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헤레이스의 기다림에 보답이라도 하듯 이즈카엘은 그새 언덕을 넘었다. 곧 도착할 성의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헤리에스가 종종걸음으로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 히이이잉 말이 길게 울며 멈추는 소리가 났다.
검은 망토가 눈앞에서 펄럭였다. 흑마에서 내린 이즈카엘이 종자에게 고삐를 넘겼다. 헤레이스는 곧 그가 다녀왔다고 이마에 입맞춤해 줄 것을 기다리며 기대감 가득한 얼굴을 했다.
‘……아?’
그러나 헤레이스의 예상은 비켜 갔다. 종자에게 말을 건넨 이즈카엘은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아니,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헤레이스가 입꼬리를 끌어 내린 채 막 도착한 남편 일행을 살폈다.
기사들의 분위기도 예전과 달랐다. 이즈카엘의 바로 뒤에서 따르던 에드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며, 다른 기사들도 그녀와 눈 마주치기를 거부한 채 바닥이나 앞만 봤다. 본래 그녀에게 친근한 이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매정하지는 않았는데……. 헤레이스가 위태로운 눈으로 남편의 등을 응시했다.
이즈카엘은 기사 무리를 지나친다 싶더니 그들의 바로 뒤에 섰다. 무언가 있나 하고 쳐다보니 두 마리 말이 끄는 작은 마차가 하나 있었다. 짐마차라기에는 제법 고급스럽고 아늑해 보였다. 그가 마차 창을 두드리고 마차 문을 열었다.
남편의 우미한 옆얼굴에 미소가 맺힌다 싶더니 곧 낯선 여인이 나타났다. 긴 금발 탓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으나 실루엣만 봐도 대단한 미인임이 분명했다. 옆에서 안나가 날카롭게 외쳤다.
“저 계집은 뭐야!”
헤레이스와 함께 이즈카엘을 기다리던 사용인들이 모두 주인과 낯선 여인을 놀란 눈으로 봤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 이즈카엘과 금발의 여인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어라 서로 속삭이더니 작게 웃었다. 이즈카엘이 여인의 허리를 다정하게 잡고는 그녀를 들어 조심스레 바닥에 내렸다.
헤레이스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누가 보더라도 두 사람은 연인이었다. 이즈카엘이 여인의 이마에 입 맞추더니 사랑스럽다는 듯 한참 동안 여인의 눈을 바라봤다. 여인 또한 그를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
“부인! 괜찮으세요?”
헤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배 위에 손을 올렸다. 티가 많이 나지 않았으나 헤레이스는 지금 임신 중이었다. 안나가 그녀를 부축하며 파랗게 질린 얼굴을 했다. 하녀 몇도 급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작은 소란에 그제야 이즈카엘이 눈을 돌렸다. 호박 석 같은 금안이 배를 움켜쥔 헤레이스에게 향했다. 그러나 그 눈에는 걱정 따위 없었다. 무생물을 보는 무감한 눈. 차가운 북부 서리 같은 눈이었다.
헤레이스 또한 더는 이즈카엘을 보지 않았다. 당혹감으로 굳어진 푸른 눈은 남편이 아닌 여인에게 고정돼 있었다. 시선을 느낀 듯 여인이 금발을 휘날리며 헤레이스를 돌아봤다.
여인은 예상했던 대로 미인이었다. 황금을 녹인 듯 구불구불한 금발과 녹음 같은 눈동자가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헤레이스를 사로잡은 건 여인의 어여쁜 얼굴 따위가 아니었다. 낯선 여인의 손은 헤레이스와 마찬가지로 배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확연히 부푼 여인의 배는 누가 보더라도 만삭에 다다라 있었다.
1장. 배신
임신한 아내 앞이었다. 그런데 그 앞에 정부를 당당히 데려다 놓는다니. 게다가 그걸로도 모자라 정부 또한 임신 중이었다니. 남성 중심 사회인 아나이스 안에서도 이러기는 쉽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바닥만 보던 기사들이 이제 이해가 됐다. 사용인들도 시선을 발끝으로 내렸다.
