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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7화 (7/108)

7화.

헤레이스는 부끄러움에 다른 핑계를 대면서도 내심 이즈카엘이 알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차가운 질책이었다.

“행동거지 똑바로 못 하나?”

생각지도 못한 책망에 헤레이스가 눈을 크게 뜬 채 이즈카엘을 봤다.

“무슨…….”

“공작 부인이 이런 손수건을 가지고 있는다라……. 그것도 소매 안에 이리 소중히 말이야. 누가 보면 오해하기 딱 좋겠군. 당신한테 사내가 있다고.”

모략에 가까운 말이었다. 놀란 헤레이스가 억울한 마음에 소리를 높였다.

“말도 안 돼요! 이건 내가 만든 거예요. 무료할 때 내가 직접…….”

“알아.”

헤레이스가 흥분하자 이즈카엘이 그녀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그의 답에 기가 막힌 헤레이스가 아연한 표정으로 그를 봤다.

“안다고. 당신 솜씨인 거.”

“그런데 왜……!”

“다른 이들은 모르지 않나.”

흥분한 것이 허탈할 지경이었다. 억지에 가까운 이즈카엘의 궤변에 헤레이스가 대꾸조차 못 한 채 멍하니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련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이즈카엘은 싸늘한 낯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입매를 비틀었다. 소름 끼치도록 명확한 악의가 헤레이스를 향했다.

“난 내 부인이 딴 사내에게 마음이 있다 소문나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러잖아도 크게 손해 보며 데려온 당신인데 그런 말까지 돌면 내가 뭐가 되겠어?”

“…….”

“세상없을 머저리로 불리겠지. 황제 폐하께서 주신 기회를 그따위 마음 가벼운 여인에게 버렸다고 말이야.”

모진 비웃음이 몇 주 전과 같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이즈카엘의 말에 결국 헤레이스가 눈물을 쏟았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울지 마.”

망설임 없이 짓이긴 주제에 이즈카엘은 우는 헤레이스를 부드러이 달랬다. 그가 그녀의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쓸며 눈물을 닦았다. 그 손길이 몇 개월 전 좋았던 때와 같아 더 오싹했다.

“매번 이렇게 눈물 보여 봤자 해결되는 건 없어.”

행동과 다른 지독한 말은 여전했다.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의 얼굴을 정돈해 주곤 그녀의 손에서 손수건을 앗아 갔다. 헤레이스가 뒤늦게 미미한 반항을 했지만 그녀보다 훨씬 높다란 그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가 헤레이스를 떼어 놓고 한 발 물러섰다. 지나가는 바람에 산들거리며 흔들리는 손수건이 그렇게 약해 보일 수 없었다.

“그, 그걸 왜 가져가는…….”

덜덜 떨며 뻗는 손과 붉어진 눈가가 헤레이스의 서러운 마음을 대변했다. 이즈카엘은 흡족한 듯 두어 번 천일홍 자수 부근을 쓸더니 근처 불이 피워져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불안하여 마구 흔들리는 눈이 이즈카엘의 손에 들린 손수건과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을 번갈아 봤다.

“뻔한 것 아닌가. 이따위 오해 부를 물건은…….”

손수건이 팔랑팔랑 내려오다 화마에 닿았다. 헤레이스가 아직 덜 마른 눈조차 깜빡이지 못한 채 그걸 지켜봤다.

“……당장 태워 버려야지.”

천일홍 자수가 있던 곳부터 붉은 불씨가 일더니 곧 수초 만에 회색 재가 피었다. 바람에 날린 재 중 일부가 부스러지더니 헤레이스의 눈동자로 들어갔다.

흐려진 푸른 눈에 또다시 설움이 넘쳤다.

* * *

‘알아볼 가치가 있어.’

안나는 양손을 불끈 쥔 채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연병장을 서성이는 그녀는 자신에게 진실을 알려 줄 이를 찾고 있었다.

‘주인님께서 입조심하라 이르셨는데…….’

