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목을 꺾는 악마여 >
1화.
프롤로그. 낯선 여인
날씨가 제법 찼다. 세르펜스 성 바로 앞 아우뉴 호수는 그 위를 건너는 바람마저 얼려 버렸다. 냉기를 이기지 못해 반쯤 부러진 나뭇가지가 뚝뚝 일정한 간격으로 소리를 내다 마지막에는 완전히 끊어졌다.
그나마 눈이 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헤레이스는 두툼한 담비 털로 안감을 댄 공단 망토를 꼭 쥐었다. 수도는 이쯤이면 따뜻해지기 시작하는데, 그와 달리 매서운 북부의 날씨는 2년이 넘어가도록 적응하기 힘들었다.
“부인, 귀가 빨개지셨어요. 안에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게 어떨까요? 응접실 창가에 있으면 주인님께서 오시는 게 보일 거예요.”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가 추위에 빨갛게 얼어붙었다. 헤레이스의 상태를 살피던 안나는 제 귀 또한 꽁꽁 언 것도 모른 채 발을 동동 굴렀다.
“괜찮아. 아직은 견딜 만한걸.”
헤레이스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 했지만, 안나의 얼굴에는 여전히 걱정이 한가득하였다. 그녀의 상전은 몸이 썩 건강하지 못했다. 그러나 헤레이스의 다물린 입술에는 만만찮은 고집이 있었다. 결국, 안나는 상전의 망토를 더 단단히 여미는 것으로 걱정을 대신했다.
“……그이가 다쳤다 들었어. 오늘 날씨도 추운데, 오는 데 힘들지 않을까?”
“다 나았다 전해 왔으니 괜찮으실 거예요. 그리고 북부에서 이 정도 날씨는 아무 것도 아닌 걸요. 오히려 좋은 편에 속한답니다.”
“그래도…… 아!”
“아가씨!”
거친 삭풍이 헤레이스를 강타했다. 가느다란 몸이 휘청이자 놀란 안나가 상전을 옛 칭호로 부르며 부축했다. 빠른 그녀의 대처 덕에 다행히 헤레이스는 넘어지지 않았다.
“이래서 들어가시라 했던 건데…….”
도무지 걱정을 접을 수 없었다. 헤레이스는 보는 것만으로도 애가 타는 여자였다. 지금도 보라지. 두꺼운 망토를 둘렀음에도 그녀는 안나보다 작아 보였다.
하지만 여린 외양과는 별개로 헤레이스는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이름에 걸맞게 대단한 미인이었다.
창백한 피부는 별밤같이 새까만 머리색과 그림처럼 어우러졌고, 큼지막한 푸른 눈은 깊은 아우뉴 호수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러한 외관 덕에 헤레이스는 수도에 있을 때만 해도 모든 사내의 선망이었다. 그녀가 장미꽃처럼 붉은 입술을 열 때면 수십의 사내가 그녀만을 바라봤다.
‘……그것도 다 옛일이지.’
옛 영광을 그리던 안나가 한숨을 작게 쉬었다. 그랬다. 그런 시절은 지나가고 없었다. 그녀의 상전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사내들이 그녀를 보며 찬탄할 일은 이제 없었다.
이유야 뻔했다. 지금의 헤레이스는 한 사내의 아내로 남편에게 종속된 몸이요…….
‘가여운 우리 아가씨.’
반역으로 처형당한 죄인의 여식일 뿐이었다.
* * *
3년 전 제국 아나이스에는 거친 피바람이 불었다. 시작은 황제의 이복형, 페가토 후작의 반역을 누군가 밀고하면서부터였다.
황제는 이 사안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정부 출신 어미를 뒀음에도 페가토 후작은 황제에게 몇 번이고 이빨을 드러냈다. 자신이 선황의 장자라는 이유였다. 그러니 황제가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황제는 사이 나쁜 이복형제를 곧장 죄인으로 끌어내렸다.
