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부인, 이대로는 안 됩니다.’
‘…….’
‘식사를 제때 하셔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셔야 하고요.’
헤레이스가 방 안에 틀어박힌 지 꽤 지났다. 그녀의 전담 의원은 그녀에게 제발 몸을 챙기라 애원하는 수준에 달했다.
‘이러다 큰일 나십니다. 아기님을 생각하시고 제발 힘을 좀 내세요.’
헤레이스는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배 속 아기를 생각하라는 의원의 말에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잘 생각하셨어요!”
“어째 나보다 안나 네가 더 좋아하는 거 같구나.”
안나는 헤레이스가 말끔히 그릇을 비우고 밖으로 산책을 가겠다고 하자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헤레이스는 신이 나 이것저것 챙기는 안나의 모습에 자신이 지금껏 그녀를 너무 걱정시킨 건 아닐까 괜스레 미안했다.
“당연히 좋죠. 아가씨랑 함께 나온 건 오랜만이잖아요.”
“너도 참…….”
“천천히 걸으세요. 조심스럽게. 천천히…….”
막상 밖으로 나오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바람이 아직 좀 차긴 했으나 방 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했고, 무엇보다 푸릇푸릇 올라오는 새싹들은 그녀에게 생명력 넘치는 봄을 느끼게 했다.
‘미안해. 너도 답답했을 텐데.’
아이도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녀만의 착각일지도 몰랐지만. 헤레이스는 배 위에 손을 가져다 대며 속으로 아기에게 미안하다 여러 번 사과했다.
“힘들지 않으세요?”
“막상 나오니 좋아.”
두 사람이 걷고 있는 별채의 정원은 본성 정원보다 크기도, 볼거리도 작았지만 임부가 적당히 거닐기에는 충분했다. 헤레이스의 발걸음이 점차 경쾌해졌다.
작은 새들이 머리 위에서 지저귀며 지나갔다. 헤레이스는 정원에서 별채 건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둥지 위에서 새끼를 돌보는 자그마한 흰 새를 구경했다. 솜털 가득한 아기 새들은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평화롭고 따사로운 풍경에 헤레이스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안나는 상전처럼 마음 편히 정원을 즐길 수 없었다. 샬럿의 근황에 대해 떠올린 그녀가 헤레이스에게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이런 데에 그 계집애가 들어오다니…….”
샬럿은 아이를 낳을 때까지 이즈카엘의 서재 옆방에 머물기로 했다. 덕분에 깔끔히 정돈된 별채는 아직 한산했다. 안나는 이 아름다운 정원이 정부의 차지가 되는 것이 영 못마땅한지 그 뒤로도 간간이 툴툴거렸지만, 헤레이스는 애써 모른 척하며 오랜만에 찾아온 안식을 마음껏 즐겼다.
“아이. 부끄러워요. 이러지 마세요, 이즈카엘.”
그러나 그 평화도 잠시. 정원 너머 별채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안나가 관목 뒤로 쪼르르 달려가 앞을 보더니 이를 악물었다.
“아니, 매번 코앞에서 웃고 떠들더니 이게 무슨…….”
안나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즈카엘과 샬럿. 매번 헤레이스의 침실 밖 정원에서 떠들던 두 사람은 어쩐 일인지 별채에 와 있었다. 언제나처럼 곁에 딱 붙어 속살대는 모습이 다정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잠깐 보던 헤레이스가 안나에게 속삭였다.
“……이만 돌아가자.”
안나는 재빨리 헤레이스의 눈치를 살폈다. 또 충격을 받으시면 어쩌지? 하지만 예상과 달리 헤레이스는 덤덤했다. 그녀는 휘청거리지도,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이제는…….’
침실 창을 통해 두 사람을 볼 때면 꼭 몰래 지켜보는 것 같아 괴로웠는데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같은 공간에서 마주하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가라앉았다. 물론 그렇다 해서 가슴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견딜 만은 했다. 그래. 딱 견딜 만했다.
헤레이스가 조용히 돌아섰다. 그러나 그녀가 걷기도 전 높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어머, 부인. 어디 가세요?”
언제부터였는지 이즈카엘과 샬럿이 헤레이스를 보고 있었다. 안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감히 정부 따위가 공작 부인에게 먼저 말을 걸다니. 아무리 총애받는 정부라고는 하나 가당찮은 일이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었다.
“혹시 제가 보기 싫어 도망가시는 건 아니시겠죠?”
안나가 겨우 화를 억누를 때였다. 안나의 눈초리를 느꼈음에도 샬럿은 넉살좋게 웃으며 말했다. 붉은 입술처럼 살짝 끝이 올라간 물음이 사람을 약 올리는 구석이 있었다. 안나는 부들부들 떨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저, 저게……!”
“……난 괜찮으니 조용히 있으렴, 안나.”
헤레이스는 손짓으로 안나를 말렸다. 상대해서 좋을 것 없지 않나.
‘기왕이면 방에만 있었으면 좋겠군. 샬럿이나 내 눈에 띄지 않게.’
그 말을 떠올리며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에게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대신 그는 헤레이스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몸이 따가울 정도로 매서운 시선이었다.
‘눈에 띄어 불편한 거구나.’
이즈카엘의 의중을 그렇게 이해한 헤레이스가 서글픔을 억누르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걸음 옮기려는 차, 이즈카엘이 그녀를 붙잡았다.
“잠깐 이리로 오지. 여기까지 걷느라 힘들었을 텐데.”
“…….”
“어서.”
