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안나가 그런 말을 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익숙함……. 이즈카엘이 헤레이스를 위해 아우뉴 호수에 낚시를 가는 것은 거의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입 짧은 그녀를 위해 시간이 날 때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헤레이스는 다 먹을 수 없다며 고개 저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덕분에 늦봄부터 가을까지 성안에는 그가 잡아 온 은어가 항상 가득했다.
‘……올해는 힘들겠지.’
헤레이스의 안색이 조금 씁쓸해졌다. 안나는 어떤 말로 주인의 기분을 풀어 줘야 하나 고심했다. 그러나 안나가 잠깐 생각에 잠겼을 때 창밖에서 무언가를 본 헤레이스의 낯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헤레이스가 창가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떨궜다가 다시 주춤거리며 창밖을 봤다. 느릿한 동작이었지만 그녀의 움직임에는 숨길 수 없는 슬픔이 가득했다. 상전의 변화에 안나가 빠르게 창밖을 살폈다.
‘저, 저 인간들이!’
창 바로 아래 두 사람을 본 안나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햇빛이 잘 드는 정원 자리에는 금발의 여인이 부푼 배를 하고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사내 하나가 서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안나가 저도 모르게 발을 굴렀으나 헤레이스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머물렀다. 밝은 태양 아래 이즈카엘은 여인의 뺨을 매만지며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햇빛에 반사된 그의 은발이 눈부시게 빛났다. 살포시 접히는 금안에는 사랑하는 연인을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잘 어울려.’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밝은 머리색을 가진 두 사람은 꼭 전설 속에 나오는 요정 같았다. 헤레이스가 까만 제 머리카락을 잡았다가 가만히 놓았다. 이즈카엘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고 별밤 같다 칭찬했지만 헤레이스는 그 말이 믿기 어려웠다. 보통의 사내라면 당연히 이런 칙칙한 빛깔보다는 밝고 빛나는 금발을 선호할 터였다.
다시 고개를 든 헤레이스의 눈에 여인이 까르르 웃는 것이 보였다. 가지고 있는 금발만큼 눈부신 웃음이었다. 헤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창가에 비친 제 모습과 여인을 비교했다.
그러자 창밖의 여인과 정반대의 우울한 표정이 들어왔다. 헤레이스가 침울한 제 얼굴을 보고 입꼬리를 억지로 들었다. 원했던 표정은 나오지 않았다. 헤레이스는 한 번 더 미소를 지어 보려다 관두고 다시 밖을 응시했다.
만삭이라 생각했던 여인의 배는 그새 조금 더 나와 보였다. 저 정도면 걷기조차 쉽지 않을 텐데……. 여인의 혈색은 헤레이스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건강해 보였다. 초록빛 눈은 기쁨에 빛났으며 뺨은 붉었다. 헤레이스가 창가로 손을 뻗었다가 스르르 힘없이 거뒀다.
“안나.”
“네, 아가씨.”
“침대로 가게 도와줄래?”
안나가 냉큼 헤레이스를 일으켰다. 시녀의 굳은 얼굴과 딱딱한 행동을 눈치챈 헤레이스가 작게 웃어 보였다.
“……조금 피곤하네. 잠을 좀 자고 싶어서.”
안나는 그게 더 속상했다. 차라리 성격이 독하셨다면 좋았을 텐데. 여느 여인네들처럼 드잡이질 하고 패악을 부리며 소리치시면 이렇듯 갑갑하지는 않았을 텐데.
날 때부터 소심했던 헤레이스는 집안의 몰락 후 여러 죄책감에 거의 병적으로 남의 눈치를 살폈다. 그나마 결혼 후 이즈카엘과 지내면서 서서히 나아졌건만 이번 일로 인해 충격이 컸는지 그녀는 빠르게 이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안나는 그게 못내 괴로웠다. 헤레이스가 또다시 그 굴속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너무 두려웠다.