‘쟌, 내가 뭐 대단한 걸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

‘하지만…….’

헤레이스가 아이를 가진 지 벌써 7개월에 접어들었다. 무거워진 배에 그녀는 거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성안의 시선은 힘들어하는 공작 부인보다 다른 이에게 쏠려 있었다.

‘이 정도면 다들 안다고. 그 여자가 여기 왔을 때 분명 8개월 차라 했지?’

‘네…….’

‘지금은 1년이 넘었고…….’

‘조심하세요. 아시잖아요. 주인님께서 단단히 경고하신 거.’

‘알았어. 알았으니 그만 가 봐, 쟌.’

기이하게도 이즈카엘의 정부 샬럿은 아직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 개월 수로만 따지자면 1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이즈카엘이 무서워 모두 입을 다물었지만 늦어도 너무 늦은 출산에 여러 소문은 퍼져만 갔다.

‘그래. 그동안 이상하다 했어. 그 여자가 임신했던 시기에는 주인님과 아가씨의 사이가 좋았는데.’

1년 전, 아니 공작이 마지막 토벌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공작 부부는 더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가 어찌나 좋은지 옆에서 보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만삭의 정부라니. 만약 이즈카엘이 한 번이라도 여자를 끌어들였다면 뒷말이 있었을 텐데, 그를 따라갔던 누구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이즈카엘의 막사에 웬 여자가 누워 있어 난리가 났다는 말은 몇 번이고 들었다. 그 여자가 추운 날 밖에서 매타작을 당했고, 막사를 지켰던 기사들도 큰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얼마나 뿌듯했던가. 주인님에게는 제 아가씨뿐이라는 사실이 안나는 그토록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안나는 파리한 안색으로 누워 있는 헤레이스를 떠올리며 이 껄끄러운 일을 알아보마 다짐했다. 다른 이들은 공작이 제 부인에게 질렸다며 함부로 말하곤 했지만 헤레이스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안나는 이즈카엘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두 분 사이 무슨 오해가 있는지는 몰라도…….’

마침 멀지 않은 곳에 폴이 보였다. 얼마 전 정식 기사가 된 그는 전부터 안나에게 좋아한다 몇 번이고 고백했던 이였다. 안나가 눈을 반짝이며 손을 흔들었다.

“폴!”

폴은 안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굳히며 시선을 돌렸다.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숨기는 게 있단 말이지. 그걸 본 안나는 더욱 눈을 빛내며 그의 곁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오랜만이야.”

“어…… 응…….”

“뭐야. 너 이제는 내가 싫은 거야? 내 얼굴도 안 보네?”

“뭐? 절대 아니야! 안나, 내가 어떻게 널 싫어할 수 있겠어. 나는 그냥…….”

“그냥 뭐?”

폴의 입이 딱 다물렸다. 하지만 쉽게 포기할 안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폴의 팔짱을 낀 채 구석으로 그를 끌었다. 안나의 손에 이끌려 연병장 근처의 헛간 뒤로 오게 된 폴이 사방을 이리저리 살폈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 누가 잡으러 와?”

“…….”

“정말 이제 내가 싫어진 모양이구나. 사내들 마음은 쉽게 변한다더니. 알았어. 갈게.”

“아니야! 아니야, 안나…….”

안나가 새초롬한 얼굴로 돌아서자 폴이 더듬거리며 그녀의 팔을 잡았다.

“……뭐야.”

“그런 거 아니야, 안나. 그러니까 그런 얼굴 마. 너도 알잖아. 내……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폴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얼굴을 붉혔지만 안나의 얼굴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고개를 모로 홱 돌린 채 쌀쌀맞은 표정을 한 그녀는 한겨울 서리 같았다. 결국 쩔쩔매던 폴이 손을 들고 말았다.

“안나…… 이러지 마.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어. 네가 말하는 거면 내가 뭐든…….”

안나가 옳다구나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폴에게 한 발 더 다가서더니 고개를 들고 그에게 바짝 붙었다.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폴이 헤벌쭉한 얼굴로 천천히 끄덕였다.