반역의 수괴인 페가토 후작을 시작으로 나라 전체에서 죄인들이 끝없이 끌려 나왔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페가토 후작의 반역에 가담해 큰 충격을 주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황제의 동복동생인 황녀 율리스마저 이 일에 관여했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여동생의 처벌을 주저했으나 너무도 명백한 증거에 피눈물을 흘리며 여동생을 벌했다. 그녀는 목숨을 건졌으나 황녀 직위를 박탈당하고 죄인으로서 탑에 수용됐다. 아마 그녀가 살아생전 탑을 나올 일은 없으리라.
살벌한 분위기 속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헤레이스의 아비이자 명망 높던 디본의 가주, 디본 후작도 그때 목이 잘렸다. 그는 반역에 제법 깊게 관여했다. 죄목이 죄목인 만큼 디본이라는 성은 모든 책에서 지워졌으며, 가문의 명패는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디본의 가솔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죽은 후작 부인이야 이미 사자이니 변을 피했지만, 헤레이스의 오라비는 죽기 직전까지 고문당한 뒤 나라 밖으로 추방당했다. 그 외 방계 또한 쫓겨나거나 작위를 박탈당했고, 고문을 받다 죽는 등 고초를 겪었다.
디본이라는 성을 가진 이 중 벌을 받지 않은 이는 헤레이스뿐이었다.
처음 디본이 망하고 헤레이스 또한 잡혀갔을 때 다들 어떤 생각을 했던가. 그 유명한 디본의 헤레이스가 목이 잘리는가, 아니면 황제께서 호의를 베푸셔 노예로 떨어지나. 전부터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던 사내들은 후자를 기대하며 목을 쭉 뺐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육신 멀쩡하게 풀려났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을 깨고 결혼했다.
세르펜스 공작과.
‘왜 새로이 공작이 되신 세르펜스 공께서…….’
‘전부터 교류가 있었다고는 들었지만 참으로 망측한 일입니다. 남동생의 약혼녀를…….’
이 반역에서 가장 많은 소문을 불러온 건 단연 세르펜스 공작가였다. 당연했다. 황녀 율리스가 세르펜스 공작 부인이었으니.
조사 결과 와병으로 오래전부터 침상에만 있었던 세르펜스 공작은 반역과 무관하다 밝혀졌다. 하나 율리스 황녀의 죄는 너무도 일목요연했으므로 그녀의 아들 샤를 세르펜스는 후계 자리를 박탈당했다. 간접적으로 어미를 도왔다는 죄목이었다.
황제는 세르펜스 공작의 뒤를 그의 사생아로 하여금 잇게 했다. 모두 사생아가 무슨 공작이냐 반발했지만 곧 밝혀진 그의 정체에 입을 다물었다.
‘이즈카엘 경은 이번 일에 가장 큰 공신이지.’
이번 반역의 밀고자이자 도살자, 황궁 기사 이즈카엘이 공작의 사생아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는 밀고자인 동시에 황제의 검으로, 이번 일에 앞장서 반역자들을 베어 넘겼다. 그가 목을 벤 사람들의 수가 어찌나 많았는지 사람들은 그를 뒤에서 도살자라 불렀다.
‘세르펜스 공작의 아들 이즈카엘로 하여금 공작 위를 물려받게 하겠노라.’
세르펜스 공작은 반역이 제압되기 무섭게 숨을 거뒀다. 그의 숨겨진 사생아 이즈카엘은 아비가 죽자마자 황제를 등에 업고 세르펜스 공작이 됐다. 그는 뭘 원하냐는 황제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헤레이스. 멸문한 디본의 여식을 원합니다. 그 외에는 지금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폐하.’
이즈카엘의 입에서 나온 헤레이스란 이름에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그녀가 사내라면 누구라도 혹할 만한 미인이라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의 이복동생이자 어미의 죄로 후계 자리를 박탈당한 샤를의 약혼녀였다.
