 어떤 말을 하기에 그 높던 비명이 한순간 끊기는 걸까? 그 여인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대고 사랑을 속삭여 줄까? 아니면 그 여인의 아이에게 동화책이라도 읽어 주는 걸까?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의 발걸음이 가까워질 때면 자수를 놓다가도 잠깐 멈추고는 문을 바라봤다. 그의 사랑과 관심이 제게서 떠났음을 분명히 알았음에도 희망은 잡초처럼 끈질기게 솟아났다.
하지만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굳게 닫힌 문을 보다 헤레이스는 손을 좀 더 재게 놀리곤 했다. 촘촘한 자수처럼 켜켜이 쌓이는 실망을 애써 잊으려는 듯…….
“……우리한테도 한 번쯤은 와 주면 좋을 텐데.”
빗을 내려놓은 헤레이스가 눈을 감고 배를 끌어안으며 아이에게 제 마음을 속삭였다. 안나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마음이었다. 어미가 돼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아 민망했지만 아이에게만은 솔직해질 수 있었다.
“누가 왔으면 한다는 거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헤레이스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화장대 거울 속에는 이즈카엘이 있었다.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 그녀를 보고 있는 그는 짙은 그림자에 녹아들어 안광만 형형히 빛내고 있었다.
“어쩐 일로…….”
젖은 은발에 검은색 침의, 그리고 은은히 풍기는 사내의 체취는 그가 막 씻고 나왔음을 알려 줬다.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동안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스스로를 탓하다 그가 조금 전 제 말을 들었다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당신 방이 보여서.”
다행히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의 혼잣말을 물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괜한 부끄러움에 헤레이스가 얼굴을 붉히며 화장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늦었는데 왜 잠들지 않아?”
은근하다 생각했던 사내의 향기가 순식간에 짙어졌다. 그가 허리를 숙이고 드러난 헤레이스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헤레이스가 눈을 크게 떴으나 곧 익숙한 듯 몸이 먼저 긴장을 풀었다. 이제는 먼일이었지만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종종 앉아 있는 헤레이스의 목에 얼굴을 파묻곤 했다.
“그러는 당신은 왜 이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어요?”
“……샬럿을 달래 주느라.”
사내의 입에서 정부의 이름이 거리낌 없이 나왔다. 이름을 부르는 것에 익숙한 듯, 그 목소리에서 생경한 기색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헤레이스는 제 목에 입술을 비비면서도 정부를 부르는 이즈카엘을 슬픈 낯으로 바라보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빠르게 표정을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