“뭐든? 그럼 내가 묻는 말에 답해 줘.”

“내…… 내가 아는 거라면…….”

“너 주인님이랑 마지막으로 토벌 갔을 때 이야기 좀 해 봐. 그때 무슨 일 없었어?”

안나의 질문에 폴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안나의 눈을 피해 저 멀리 딴 곳을 쳐다봤다. 순조롭지 못한 말이 듬성듬성 나왔다.

“아…… 아무 일도 없었는데?”

“폴!”

“정말이야! 아무 일도…… 없었어.”

지금까지의 방법이 통할 것 같지 않자 안나가 작전을 바꿨다. 그녀가 폴의 손을 꼭 붙잡은 채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폴,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너도 알잖아. 공작 부인께서 요새 얼마나 고생하시는지. 원래도 몸이 약하신 분인데 근처에 그 여자가 들어와서는…… 내가 다 속상할 지경이야.”

“…….”

“주인님과 부인 사이에 오해도 있는 거 같고……. 하아.”

“…….”

“……내가 생각하기에는 분명 마지막 토벌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때부터 너도 그렇고 기사들도 말없이 조용하고. 너 뭐 아는 거 있지? 제발 작은 거라도 좋으니 내게 알려 줘. 응?”

폴의 눈동자가 망설임에 이리저리 떨렸다. 그가 무언가 생각하는 듯싶더니 안나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단, 단장님, 저 여자 배…… 배가…….’

‘쉿! 입 다물어, 폴.’

‘하, 하지만…….’

‘……넌 아무것도 못 본 거다. 이 일은 없었던 일이야. 알았나?’

‘…….’

‘널 위한 거다. 입을 조심하지 않으면……. 네 목숨을 장담할 수 없어.’

에드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입을 닫으라 말했지만 폴은 그 일이 너무도 신경 쓰였다. 밤마다 시달리는 악몽도, 기사들 사이 분위기도 견디기 힘들었다. 이 일을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다.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확인받고 싶었다. 안나의 얼굴이 눈앞에 유혹처럼 다가왔다. 폴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게 말이야…….”

“폴, 거기서 뭐 하나.”

“단, 단장님!”

그러나 그가 막 입을 열려던 차에 그들의 뒤에서 에드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폴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훈련 중에 자리를 비우다니. 벌을 받고 싶은 건가?”

“아닙니다!”

“그럼 빨리 돌아가도록.”

폴이 후다닥 사라졌다. 안나는 입술을 문 채 분한 얼굴을 했다. 바로 코앞이었는데! 분에 찬 그녀가 에드가를 불러 세웠다.

“에드가 경!”

에드가는 안나가 자신을 부를 줄 알았다는 듯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그가 안나를 똑바로 마주 본 채 걸어왔다. 훤칠한 키를 가진 그는 앞에 선 것만으로도 압박감을 선사하는 이였다. 그러나 안나는 전혀 겁먹지 않은 채 그의 회색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말해 주세요. 경은 주인님 곁에 항상 계시니 뭐든…….”

“레이디 셜벗.”

에드가가 안나의 성의 부르며 말을 잘랐다. 셜벗이라는 말에 안나의 안색이 변했다. 셜벗은 디본의 몰락과 함께 사라진 귀족 성 중 하나였다. 독기 서린 갈색 눈이 에드가를 날카롭게 쏘았다.

“공작님께서 입조심하라 하셨던 걸 잊으셨습니까?”

“경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니에요.”

“이러시면 부인께서 더 힘들어지십니다. 그대는 부인께서 가장 아끼는 시녀가 아닙니까.”

헤레이스가 언급되자 꾹 쥐고 있던 안나의 손이 조금 풀어졌다. 에드가가 간략히 고개 숙여 예를 표한 후 돌아섰다. 그러나 에드가는 몇 발자국 걷다 말고 우뚝 멈췄다.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려 안나에게 겨우 들리게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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