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해요.”
헤레이스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분이 찼다. 그녀가 이즈카엘을 똑바로 쏘아봤다. 푸른 눈이 정확히 자신을 응시하자 사내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무슨 뜻이지?”
“왜 당신이 화가 나 있어요? 화를 내야 하는 건 나잖아요. 난…… 나는 당신의 아이를 가졌어요. 그런데 당신은 내 앞에서 정, 정부를 데려다 놓은 주제에 뭐가 그리 당당해요!”
감정을 담은 목소리는 빠르고 격했지만 그만큼 진실했다. 당사자가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남편에게 화를 토하는 여인은 마음 아파 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이의 배신에 치를 떨며 울부짖고 있었다.
“나를 생각했다면…… 우리 아이를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여자를 들이고 싶으면 적어도 아이가…… 흑…… 우리 아이가 태어난 후에…….”
“내가 왜?”
그러나 헤레이스의 절절한 울음은 이즈카엘에게 닿지 못했다. 그가 무표정하게 반문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물었어.”
“그,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아이가…….”
“아이. 아이. 당신 머릿속에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생각밖에 없나?”
“…….”
“내 아이를 가진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인가. 그럼 샬럿도 마찬가지겠군.”
또 다른 충격이 헤레이스를 덮쳤다. 크게 눈을 뜬 그녀는 차마 눈조차 깜빡이지 못한 채 남편을 바라봤다. 그는 그새 다시 잔을 채우고 그 속 붉은 액체를 천천히 음미하듯 잔을 돌렸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샬럿이 품은 아이는 내 아이야. 그것도 내 첫아이.”
첫아이.
이 이상 무어라 말해야 할까. 헤레이스는 감미로운 남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역겹게 느껴졌다. 그녀가 입을 막고 두어 번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봤음에도 이즈카엘은 평온한 얼굴로 잔을 입가에 가져가 포도주를 삼키더니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아……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말해 둬야 할 게 있군.”
“…….”
“샬럿에게 손대지 말라는 건 두 가지 의미야. 하나는 내가 귀애하는 여인을 편히 두라는 이야기고 또 하나는…….”
“…….”
“……내 후계자가 안전하게 태어날 수 있도록 배려하라는 뜻이야.”
후계자. 이제 이건 그녀와 이즈카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헤레이스는 제 배를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말도 안 돼요! 당신 후계자는 이 아이예요. 우리 아이란 말이에요.”
잘못하다간 배 속의 아이가 위험해지게 생겼다. 배신당한 부인이 아닌 어미의 표정으로 헤레이스가 표독스럽게 외쳤다. 그녀는 악에 받쳐 말조심하던 것을 그만뒀다.
“어디서 그따위 여자의 더러운 사생…….”
헤레이스가 샬럿이라는 여인을 하찮게 지칭하고 그 배 속의 아이를 더러운 사생아라 욕하려 할 때였다. 그녀는 되는대로 내뱉다 아차 하고 이성을 찾았다.
사생아……. 이즈카엘과 결혼 후 단 한 번도 쓰지 않는 말이었다. 아니, 적어도 이 세르펜스 성에서 그 단어를 함부로 뱉는 이는 없었다.
왜냐. 세르펜스 성의 주인이자 현 세르펜스 공작, 이즈카엘 세르펜스는 사생아였으니까.
“사생아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아…….”
헤레이스가 당혹감에 입을 닫자 이즈카엘이 진한 웃음을 물었다. 어찌 보면 모욕이 될 수 있는 말임에도 그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했다.
“그래. 샬럿은 적법한 아내가 아니니 그녀의 태에 태어난 아이는 사생아지. 하지만 헤레이스, 그대가 잊은 모양인데…….”
“…….”
“나도 사생아야.”
“미, 미안해요.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헤레이스는 화내던 것도 잊고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이런 순간에도 그를 상처 입히는 게 미안했다. 그의 과거를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양손을 모은 채 안절부절못하는 헤레이스는 보는 것만으로도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그녀를 본 사내라면 누구든 그녀를 안고 달래 주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온전히 그녀를 차지한 그녀의 남편은 지독한 구석이 있었다. 그가 잔인한 미소를 띠우고는 사냥감을 보듯 제 부인을 응시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사실이니까. 하지만 헤레이스 그대가 그런 말을 할 처지던가?”
“무슨…….”
“당신 신분이 전처럼 고귀했다면야 내가 아무리 샬럿을 아낀들 그녀의 아이가 내 후계는 될 수 없었겠지. 하지만 당신도 알잖아? 당신은 전처럼 고귀한 여자가 아니야. 누구나 아름답고 고귀하다 떠받들어 줬던 헤레이스 디본이 아니라고.”
헤레이스 디본. 그녀의 처녀 시절 성이자 이제 몰락해 지워진 역린.
헤레이스가 무너지는 얼굴을 했다. 이즈카엘은 분명 알았다. 디본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저 과거를 끄집어내는 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아픈 일인지.
헤레이스는 간신히 봉합해 놓았던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흐름을 느꼈다. 우스운 것은 상처를 치유해 준 이와 다시 덧나게 한 이가 같다는 것이었다. 남편에게 조금의 아픔도 주고 싶지 않아 달달 떠는 그녀와 달리, 이즈카엘은 거리낌 없었다.