“고마워…….”
침대에 누운 헤레이스는 파리한 안색으로 긴 숨을 내쉬더니 곧 작은 숨소리와 함께 잠들었다. 거의 도망치다시피 수마로 빠지는 모습에 안나는 헤레이스에게 두툼한 이불을 하나 더 덮어 주며 속으로 밖에 있는 이들을 향해 온갖 욕을 퍼부었다.
‘망할 것들! 넘어져 코라도 깨져 버리라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타들어 가 죽을 것 같은 심경이었다.
* * *
“그런데 거기는 어디예요? 본채 바로 뒤 별채 말고도 별채가 하나 더 있던데. 작아 보이긴 해도 꽤 예뻐서 저절로 눈이…….”
“…….”
“공작님?”
“…….”
“이즈카엘, 내 말 듣고 있어요?”
샬럿은 한참 떠들다 이상함을 느끼고 이즈카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곁에 딱 붙어 있던 사내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금안이 응시하는 건 그들 바로 위 어느 창이었다.
‘정말 잘난 사내야.’
끝없이 욕심나는 사내였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남자의 턱선은 칼처럼 날카롭고 곧았다. 샬럿이 혀로 입술을 훑고는 이즈카엘의 팔을 붙잡아 흔들었다. 애교 많은 목소리는 어떤 사내라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달콤했다.
“아이, 참. 갑자기 입이 붙으셨나. 아무 말씀 없으시면 제가 민망…….”
“그만.”
거세지는 않았으나 단호한 힘이 샬럿을 털어 냈다. 허리를 숙인 사내 덕에 졌던 그늘이 순간 사라졌다. 환한 햇빛이 눈가로 쏟아지자 샬럿이 인상을 찌푸리며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먼저 들어가지.”
사내에게는 일말의 미련도 없었다. 언제 걸음을 옮긴 건지 그새 저 앞까지 걸어간 거대한 등이 매정했다. 샬럿은 별말 없이 입술을 깨물다 퉤 하고 침을 뱉었다. 계속 느끼고 있었지만 저는 이용당할 뿐이었다. 샬럿은 그것이 분하고 억울했다.
손으로 눈가에 그늘을 만든 그녀가 조금 전 이즈카엘이 보고 있던 창을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봤다. 성의 3층 왼편에 위치한 창은 빛이 가장 잘 드는 자리에 있었다.
‘해 볼 만하다 싶었는데…….’
방의 주인을 떠올린 샬럿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도착한 후 마주한 공작 부인을 생각하자 바짝 약이 올랐다. 어디 가서 외관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자부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헤레이스를 본 순간 패배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공작 부인은 소문대로 맹인의 눈조차 번쩍 뜨게 할 미인이었다.
‘괜찮아. 사내들이 혹하는 건 얼굴뿐이 아닌걸.’
그래도 샬럿은 자신 있었다. 자신이 어떤 풍파를 견디며 이 자리를 차지했나. 도박 중독인 아비의 손에 이끌려 헐값에 팔린 후 악착같이 살다 겨우 손에 쥔 행운이었다.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이 행운은 힘들게 산 자신이 차지해야 할 몫이었다. 딱 봐도 곱게 자란 것 같은 그 여자는 이제 물러나야 옳았다.
‘마른 가지 같은 계집이 뭘 하겠어.’
처음 이즈카엘을 봤을 때가 생각나자 몸이 뜨거워졌다. 자신의 막사에 여인이라고는 하녀조차 들이지 않던 공작이 자신을 불러들였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웬만한 기사들보다 큰 키와 덩치를 가진 그의 위압감에 질리긴 했지만 곧 자신을 거칠게 밀쳐 눕힌 그로 인해 두려움은 사라…….
‘어?’
이즈카엘과의 밤을 한창 떠올릴 때였다. 이상하게 길이 끊긴 듯 그 이후의 일이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희뿌연 머릿속에 멀찍이 그를 보던 기억과 그의 막사에서 내동댕이쳐졌던 일만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게 무슨…….’