헤레이스가 망설이자 이즈카엘이 재촉했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거의 강요에 가까웠다. 헤레이스는 이즈카엘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그들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부인. 원래라면 먼저 인사드려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제 몸이 원체 무거워서……. 이해하시죠?”
말과 다르게 송구한 기색은 추호도 없었다. 헤레이스는 샬럿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남편의 정부와 얽혀 봤자 뭐 하겠는가.
샬럿의 무례한 말에도 헤레이스가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자, 이즈카엘이 입매를 팽팽히 당겼다. 그가 주변에 있던 하녀와 기사를 불렀다.
“샬럿을 데리고 들어가.”
“이즈카엘!”
내내 웃고 있던 샬럿이 날카롭게 외쳤다. 이즈카엘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는 꼭 상처 입은 연인 같았다. 안나가 그 잡스러운 꼴에 헤레이스에게만 들리게끔 허, 하고 숨을 뱉었다.
“네가 걱정이 돼서 그런다. 들어가 있어.”
“하지만 계속 같이 있고 싶은데…….”
이즈카엘이 달래듯 샬럿의 머리를 쓰다듬자 샬럿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그의 손을 잡았다. 이즈카엘은 아무 대꾸 없이 미소 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그리고 하녀에게 다시 손짓했다.
그의 단호한 결정을 눈치챘는지 샬럿도 별말 없이 하녀와 기사를 따랐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헤레이스를 보는 눈초리는 너무나 날카로워 헤레이스는 그것이 당장이라도 비수가 돼 자신을 찌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도 잠시 시녀를 물리지. 할 말도 있는데.”
헤레이스는 이즈카엘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또한 그와 단둘이 있기가 두려웠다. 이즈카엘은 차분히 말하고 있었으나 헤레이스의 눈에는 그가 화난 것 같아 보였다.
“……안나는 있어도 괜찮은 아이예요. 어차피 금방 갈 거고, 제 몸이 이래서 함께 있는 거니 이해해 주세요.”
그제야 이즈카엘의 시선이 헤레이스의 배에 닿았다. 그가 헤레이스의 팔을 부축하듯 잡은 안나의 손을 보더니 미미하게나마 인상을 찌푸렸다.
“부축이라면 내가 하지.”
“괜찮아요. 안나로도 충분…….”
“하아…… 말귀가 어둡군.”
이즈카엘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안나의 낯이 하얗게 변했다. 덜덜 떨리는 몸이 가여울 지경이었다.
“공작 부인인 당신 체면을 생각해 예의를 차려 한 말이야. 당장 물려.”
저번 샬럿의 이름을 알려 준 이가 누구냐 물었을 때는 추측에 불과했는데, 이로써 그가 안나를 못마땅해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헤레이스가 급히 안나에게 물러나라 손짓했다. 잠깐 상전을 걱정스레 본 안나가 관목 뒤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기 무섭게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에게 성큼 다가왔다.
“조금 전도 그렇고, 당신은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
“분명 샬럿의 눈에 띄지 말라 말했을 텐데.”
역시……. 그가 화가 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헤레이스는 눈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며 이즈카엘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미안해요.”
“한낱 정부인 샬럿조차 내 말에 바로 복종하는데 당신은 공작 부인이 돼서 날 전혀 생각하지 않는군.”
“여기 있는 줄 몰랐어요.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거예요.”
헤레이스의 목소리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억울했다. 매번 본채 정원에 있던 그들을 피해 이곳으로 온 건데……. 그녀의 말에 이즈카엘이 비웃듯 물었다.
“왜? 내가 이리 말하니 화가 나?”
“…….”
“……또 답을 않는군.”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의 앞에 바짝 붙더니 고개 숙인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강한 힘은 아니었으나 갑작스러운 일에 헤레이스가 당황했다. 그가 돌아온 후 처음 있는 접촉이었다.
“하기야 당신은 항상 그렇지.”
“그만해요. 분명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거라 말했어요.”
“…….”
“경고하고 싶은 말이 그것뿐이라면 이만 가 볼게요. 그게 피차 편할 테니까.”
비꼬는 것이 분명한 말이 이어지자 탁, 하고 작은 손이 이즈카엘의 손을 쳤다. 그 바람에 크게 움직인 드레스 소매 안에서 무언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당황한 헤레이스가 배에 손을 올린 채 허둥대며 물건을 주웠다. 그러나 이미 떨어진 것을 본 듯 이즈카엘이 눈을 좁혔다. 곱게 접힌 손수건이 헤레이스의 손에 아무렇게나 구겨졌다.
“천일홍 자수라……. 누구를 주려고?”
아나이스에서 천일홍 자수가 놓인 손수건은 연인이나 부부에게만 주는 것이었다. 이즈카엘의 물음에 헤레이스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비록 손안에서 구겨진 손수건이었지만 천일홍이 아름답게 수놓아진 것은 누가 보더라도 수준급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헤레이스가 떨어뜨린 손수건은 자수 솜씨가 좋은 그녀가 이즈카엘을 생각하며 장장 두 달간 고생한 물건이었으니.
‘하필…….’
헤레이스는 그가 돌아오면 선물하려 손수건에 온갖 정성을 들였고, 완성한 후에는 몸에서 한시도 떼어 놓지 않았다. 이즈카엘과의 관계가 이렇게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헤레이스는 습관처럼 손수건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전하지는 못했으나 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아직 여전했으니까.
“딱히…… 줄 사람은 없어요. 그냥…….”
도저히 당신을 위한 것이다 말하지 못한 헤레이스가 머뭇거리며 변명했다. 손수건을 등 뒤로 숨긴 채 고개 숙인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그녀의 태도는 다섯 살짜리가 보더라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티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