그러나 이 일의 원흉은 아무렇지 않은 듯 걸음을 옮겼다. 헤레이스는 무언가 잃은 듯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다 자신에게 성큼 다가오는 남편의 모습에 눈을 끔뻑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남편의 손에는 저 아닌 다른 여인의 손이 쥐여 있었다. 그저 잊혔으면 하는 장면이 헤레이스를 강타했다.
헤레이스 앞에 당도한 이즈카엘이 넋이 나간 그녀를 천천히 내려다봤다. 맹수처럼 번뜩이는 금안 안에는 무료함과 함께 미세한 불쾌감이 섞여 있었다. 견딜 수 없어진 헤레이스가 무거운 배를 감싸 안은 채 어색한 몸짓으로 고개를 숙였다.
“귀……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처음 보는 남편의 모습이었다. 이즈카엘은 단연코 한 번도 그녀를 이리 보지 않았다. 물기 어린 목소리는 벌벌 떨리는 데다 기어가듯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이즈카엘이 이번에는 대놓고 미간을 구겼다.
두 사람 사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곧 들린 비웃음에 그마저 깨졌다.
“……푸흣.”
이즈카엘 곁에 있던 금발의 여인의 낸 소리였다. 그녀는 이즈카엘이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입까지 막은 채 키득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웃음의 주인을 알아본 안나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채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무섭게 내리 꽂히는 이즈카엘의 시선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이즈카엘이 잡고 있던 여인의 손을 조금 세게 쥐더니 그녀의 손을 도닥였다. 꼭 괜찮다 허락하는 동작 같았다.
“픕…… 죄송해요. 하지만 너무 우스워서…… 크흡.”
여인은 혼자 무에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의 웃음이 길어질수록 헤레이스의 얼굴은 더 창백해져만 갔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한 채 그녀가 용기 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차가운 바람에도 촉촉한 눈을 하고 무언가 갈구하듯 이즈카엘을 올려다봤다.
이즈카엘은 그 시선이 마땅찮은 듯 눈썹을 한 번 씰룩이다 여인 쪽을 돌아봤다. 그가 다정히 여인의 허리 껴안은 채 제 품 안으로 넣으며 헤레이스에게 통보하듯 말했다.
“인사해. 앞으로 나와 함께할 여인이야.”
보고 싶었어. 항상 어딘가를 다녀올 때면 말하던 그 말과 다르지 않은 어투였다. 너무도 평온한 어조에 순간 헤레이스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녀가 들은 말이 옳다는 것을 방증하듯 여기저기서 놀라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부인.”
여인이 살갑게 인사하며 예쁘게 눈웃음 지었다. 눈 덮인 북부와는 어울리지 않게 밝은 여인이었다. 그녀가 헤레이스를 위아래로 훑더니 만삭의 배를 앞으로 내밀었다. 두 손으로 배를 살살 쓰다듬는 모양새가 자신만만했다.
헤레이스 그녀보다 배 이상 부푼 배가 또다시 눈에 들어왔다. 헤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제 배를 만지다 후두둑 눈물을 떨궜다. 어떻게든 참으려 했는데 참을 수가 없었다.
“어머. 이를 어째.”
여인이 이즈카엘의 품을 더 파고들며 눈을 깜빡였다. 누가 보면 꼭 해코지당해 숨는 모양새였다. 안나의 눈에서 다시금 불이 튀었다.
“들어가지.”
이즈카엘은 크게 휘청이는 헤레이스를 지나쳤다. 여인을 거의 안다시피 해 계단을 오르는 그의 입가에는 미약하지만 분명한 미소가 자리했다. 여인이 금발을 찰랑이며 애교 섞인 말투로 대꾸했다.
“알았으니 서두르지 마세요, 이즈카엘.”