이상하리만치 소름 끼치는 위화감에 샬럿이 제 배를 봤다. 다음 달이면 태어날 아이를 위해 배는 한껏 불러 있었다. 임신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샬럿은 제 배가 언제 이렇게 불렀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처음 임신을 알아차렸을 때가 있었을 텐데 그런 기억조차 없었다. 심지어 임신해 고생한 순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나마 간간이 나는 기억이라고는 죄다 2개월 전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그조차 어딘가 엉성한 것이 꼭 파 먹힌 양 불안정했다.
몸을 덮은 호사스러운 모피 속으로 스산한 바람이 파고들었다. 뒤죽박죽 조각난 기억에 샬럿의 낯이 파리해졌다. 자신은 분명 두 달 전까지……. 불현듯 어떤 장면과 대화가 솟구쳤다.
‘그때 그리 잔인하게 벌주시더니 왜 다시 부르셨나요?’
‘네가 원할 만큼 황금을 주마. 대신 나와 한 가지 계약을 하지.’
반년 만에 본 사내는 그날도 여전히 서늘했다. 몰래 막사에 들어왔다 매를 치고 죽이라 명할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눈이었다. 사내의 제안에 떨렸던 몸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후에는?
사내는 금방이라도 침대로 들어갈 듯 가벼운 차림이었다. 헐렁한 흰 상의 너머 꿈틀거리는 근육이 색스러웠다. 샬럿 또한 그 추운 날 벗는 것만 못한 얇은 슈미즈 하나를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제 몸에 손가락 하나…….
샬럿이 머릿속을 부유하던 실을 간신히 잡고 끌어당길 때였다. 무언가 훅 떠오르려는 순간, 배가 강하게 요동쳤다.
“아윽!”
찰나의 날카로운 고통과 함께 배 속의 아이가 꿈틀거렸다. 태동이 일자 샬럿의 머릿속이 제자리를 찾듯 다시 말끔해졌다. 머리를 헤집던 안개가 걷히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이유 모를 상실감과 무거운 배가 샬럿에게 두려움을 줬다.
“흐으…….”
“아…… 아가씨!”
그녀가 신음하며 배를 부여잡았다. 옆에 있던 어린 하녀가 그제야 그녀의 상태를 보고는 놀라 다가왔다. 샬럿이 짜증스레 하녀의 손을 쳐 냈다.
“저리 비켜!”
“앗!”
샬럿의 긴 손톱에 그인 탓에 하녀의 손에 생채기가 났다. 붉게 이어지는 실선에 아이가 한 번 더 발길질했다. 샬럿이 인상을 찌푸리며 의자에 편히 몸을 기댔다. 붉은색을 보면 이상하리만치 심장이 뛰고 불편했다.
“쉬…… 얌전히 있어야지, 아가. 이 어미가 힘들단다. 그래…… 조용히…….”
샬럿이 한 손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손톱을 깨물었다. 불안할 때마다 나오는 그녀의 습관이었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놓칠 수 없어.’
딱딱, 규칙적으로 나는 소리가 안정을 가져다줬다. 불쾌감이 눈 녹듯 사라지며 기이한 고양감이 그녀를 감쌌다. 머릿속에는 온통 앞으로 손에 쥐여질 것들이 그려졌다. 천민이라 해도 가지고픈 잘난 사내, 끝없는 부와 권력, 공작 부인이라는 고귀한 신분과 명예…….
샬럿의 녹안이 흐리멍덩해졌다. 그녀가 눈썹을 내리깔며 옴폭 솟은 제 배를 바라봤다. 이 속에 있었다. 모든 것이 다!
그녀가 홀린 듯 둥근 배를 위아래로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내 아가, 네가 무사히 태어나면 난 모든 걸 가질 수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