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무슨 말이니. 그때라니?”
“왜 그때 주인님께서 다쳤다 서신이 왔을 때 있잖아요. 그 이후로 이상하게 주인님의 개인 서신이 안 온다 싶더니……. 그때 저 요망한 계집이 주인님을 홀린 게 분명해요!”
안나는 제 말이 거의 사실인 양 흥분해 소리 높였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별달리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하기야 이제 와 그걸 알아본다 한들, 다 무슨 소용인가. 이미 주인은 홀렸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나가 헤레이스의 곁에 가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꼭 잡아 오는 온기에 헤레이스가 방에 들어오고서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나가 따뜻한 눈으로 그녀를 위로했다.
“너무 심려치 마세요.”
“…….”
“물론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을 알아요. 하지만 이보다 더 힘든 일도 견뎌왔잖아요. 이번에도 그러셔야 해요. 이제 홑몸도 아니시고…….”
“…….”
“배 속에 아기님도 있잖아요.”
아기라는 말에 헤레이스가 배 위로 손을 올렸다. 이즈카엘이 제게 준 것 중 가장 큰 선물. 그 무엇보다 그녀를 기쁘게 한 삶의 희망 중 하나. 가라앉아 있던 푸른 눈이 서서히 초점을 찾았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공작 부인은 이 안나의 아가씨예요. 그런 계집애 따위 저만도 못하니 겁먹으실 필요 없어요. 여차하면 그 번쩍거리는 머리카락을 다 뽑아 버릴게요. 믿어 주세요.”
부러 과장되게 말하는 안나의 목소리에 헤레이스의 눈가가 조금 젖었다. 안나는 많은 일을 겪은 후에도 그녀에게 남은, 몇 안 되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헤레이스가 안나의 손을 마주 잡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마음을 추스르고 이겨 나가야 했다. 이리 울며 멍하니 있을 게 아니라 차근차근 무언가 해야 했다.
이즈카엘이 갑자기 왜 돌변했는지는 모르나 만약 그녀에게 마음이 식은 거라 하여도 감내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과거가 있질 않은가.
헤레이스는 처음 세르펜스 성에 왔을 때 몇 달간 이즈카엘과 말조차 섞지 않았다. 그뿐인가. 심지어 그녀는 결혼식 당일 내내 눈물만 보이며 식을 망치고 남편인 그에게 망신을 줬다. 그러니 이즈카엘이 이제 와 그녀를 싫어한다 해도 헤레이스로서는 무어라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하나 생각과는 달리 그가 여인과 함께 있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욱신거렸다. 헤레이스는 손을 꾹 쥔 채 가슴 앞으로 가져갔다.
물론 저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일이었다. 단 몇 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다. 과거라고는 하나 그 감정을 잊을 만큼 헤레이스는 둔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건 몰라도 그녀를 사랑함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솔직한 사람이었다.
‘……우선 그의 아이가 맞는지 확인부터 해야 해.’
헤레이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차가운 눈을 한 남편이 너무도 두려웠지만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용기를 내야 했다. 자신이 이제 혼자가 아니질 않은가.
“안나.”
“네. 부인.”
“이즈카엘…… 공작님께 내가 좀 뵙자고…….”
마음을 먹었을 때 실천에 옮겨야 했다. 용기라는 것은 점차 사그라들기 마련이니. 헤레이스는 불안한 마음을 누른 채 안나에게 이즈카엘을 데려오라 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 밖에서 똑똑 하고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을 향했다.
헤레이스의 눈짓에 안나가 일어나 문을 열자 시종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이더니 이즈카엘의 명을 전했다.
“주인님께서 식사를 함께하자 청하십니다.”
* * *
성안 요리사들이 분주했던 이유가 있었다. 주인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듯 긴 탁자 위 잔뜩 차려진 음식들은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헤레이스는 조용히 식기를 움직이며 맞은편에 앉은 이즈카엘을 힐끔거렸다. 그가 먼저 청한 식사 자리인 만큼 혹여나 샬럿이라는 여인이 있지 않을까 내심 긴장했건만 다행히 식탁에 앉은 건 그들 부부뿐이었다.
하지만 둘뿐이라 해도 내심 섭섭한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보통 이즈카엘은 이런 만찬이 있을 때면 그녀를 직접 에스코트했다. 오늘처럼 시종이 대신 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반적인 귀족 집안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쪽이 당연했지만, 남편과 가까이서 속삭이며 식당으로 내려가는 걸 좋아하던 그녀로서는 기쁨을 하나 빼앗긴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식당에 도착하고 지금까지 이즈카엘은 한마디 말조차 붙이지 않았다. 헤레이스는 어떻게든 이 정적을 깨고 싶었지만 두려움에 선뜻 나서지 못한 채 접시 위 음식을 깨작거렸다. 북부에서만 난다는 푸른 꿩고기는 요리사들이 심혈을 기울인 만큼 깊은 맛을 냈다. 그러나 지금의 헤레이스에게는 아무런 감동도 줄 수 없었다.
“왜 먹지 않지? 입에 맞지 않나?”
그녀가 힘없이 고기를 잘게 썰 때였다. 접시에서 잠깐 눈을 뗀 그녀에게 이즈카엘이 말을 걸었다. 별거 아닌 인사치레였지만 헤레이스는 제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어쨌거나 챙겨 주는 말 아닌가. 어색한 분위기에 갑갑했던 그녀가 수줍게 답했다.
“……먹고 있어요.”