반역으로 인해 헤레이스와 샤를의 약혼은 깨어지는 것으로 기정사실화됐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남동생의 약혼녀였던 여인을 요구하는 것은 입방아에 오르기 충분했다.
게다가 샤를과 헤레이스 두 사람의 약혼이 어디 보통 약혼이던가. 율리스 황녀는 죽은 후작 부인과 어릴 적부터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때문에 헤레이스와 샤를 두 사람의 약혼은 거의 태중 혼약이나 다름없었다.
이즈카엘의 요구에 황위를 제외하면 모든 걸 들어주겠노라 천명한 황제조차 조금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공작, 다른 것을 원하는 게 어떠한가. 그 여인은 한낱 죄인의 딸에 불과하다. 아름답다고는 하나 그대가 갖기에는 너무도 미천하지.’
사실 황제는 샤를과 헤레이스의 약혼을 유지시킬 생각이었다. 여동생을 벌하고 그 자식에게 불명예를 안겼으나 한때는 가까운 핏줄이요, 아끼는 외종질이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된 샤를이 안타까웠던 황제는 일이 좀 잠잠해지면 외종질에게 적당한 작위와 헤레이스를 돌려줄 참이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녀뿐입니다.’
하지만 이즈카엘은 완강했다. 그는 헤레이스를 제외한 어떤 것도 필요 없노라 말하며 고집을 피웠다. 결국 새로운 측근을 위해 황제가 먼저 뜻을 꺾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수락이 떨어지자 이즈카엘은 헤레이스를 끌어내다시피 해 감옥에서 빼냈다. 그리고 설마하니 부인으로 삼겠냐는 말을 비웃듯 북부 세르펜스 성으로 가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눈 깜빡할 사이 일어난 일에 모두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이런 경우가! 반역 죄인의 여식이 공작 부인이라니. 말도 안 되오!’
‘그러고 보니 공작께서 일개 기사였던 시절 염문 났던 여인이 디본의 여식 아니었습니까. 헛소문이라 여겼는데…….’
‘샤를…… 그분만 불쌍하게 됐지요. 한순간에 모든 걸 다 잃으시고 약혼녀까지 이복형에게 가 버렸으니 지금쯤 얼마나 속이 탈까. 좋은 분이셨는데 가엾게 되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사람들은 그녀를 손가락질했다. 황제의 측근이자 새로이 세르펜스 공작이 된 이즈카엘은 두려우니 만만한 그녀를 향해 비난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비열한 일이었으나 그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헤레이스는 한순간에 더러운 여자이자, 형제를 유혹한 요부로 변모했다.
* * *
“저기! 주인님 일행이 보여요!”
“어디? 어디 있…… 아…….”
안나의 말에 언덕 위를 본 헤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저어기 계신데……. 보이세요?”
“응…….”
“참 멀리서 봐도 주인님은 늠름하세요. 바로 알아봤다니까요. 어머, 부인. 뺨이 어쩐지 더 붉어지셨어요.”
사람들은 헤레이스를 향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었지만 당사자인 그녀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녀는 귀가 닫힌 양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갑작스럽게 결혼하게 되었는데 괜찮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2년이 지나자 헤레이스는 이것 하나만은 괜찮다 여겼다. 아니, 사실 그녀에게 그 한 가지만은 행복했다.
‘이즈카엘이 드디어…….’
헤레이스는 누가 뭐라 해도 이즈카엘을 사랑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집안일로 황폐해진 그녀를 구해 주고 지켜봐 줬다. 그녀가 아무리 패악을 부리고 주제넘게 굴어도 다정하게 보듬어 준 사람이었다. 찢어졌던 헤레이스의 정신과 마음은 이즈카엘로 말미암아 회복될 수 있었다.
감사함을 깨닫는 데 장장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는 사실이 미안할 정도였다. 헤레이스는 까치발을 들어 점차 다가오는 남편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봤다. 검은 군마 위에 앉아 위용이 넘치는 그의 모습은 석 달 전과 똑같이 근사했다.