이즈카엘. 여인이 강조하듯 말한 남편의 이름이 그렇게 슬플 수 없었다. 헤레이스는 안나에게 기댄 채 저를 지나 계단을 오르는 남편의 등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눈물 때문인지 눈앞이 가물가물 흐려졌다. 당장에라도 그를 붙잡아 따지고 싶은데. 바닥에 엎어져 패악을 부리고 싶은데…….
“부인! 부인! 정신 차리세요! 아가씨!”
안나가 옆에서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윙윙거리는 귓가와 뿌연 시야. 그 속을 헤매던 헤레이스는 결국 픽 정신을 놓아 버렸다.
* * *
“이름이 샬럿이래요. 이름도 천박해서는!”
“…….”
“그 여자가 뭐 하던 여자인지 아세요? 잠자리를 업으로 하는 여자래요. 그것도 전쟁 통에 병사들을 상대로요!”
“…….”
“배 속에 아이도 분명 주인님의 자식이 아닐 거예요. 삼 개월 전만 해도 주인님이 얼마나 다정하셨는데!”
“…….”
“그러니 걱정 마세요. 다 한때랍니다. 예전에 들은 적이 있어요. 사내들은 가끔 정신이 나가 미친 짓을 한다고요. 주인님도 그런 거예요. 왜 전쟁터에 오래 있다 보면 오락가락한다잖아요. 그러니깐 아가씨…… 아니, 부인 심려하지 마시고…….”
“……그만하렴.”
“…….”
“난 괜찮으니 그만해, 안나.”
안나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며 고함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말해 봤자 지금 상태의 헤레이스에게는 들리지 않을 터였다.
헤레이스는 제대로 넋이 나가 있었다. 푸른 눈은 얼핏 보면 난로 안에서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불씨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지만 생기를 잃은 상태였다.
하긴 얼마나 충격이 클까. 안나는 입술을 말아 문 채 헤레이스를 이리 만든 이즈카엘과 그 여자를 속으로 욕하며 새로 분통을 터뜨렸다.
‘아까 웃을 때 입이라도 찢어 놨어야 했는데!’
하녀 에이미가 몰래 전해 준 말에 따르면, 성의 주인인 이즈카엘은 데리고 온 금발 계집에게 본채와 가장 가까운 별채를 내주며 별채를 정리하기 전까지는 공작의 서재 옆방을 쓰라 허락했다고 했다.
‘서재 옆이라니! 이 방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다고! 우리 아가씨한테 그리 죽고 못 살 것처럼 구시더니 다 거짓이었어.’
사내라는 족속들은 부인이 임신하면 딴 주머니를 찬다더니……. 하지만 화가 나는 와중에도 안나는 의구심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에게 지극한 남편이었다. 디본의 몰락 후 노예가 될 뻔한 그녀를 구했던 것도, 죽음을 택하려던 그녀를 구한 것도 그였다.
게다가 3개월 전, 성을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이즈카엘은 헤레이스만을 바라봤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여인이 그에게 안기길 고대하며 눈길을 보냈던가. 성을 떠나기 직전 욕실에서 그를 유혹한 하녀 에이미의 팔을 꺾어 부서뜨린 후 쫒아낸 그였다.
‘심경의 변화가 있을 만한 일이라곤…….’
그러고 보니 두어 달 전 주인이 다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더랬다. 그때 헤레이스가 그곳으로 직접 가겠다 고집을 부리는 탓에 그것을 말리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얼마 뒤 괜찮아졌다며 서신이 왔길래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했는데……. 그쯤부터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부인! 그때예요! 그때가 틀림없어요.”
머릿속을 탁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자고로 사람은 아플 때 마음이 약해지는 법. 샬롯이라는 계집은 그때를 이용해 주인에게 접근한 것이 틀림없었다. 전쟁터에서 몇몇 여자들이 다친 병사들을 종종 돌보다가 그들을 꾀어낸다고 했으니 아귀가 딱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