이즈카엘은 그녀의 답에 별달리 더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고기를 입으로 가져가 씹고 삼킨 뒤 곁들여진 구운 버섯을 썰며 여상히 물었다.
“궁금한 건 없나?”
여전히 평온한 그와 달리 헤레이스는 몸을 움찔 떨었다. 궁금한 거라……. 묻고 싶은 건 산더미처럼 많았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속에서 올라오는 질문들을 꾹 내리누른 채 남편이 불편해하지 않을 질문을 던졌다.
“가셨던 일은 잘 끝났나요?”
“이번 소탕으로 당분간 야만인들이 설칠 일은 없을 테니 잘 끝냈다 할 수 있지.”
“다쳤다 들었어요. 물론 나았다는 서신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물어볼 게 그것뿐인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에 헤레이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노란 눈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매섭거나 차가운 눈은 아니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이 화난 것 같다고 느꼈다. 간신히 떨어졌던 입술이 붙어 버림과 동시에 헤레이스가 칼질하던 손을 멈췄다.
“샬럿에 대해 궁금하지 않아?”
그녀가 어물쩍거리자 이즈카엘이 좀 더 대담히 물었다.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있는 헤레이스와 달리 이즈카엘은 아예 식탁에서 손을 뗀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가 헤레이스의 얼굴을 훑더니 같잖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름 정도는 벌써 아는 모양이군. 그럼 그녀의 출신도 알고 있나?”
“…….”
“괜찮은 여자야. 출신이 미천하기는 하나 사내에게 즐거움을 주기에 그만한 여자도 없지. 누구와 다르게.”
갈 곳 잃은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누구와 다르게. 그는 그리 말하며 헤레이스의 상체를, 정확히 가슴 부근을 봤다. 모욕감에 목부터 귀까지 홧홧한 열이 올랐다. 그녀의 눈에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한 것을 모르는 듯 이즈카엘이 포도주를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가만 생각하니 괘씸하군. 난 여기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처음 말하는 건데 말이야.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내 부인이 내 여자에 대해 알고 있다라……. 당신에게 샬럿에 대한 말을 전한 쥐새끼가 있는 모양이야.”
내 부인과 내 여자. 그 단어들이 각각 다른 이를 지칭한다 생각하니 입 안이 썼다. 헤레이스가 찔끔 나오는 눈물을 참기 위해 눈을 두어 번 세게 깜빡였다.
“당신이 아끼는 그 시녀가 알려 줬나?”
“내, 내가 물어봤어요. 안나한테 내가 먼저…….”
그가 말하는 사람은 분명 안나였다. 헤레이스는 스산하게 깔리는 남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안나를 변호했다. 남편은 사람을 아무렇게나 해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 방해된다 싶거나 해가 될 만한 이에게는 가차 없었다.
“당신이 퍽이나 그랬겠군.”
이즈카엘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언짢음이 배어 있었으나 당장 안나가 어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겁에 질린 헤레이스의 귀에 그런 게 들어올 리 없었다.
“정말이에요. 믿어 줘요. 안나는 내가 시키는 대로 그녀에 대해 알아 왔을 뿐이에요.”
“고귀하신 세르펜스 공작 부인이 그럴 리 있나. 내가 당신을 모를까? 당신은 정부나 뭐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듣기도 싫어하잖아. 먼저 남편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라 말할 위인이 아니지.”
정부. 그 단어가 주는 말은 명확했다.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이 자신을 비꼬는 목소리보다 그 단어에 가슴이 아파 고개를 숙였다. 남편의 입에서 정부라는 말이 나온 이상 그에게 다른 여인이 생겼다는 사실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손에 힘을 준 탓에 손톱이 손바닥 깊이 박혔다.
“그건 이제 됐어. 그보다 알려 줄 게 있어 같이 식사하자 청했어.”
헤레이스는 슬픈 낯으로 이즈카엘을 바라봤다. 저 통보하듯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니 확실했다. 이즈카엘. 그녀의 남편은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
헤레이스가 끝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입술을 세게 물 때였다. 이즈카엘이 그녀에게 엄히 경고하듯 목소리를 깔았다.
“미리 말해 두지. 샬럿에게 손대지 마.”
헤레이스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그녀가 쥐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접시 위로 아무렇게나 추락했다.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의 앞에 있는 식탁이 어지럽혀진 것에 잠깐 시선을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를 봤다.
“나, 나는!”
의자에서 일어난 헤레이스의 눈에는 그새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있었다. 이즈카엘은 그녀가 샬럿을 해칠 거라 확신하는 어투로 말했다. 헤레이스는 그것이 참담했다. 그의 사랑이 떠났다는 사실을 이렇게 확인할 거라고, 그녀는 감히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모멸감에 헤레이스는 말조차 하지 못한 채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나 정말 모멸감뿐이었을까. 죽죽 내리치는 눈물을 느끼며 헤레이스는 자조하듯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그것뿐이냐고.
“소란 떨지 말고 앉아.”
우는 헤레이스의 구슬픈 낯에 이즈카엘이 딱딱하게 명령했으나 헤레이스는 그대로 서 있었다. 이즈카엘이 한숨을 쉬더니 식탁 쪽으로 몸을 바짝 가져다 댔다. 그의 앞에 위치한 식탁은 헤레이스의 식탁과 달리 여전히 깔끔했다. 이즈카엘이 식탁 위로 두 손을 모아 잡았다.
“물론 당신 같은 사람이 정부 때문에 움직일 거라 생각하지는 않아. 당신은 그럴 성격이 못 되지. 내 말은 당신이 부리는 사람들을 단속하라 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