“죄인의 여식인 당신은 황제 폐하께서 내게 내린 하사품일 뿐이야. 뭐…… 어찌 보면 샬럿보다 더 미천한 게 당신일 수도 있겠군. 샬럿의 아비는 딸을 팔아넘겼지만 적어도 반역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
“……지금 와서 그런 얼굴 마. 잊었나? 당신이 어떤 처지였는지.”
이즈카엘의 그 말이 헤레이스를 나락으로 끄집어 내렸다. 처지……. 그랬다. 그녀는 이즈카엘이 아니었다면 진즉 어느 집안의 노예로 들어갔을 터였다.
헤레이스가 고개 숙였다. 상대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열패감과 함께 꼭꼭 숨겨 뒀던 부채감이 죄책감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은 내가 당신을 떠받들어 줬지. 하지만 이제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군.”
그래. 그의 말이 모두 옳았다. 헤레이스는 꾹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가만히 의자에 앉아 죄인처럼 그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포크와 나이프가 마음을 대변했다. 피처럼 죽 그인 소스를 보며 헤레이스가 몇 번이고 감정을 삼켜 냈다.
“샬럿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얌전히 있어. 괜히 그녀의 심경을 거스르지 말라는 말이야.”
“…….”
“기왕이면 방에만 있었으면 좋겠군. 샬럿이나 내 눈에 띄지 않게. 어차피 몸 약한 그대는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잖아.”
“…….”
“……내 말 듣고는 있나?”
“…….”
“듣고 있냐 물었어.”
“…….”
“대답해.”
“……듣고 있어요.”
이즈카엘은 헤레이스가 순종하자 오히려 더 불쾌한 낯을 했다. 그가 미간을 구기며 윽박지르듯 그녀에게 말을 붙이다가 이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의자가 거칠게 바닥을 긁으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영리한 그대가 이해했으리라 믿어.”
“…….”
“그럼 먼저 일어나지. 식사마저 끝내고 들어가도록 해.”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이 나갈 때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긴 식탁을 지나 그녀의 곁을 스치고 둥근 아치문 너머로 사라졌을 때…….
“흐으…….”
끅끅하고 눌러둔 울음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와 공간에 퍼졌다.
* * *
서서히 봄이 오는 듯 성안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하지만 헤레이스가 기거하는 방만은 점점 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건 비단 난방의 문제가 아니었다.
성안에는 이미 어느 정도 이야기가 흘러들었다. 사용인들은 부인께서 가엾게 되었다 혀를 차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성의 주인인 이즈카엘이 입을 함부로 놀리는 자는 혀를 자르고 북쪽 산 너머 야만인들의 땅으로 쫒아내겠다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헤레이스는 만찬 이후 방 안에 두문불출했다. 안나와 그녀를 전담하는 의원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녀의 그림자를 볼 수 없었다. 의원은 하루 한 번 헤레이스의 방을 방문할 때마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낯빛이 어찌나 어두운지 모르는 이가 본다면 의원이 아닌 환자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식사를 가지고 올라간 하녀들의 안색 또한 의원과 다르지 않았다.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거의 비슷한 음식량에 안나가 요리사를 수없이 닦달했지만 어떤 진미에도 짧아진 헤레이스의 입은 돌아오지 않았다.
“식사를 더 하셔야 해요.”
“……더는 못 먹겠어.”
“한 입만 더 뜨세요. 주방장이 특별히 만든 거래요. 아기님에게도 좋을 거예요.”
끝났던 입덧이 다시 찾아와 속을 뒤집었다. 안나는 창백한 낯에 날이 갈수록 마르는 상전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저었다.
“휴…… 아가씨, 내일은 더 드셔야 해요. 아셨죠?”
안나는 그날 이후 헤레이스와 단둘이 있을 때면 그녀를 아가씨라 지칭했다. 이즈카엘을 향한 그녀 나름의 소심한 복수요, 불만의 표출이었다. 처음에는 몇 번 안나를 지적하던 헤레이스도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부인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구역질이 올라온 탓이었다.
“……창가로 데려가 줄래?”
침대에 기대앉아 있던 헤레이스가 창밖 호수를 보며 안나에게 부탁했다. 얼어 있던 호수는 조금 녹아 부분 부분 푸른 물이 드러나 있었다. 안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헤레이스를 부축했다. 달이 차 그런 건지 아니면 살이 빠져 그런 건지, 헤레이스의 배는 그새 더 도드라져 보였다. 안나는 침의 위에 푹신한 요를 둘러 줬다.
창가 카우치까지 헤레이스를 부축한 안나가 그녀를 앉힌 뒤 뿌연 창을 소매로 문질렀다. 맑아진 창 너머 펼쳐진 광활한 호수 중 일부가 햇빛에 반사돼 반짝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조금 자라면 저곳에 함께 가고 싶어.”
헤레이스의 얼굴이 조금 편안하게 풀어졌다. 안나는 오랜만에 보는 상전의 미소에 맞장구를 치며 손뼉을 쳤다.
“좋은 생각이에요. 아우뉴 호수에는 맛있는 것들이 많이 있으니까 태어나실 아기님과 함께 낚시를 하러 가는 것도 좋겠어요.”
“너도 참…… 끝까지 먹을 생각뿐이구나.”
“아우뉴 호수 은어가 얼마나 별미인데요. 요즘이야 날씨 때문에 못 잡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제가 주인님께 부탁……, 아.”
“…….”
“……죄송해요.”
“아니야. 괜찮아.”
헤레이스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안나는 제 입을 당장에라도 때리고 싶었다. 세상 멍청한 요 입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